극악서생 1부 – 16화
암튼…
오늘은 아침에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바쁜 하루였다.
대교와 함께 비밀서고에 들어가 반나절을 보냈고,
오후에는 장명 부부를 심문(?)했으며,
이어 내 방으로 돌아와 냉화절소 장청란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분석하는데 자그마치 3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장청란의 강호 복귀 이후의 ‘협객행’에 대한 내용이 태반이었는데,
겨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동업자(?) 격인 사마 외도의 인물들을 14명이나 격살했단다.
그 숫자는 거물급만 따져서 그렇고, 만정산이란 곳의 산적 백여 명을 하룻밤 사이 단신으로 몰살시킨 일도 있다고 하고…
디게 살벌한 계집애다.
성격 측면을 보면…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거쳐 성장한 소녀답게 다재다능…
분명 정의를 추구하지만, 차갑고 도도한 성격…
유아독존 식의 사고방식…
시장통에서 도둑질한 여자의 팔을 잘라버린 일화로 보아 ‘범죄’에 대한 결벽증도 좀(?) 있는 것 같고… 흠…
나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 같은 것은 없다.
단지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그런 타입의 성격을 가진 여자애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내가 읽은 책들(주로 무협지) 속에서의 묘사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의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딱 이거다 하는 것은 없었다.
에구… 관두자, 관둬.
내가 뭔 천재씩이나 된다고 생판 모르는 계집애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싶다.
난 나의 ‘천재성’에 대한 생각을 겨우 3시간 만에 포기해버렸다.
뭐…
제공된 자료를 정밀 분석하여 그녀의 성격이 무공을 쓸 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추정하는 작업은 ‘몽몽’이 다 알아서 할 테고…
난 그 놈의 ‘각막 스크린’ 기능에 익숙해지는 것이 선결 과제인 것 같다.
장청란과 대교의 ‘가상 대결’을 지켜본다든지,
장명 부부의 행동을 다시 돌려본다든지…
‘각막 스크린’이 나 ‘리얼 스크린’ 기능을 앞으로도 쓸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가만있자… 전에 PC로 오락할 때, ‘DOOM 2’를 몇 번 해보고서야 ‘3D 화면’에 익숙해졌었더라?
장명과 구월화 부부에 대한 자료도 총관이 급히 구성해 가지고 왔지만,
읽어보니 극히 미비했다.
장명과 구월화의 간단한 신상명세와 가족 사항 정도?
이 시대의 교통편이나 정보 통신망(?)을 감안했을 때,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십 킬로 떨어진 다른 파 인간들의 정보를 자세히 알아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연히 보고서를 팽개치며 총관에게 인상을 긁어보였고,
총관은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 확실한 2차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겠다고 침 튀기며 맹세(?)했다.
이 짓도… 하다 보니 가락이 붙는 것 같다. – -;;
내가 침상에 누운 것은 밤이 찾아와 미령이가 방안의 등불들을 밝히고 있을 때였다.
난 몽몽에게 녹화해 놓으라고 했던 장명 부부의 심문 장면을 몇 번이고 ‘각막 스크린’ 기능으로 되풀이 보았다.
그때 내가 굳이 바닥에 앉아서 그들을 대한 것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장명의 얼굴 표정까지 몽몽이 촬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까는 직접 볼 수 없었던 각도의 시각까지 포함하여 녹화된 화면을 되풀이해서 본 결과,
내 판단에 더 확신이 섰다.
장명… 이 겉과 속이 다른 인간과 글래머 구월화…
너희 둘의 가면은 내일 벗겨 주기로 하지. 흐…
몽몽의 ‘각막 스크린’ 기능을 종료시키고…
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가상 현실 후유증’을 체크했다.
역시 좀 어지럽긴 했지만 ‘비밀 서고’에서 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미령..”
“존명!”
막내 미령이는 방문 옆에 서 있었는데,
내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총알같이 튀어와 한쪽 무릎을 꿇는다.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긴장되어 있는 것이
처음 내 방 당번이 되었을 때의 모습이다.
‘가상 현실’을 본 후의 후유증 때문에 내가 인상을 구기고 있어서 그런가 하여,
애써 얼굴을 풀며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오늘은 니가 당번이구나? 음.. 나, 지금 좀 출출한데…”
“존명! 곧 석찬을 대령…”
“야, 그 말 쓰지 말라니까. 그냥 예- 하고 대답해.”
“조, 아,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서는 미령이에게 추가로 명령했다.
“음.. 술도 좀 가져오고, 그리고 너희 두 언니.. 소교과 소령이도 불러와!”
“…예!”
역시 ‘대교’의 일 때문인 것 같다.
충성스러운 자세는 변함이 없으나,
그동안 유지되던 나에 대한 ‘친근함’이 사라진 표정과 태도를 보인다.
암튼, 항상 이 곳의 명령 체계는 그야말로 ‘칼’.
내가 먹을 술과 안주가 테이블 위에 준비되고,
소교, 소령이가 호출되어 내게 인사하며 들어오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음식을 날라 온 다른 시녀들이 나간 후, 나는 천장을 향해 말했다.
“어이- 거기, 너! 잠시만 사라져 줄래?”
대교 자매들은 내가 또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의 그림자’격인 천장 속의 ‘킬러’를 상상해냈는지 긴장과 호기심을 드러낸다.
“잠시.. 그러니까, 한 십 분 정도만 자리를 피해 달라는 얘기야.”
대답도 없고… 몽몽에게 스캔 시켜보면 움직임도 없다.
“..새꺄! 어디가서 좀 쉬다 오라구. 넌 그 안이 갑갑하지도 않냐?”
묵묵부답에 무댓보 고집불통.
원판의 사부가 고아를 데려다가 오직 원판을 위한 존재로 키웠다는 ‘킬러’…
목적은 오직 원판(어쨌든 지금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것.
제기, 씹힌 건 좀 짜증나지만 얘는 믿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계속 그렇게 짱 박혀 있어라.
갑갑한 청춘 같으니라구, 제기…”
난 공연히 혼자 툴툴거린 후,
쭈볏거리고 어색하게 서 있는 대교의 동생들을 모두 내게 바짝 다가서도록 했다.
나는 얼굴, 아니 귀를 더 바짝 대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고,
대교 자매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침 갤갤 흘리는 도마뱀 괴물을 앞에 둔 표정들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는 낮은 음성으로 ‘기밀 사항’을 얘기했다.
“얘들아.. 잘 들어. 너희들의 언니, 대교는 죽지 않았어.”
…모야,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
“..믿지 못하겠니?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오늘 착각을 좀 해서 대교를 거기 데려갔지만,
난 대교를 죽이고 싶지 않아. 일단은 거기 당분간 머무르게 할 생각이고..
앞으로도 어떻게 든 죽지 않게 할 거야.”
난 새삼 주변을 휘둘러본 다음,
더욱 신중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 슬퍼할까 봐 말하는 거지만,
너희들도 알지? 지금 이런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나도 대교를 살릴 수가 없어.
내가 어떻게 든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너희들만 알고 있어.”
…..이런 제기!
내 표정과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야?
왜 계속 그렇게 믿지 못하는 표정들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