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7화
난 괜히 기분이 좀 상해서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희들, 내 말이 그렇게 안 믿겨지냐? 응?”
“아, 아닙니다. 곡주님. 저흰 그저.. 그저 너무 뜻 밖이라…”
소교가 더듬거리며 말하고는 동생들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보았다.
소령이와 미령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역시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긴, 내가 자신들의 큰언니인 대교를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극악서생이란 자가 듣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니 지금 새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곡주님..!”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대교의 생존 사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을 해보는데, 입을 연 것은 막내 미령이었다.
“대교 언니를 포함해서.. 저희들의.. 천한 목숨은
모두.. 곡주님의 것.. 가져가신다고.. 원망치는 않습니다.”
운..다?
어라랏!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지만, 이 아이 지금
울면서 말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하지만…”
“닥쳐라! 미령아!”
소교가 야단치며 미령이에게 손을 뻗었고
미령이는 그 손을 피해 빠르게 몇 미터 뒤로 이동했다.
경공을 썼나 보다 엄청 빠르다.
미령이는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내게 외쳤다.
“너무 하세요! 이렇게까지 저희들의 마음을 희롱하시다니-
정말 너무 하세요! 저희를 놀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닥쳐라! 감히 곡주님께-!”
소교와 소령이가 동시에 몸을 날려 미령이를 공격했다.
미령이는 저항할 의도는 없었는지, 가만히 서서
언니들에게 일장씩 얻어맞고 쓰러져 버렸다.
나의 다급한 외침은 그제서야 터져 나왔다.
“그만 둬! 모두 멈춰!”
젠장,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그리고.. 쓰펄! 더러워서 나도 어떻게든 무공을 익히든지 해야지,
기집애들 싸우는 거 말릴 타이밍조차 맞추지 못하다니….
나는 급히 쓰러진 미령이에게 달려갔다.
빌어먹을..! 안색이 너무나 하얗고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너희들, 그렇다고 동생을 이렇게 패냐? 이거,
이거… 젠장, 몽몽! 빨리 상태를 살펴!”
제기- 얼핏 어깨와 가슴께를 얻어맞는 것 같았는데,
으으.. 말도 안돼! 만약 나 때문에 미령이가
언니들 손에 죽는다면, 그렇게 되면…
“야, 몽몽! 이 새꺄! 뭐해! 애 죽잖아. 빨리 방법을
말하란 말야!”
[안심하십시오. 중상이지만, 치명상은 아닙니다.
이 곳의 의료 수준으로도 후유증 없는 치유가 가능합니다.
우선 응급조치로, 막힌 기해혈과 아승혈을 통하도록 하십시오.]
“치, 치명상은 아니라고…?”
후우- 다행이다.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렴
언니들이 동생을 진짜 죽도록 팼겠어…
나는 비로소 숨을 돌리며 소교에게 명령했다.
“야, 우선 미령이의 기해혈과 아승혈을 통하게 해 줘.
후… 제기, 얘 언니들 맞아? 이 쬐깐한 거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그렇게 모질게 패냐 그래…”
“소, 송구합니다.”
소교와 소령이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미령이의 상체를 일으키고는
소교가 미령이의 등에 자신의 두 손을 댄다.
뭐… 무협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대로 다.
보통 저렇게 치료하나부지?
[다음부터는 주의하십시오. 주인님은 조금 전
이 시대 언어로 저에게 명령했습니다.]
아, 그랬었나..?
미령이 얼굴이 하도 창백하고 입에서 피까지 찍-
흘리고 있는 모습이라 다급한 마음에서 그랬나 보다.
음.. 제기, 기계한테 민망한 생각이 다 드는군.
으왓-?
[pme31계열 에너지를 이용한 효과적인 의료행위입니다.]
…그 정도는 알아 임마, 무협 영화에서도 숫하게 나오는 장면이라구.
막힌 혈도가 풀리면서 나쁜 피를 토해내는 것이
오히려 치유되는 현상이라는 거…
머리로는 그렇게 알면서도, 갑자기 미령이가 입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에 괜히 깜짝 놀랐었다.
어쨌든.. 응급조치는 잘 끝났는지 희미한 신음과 함께
미령이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 미령이를 소교가 안고 일어섰다.
“잠깐만!”
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 내 옷소매로 미령이 입가의
피를 닦아주었다.
제기.. 디게 아픈가 보다.
아직 채 깨어나지 않았는데도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막을 수 있었는데..
내가 부주의하고 반응이 느려서 이런 어린 아이를
다치게 하다니.. 기분 정말 꿀꿀해 진다.
“의화각주에게 전달해. 내가 특별히 치료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다고…”
“조, 존명! 아니, 저.. 예..! 그, 그리고..”
뭐야, 소교.. 평소 대교보다도 말 잘하던 애가
왜 이리 버벅대?
“…제, 제가 곧 새 옷을 대령하겠습니다.”
소령이가 말하고, 먼저 방을 나서고 있었다.
뭐야, 소교가 더듬거린 게 나 옷 갈아입으라고 말하려는 거였어?
기집애, 싱겁기는…
이 십 분 정도 후….
소교는 막내를 의화각에 입원(?) 시키고 돌아왔고,
그 사이 난 소령이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잘 나가다가 꿀꿀해 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나는 연속으로 몇 잔의 술을 마셨다.
빨리 마셔서 그런지 갑자기 핑- 도는 기분이다.
“우후… 제기, 얘들아. 어떻게 하면 너희들이 날
믿겠냐? 음.. 아직 대교를 거기서 데리고 나올 수는
없고..”
“저흰 곡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셋째 소령이의 대답이었다.
“응..? 진짜? 괜히 하는 말 아냐?”
“곡주님의 진심을 미천한 저희들이 헤아리지 못해
심려를 끼쳤으니, 저희 자매들은 그저 죽고싶을 따름입니다.”
셋째 소령이는… 자매 중에서 좀 우직한 대가 있는
소녀다.
얘가 저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바뀌긴 바뀐 것 같은데…
왜지? 내가 미령이 다친 걸 걱정해 줘서?
입가에 묻은 피를 내 옷으로 닦아 줘서?
흠… 그러고 보니 얘들 입장에서는
감동을 주는 장면이었을 수도 있겠다.
뭐, 그거야 손수건이 없어서 그런 거였지만..
어쨌든 하늘 같은 주군께서 옷을 더럽히면서까지
닦아 준 것이니까.
결국.. 좀 전의 난리굿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네?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소령이가 따라준 술을 원샷 한 다음 말했다.
“있잖아.. 전에 대교가 처음 여기에 온 날.. 걔가
약간의 실수를 저지르고, 그리고 나에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부디 저 하나만 죽여주세요..라고 했어. 알고 있겠지만,
너희 동생들을 무지하게 아끼는 언니라구.”
“언니는.. 대교 언니는…”
둘 다 또 운다.
이번엔 내가 울린 셈이고, 울지 말라고 하기도 뭣해
서 그냥 놔두었더니, 새삼 큰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두 소녀는 좀처럼 수도꼭지를 잠글 생각을 안 한다.
문득, 저러다 ‘탈수 현상’을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소녀들이 주책 맞아 곡주님의
주흥을 깨는 짓을…”
그래도 언니라고, 소교가 먼저 진정하고 눈물을 닦았다.
“아냐… 오늘은 내가 전부 미안해.
암 생각 없이 대교를 거기 데려 간 것도 그렇고,
미령이 다친 것도 결국 내 잘못인 셈이고..
암튼 말이야. 나, 적어도 너희들 앞에서 만이라도
예전의 내가 아니고싶거든? 그러니까, 너희들도 뭐
충성도 좋고 다 좋은데, 너희들 자신을 좀 아끼고..
그리고 아까 미령이처럼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라구. 알았어?”
둘 다 비밀 서고에서 대교가 보였던 것과 유사한 표정이 되었다.
또 ‘날 느껴봐..’ 어쩌구하는 느끼한 대사를 해야할 상황이
될까 봐, 나는 서둘러 두 소녀에게 손짓했다.
“오늘은 이상, 끝! 둘 다 가서 쉬어!”
항상 그렇듯(?) 아침에 숙취로 인상 쓰며 눈을 떴다.
숙취해소음료를 마시고, 커피와 담배…
하루를 시작하는 절차를 즐기고 있는 나에게 총관이 찾아왔다.
그저 아침 문안인사 온 건가 했는데, 표정이 그게 아니다.
“곡주님..! 조금 전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냉화절소가 벌써 해남파에 돌아 왔다고 합니다.”
총관의 다급한 말투를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들었다.
“벌써..? 흠.. 예상을 하긴 했지만 결국, 그렇군.”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총관은 좀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이봐.. 장명은 우발적으로 야후 장로에게 칼을 뽑은 게
아니야. 분명히.. 장청란이 빨리 이 일에 뛰어들게 유도하는
계책을 마련해 놓고 시작했을 거야.”
당장 난 너보다 똑똑해,라고 우월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긴 한데, 좀 걱정도 된다.
이러다 내 예상들이 틀리면 개망신인데….
“…무골호인에 공처가로 알려진 그가 실은 속에
비수를 품고 있는 인물이라는 말씀..”
“맞아, 바로 그거야. 오늘 구월화를 심문해서 놈의
속셈을 좀더 확실히 알아내야 하겠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장청란의 움직임을 지체시키는 일인데…”
난 어제 다 생각해 놨으면서 괜히 또 생각하는 척 한 다음
말했다.
“전에 내가 말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한다.
음… 장청란에게 직접 내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
정식으로 우리 측 고수 한 명과 무공대결을 해서
장명을 찾아가라고…”
“예-? 그, 그건 좀…”
“우리측에 화천루주를 확실하게 이길만한 고수가 없다고 생각해?”
“외람되오나.. 현재 본 곡에서 그녀와 호각을 이룰 고수들은 있을지 모르나 확실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고수는 없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그건 걱정 마, 그런 고수가 곧 이 곳으로 올 거니까 말야.”
“당금의 우리 사마 외도에 그런 고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있어. 그의 별호는… 마봉낭자(魔鳳娘子).”
“마봉낭자…?”
총관은 자신이 아는 고수들을 떠올리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흐.. 댁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만든 대교의 별호니까.
“’마봉후’라는 별호는 기억하지…?”
그제서야 총관이 감탄성을 울렸다.
“아, 설마.. 마봉후께서는 미처 자신의 독문절기를 전수할 인재를 만나기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럼 곡주께서 직접 그 후인을 양성하신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전의 마봉후보다 더 강하다고 하면.. 그럼 승산이 있지 않겠어?”
“…마봉후는 비록 여성의 몸이었으나, 역대 장로 중에서도 독보적인 고수,
헌데 그보다 더 강한 내력을 가진 후인이라면.. 아아- 곡주께선 이미 모든 사태를 대비해 안배 해 놓으셨군요.”
총관은 우러나는 존경심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감탄성을 울리고 있었다.
미리 안배는 무슨..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뭐 빠지게 준비하려는 걸세….
“근데, 문제는 마봉후의 후인이 폐관수련을 끝내고 이 비화곡에 오기로 한 날짜가 한달 정도 후거든?
음… 그래, 아예 그걸 솔직히 장청란에게 밝혀. 마봉후의 후인과 대결하고 싶으면 한달 정도 기다리라 고….”
나는 그 외에도 몇 가지 세부사항을 더 지시한 후 총관을 내보냈다.
총관은 들어 올 때와는 달리 힘차게 명령을 받들고 방을 나섰다.
뭐.. 대교와 장청란의 대결은 대충 내 계획대로 될 것 같았다.
당연히, 장청란이란 계집애도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은 꺼림칙할 것이다.
사악하고 잔인한 전략 전술로 강호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극악서생’이 지휘하는 거물 마두들의 무리가 상대인 이상 말이다.
그리고 젊고 도도한 성격의 고수가 일대일 대결을 거부할 것 같지도 않고…
이제 남은 건 대교를 최대한 빨리 키우는 것과 저 음흉한 장명 놈의 음모를 밝히는 거다.
이 짜샤- 우선, 기본적으로 우린 니가 노린 ‘전쟁’은 안 해.
………
아참, 그보다 우리 대교 배고프겠다.
언능 음식 싸 가지고 가야 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