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8화


비밀서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제일 찝찝한 곳은 예의, ‘아수라 백작’이 있는 두 번째 문이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더 꺼림칙하다.

“……….”
“……….”

그-그-긍-!

응…? 오늘은 인사말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문을 열어주네?

우쒸, 설마 어제 내 농담에 삐져서 갑자기 한 칼 날리려는 건 아니겠지?

거대한 돌문을 통과하는데, 괜히 뒷통수가 캥겼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무지하게 긴장되었다.

어제 괜히 농담을 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두 번째 관문에서의 찜찜하고 불쾌했던 기분은 비밀 서고에 도착하자 어느 정도 사라진다.

맘에 드는 장소에 맘에 드는 애가 있으니까…

후후… 원체 성실한 애니까 혼자서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

오- 역시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잔 다..? 뭐야, 아직 자고 있어…?

대교는 어제 몽몽에게 신체검사(?)를 받았던 바위 위에 옆으로 어색하게 누워있었다.

입구와 계단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저것이 무공 수련 자세가 아니라는 건 안다.

으… 이 것이 시간도 없는데, 게으름을 피우다니…

아니, 아니야.. 쟤가 그럴 애가 아니지, 틀림없이 밤새 무공을 익히다가 좀 전에 잠들었을 거야.

암… 저 자세를 봐, 맘먹고 잠자리에 든 것이 아니라 안 자려고 버티다가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져 잠든… 쓰러진…?

가, 가만 이거 어째…

[주인님, 대교라는 여성의 신체 상태가 비정상적입니다.]

뭐시라고라고라~~!!

나는 후다닥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보니 대교의 어깨며 등이 바로 코앞이었다.

으잉-? 뭐야!

옷에.. 맨 살이 비친다?

이 안의 기온은 지하라 그런지 상당히 시원한 편인데, 어째서 대교가 이렇게 빰에 젖어있는 거지?

대교는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 곡주..니..임…”

“뭐야, 너 왜 이래, 응?”

“소..녀가.. 실수를…”

[수라진경에 수록된 마이너스 에너지 운용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군데의 흐름이 역류하여, 현재 전신 에너지 응집점의 다수가 손상되었습니다.

통증은 크지 않을 것이나, 신체 운동 능력의 상실로 인한 정신적인 손상이 예상됩니다.]

톡!톡!톡!

대교의 상태가 엄청 걱정되었지만, 어제 미령이 일을 한 번 겪어서 그런지 몽몽을 두드릴 정신은 있었다.

“야, 위급.. 한 거냐?”

[현 상태가 5시간 이상 지속되면 에너지 응집점의 손상률이 높습니다.

현재로써 생명 유지 기능 자체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음.. 몽몽 너 있잖아, 지금 대교의 상태를 최대한 이 곳 용어로만 표현해봐.”

[마봉후의 ‘수라진경’에 수록된 내공운용법을 시행 중 실수를 범해 일종의 ‘주화입마’에 빠졌습니다.

5시간 안에 막힌 혈도를 풀어주지 않으면 상승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짜식이 쉽게 잘 하면서 꼭…”

[전 주인님의 이 시대 상황 대처 능력과 이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알아, 안다구…”

마음이 급할 때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사실, ‘통일 한국 로봇 제작 규칙’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한다.

2540년이라고 했던가? 그 때까지 보고 된, 로봇을 비롯한 발전된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 정신 피폐화의 가속화가 결국 중요한 법안을 만들게 되었단다.

‘통일 한국 로봇 제작 규칙’도 그 법의 하위 법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로봇을 비롯한 모든 기계 문명이 인간이 할 일을 무조건 대신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 그 이념이라고 한다.

그 법안이 제정된 후, 인간은 모두 ‘정신능력’을 검증 받은 후 각각 등급을 판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쉽게 얘기해서… 로봇이나 다른 기계 문명의 혜택을 받아 편하게 살 때…

쉽게 게을러지고 암 생각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격인 사람은 기능 제한도 많고, 잔소리(?)가 많은 로봇이 배정되는 식이다.

‘몽몽’은 그 법안 통과 후 자그마치 400년 정도 더 지난 후에 제작된 로봇이라는데, 제작된 시대에도 단 3대만이 제작된 ‘고급 사용자용 지능 로봇’이라고 한다.

그게.. 나한테는 다행인 것이, ‘몽몽’ 정도 수준의 로봇 사용자는 기능의 사용 권한 제한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음… 하지만 내가 본래의 사용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역시 간단히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고…

또, 꼭 집어 물어보지 않으면 지 기능을 다 알려주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항상 미래, 내가 온 1999년, 그리고 지금의 애매한 ‘무협지 세계’의 용어를 혼재하여 사용하며

내게 다양한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뭐, 어쨌든… 기분에 따라 툴툴댈 때도 있긴 하지 만,

사용자가 머리를 써서 자신에게 주어진 ‘도구’를 효과적으로 쓰라는 그 미래 법안의 기본 이념은 사실 나도 마음에 든다.

예를 들어 자동 조준,

자동 발사되는 총이 장착된 자동 조정 전투카를 타고,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만 전쟁을 하면 무슨 재미가…

“고, 곡주님.. 소녀가.. 실망을.. 드리게 되어.. 죄송..”

힘겹게 입을 연 대교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왔을 때에야 나는 제 정신을 차렸다.

아차차-!

아픈 애를 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아직 5시간 남았다고 하니까 좀 방심했나 보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억지로 말하지 마. 내가 치료해 줄 테니까, 안심하고…”

나는 우선 어색하게 쓰러진 자세인 대교의 몸을 바위 위에 똑바로 눕혔다.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몇 번 더 안심하라는 말을 하고 나서,

몽몽의 지시대로 오른쪽 벽에 셋트된 석실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 지하의 비밀 서고.. 처음엔 책만 보고 ‘비밀 서고’라고 했는데,

사실 별의별 것이 다 갖추어진 종합 창고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 같다.

입구가 감추어진 석실이 다섯 개인가 되는 데,

지금 들어온 곳은 ‘영약’으로 여겨지는 약들과 기타 많은 의약 도구 같은 것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몽몽의 지시대로 몇 가지 약재와 장비를 꺼내 석실 중앙 탁자에 늘어놓았다.

[먼저 제일 작은 병에 담긴 공미유(空彌油)를 그 옆의 측정 용기를 이용해 1 밀리그램 준비하십시오.

왼쪽 두 번째의 산하초(蒜鰕草)잎과 세 번째의 진이단(珍易丹)을 용기에 3.4대 1로 담아 혼합하시고,

혼합 1분 20초 후, 준비된 공미유를 추가하십시오. 그런 다음…]

“……..”

[시행하시면, 다음 진행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좀 더 쉬운 방법 있지? 그치?”

[저의 인체 컨트롤 기능만으로도 해당 여성의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경계 조작과는 달리 행성 에너지, 즉 이 시대 인체 고유 ‘에너지’의 통로인 ‘혈도’ 복구 작업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이 곳의 서적에서 얻어진 데이터를 이용한 방법이 보다 안전합니다.]

“그, 그래..? 하지만 이렇게 복잡해서야 어디…

으.. 제기, 알았다 알았어.”

어쩐지 좀 전에 생각했던 대로 몽몽에 의해 ‘훈련’을 받는 기분은 들었지만,

하여간 그 편이 대교를 치료하는 방법 중 안전빵이라는 대에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우선 군대에서 ‘사격’에 앞서 정신을 집중할 때의 습관대로

가벼운 팔굽혀펴기와 뒷짐지고 제자리 뛰기를 몇 차례 했다.

본래 내 몸이 아닌, 허깨비 같은 몸이라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안한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좋아..! 시작하자, 몽몽!”

약, 한 시간 정도 후….

나는 내가 손수 조제한 약을 작은 사발에 담아 들고,

그리고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병에 든 ‘공청석유(空靑石乳)’를 가지고 대교에게 돌아왔다.

대교가 날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려, 니 심정 안다. 알아.

니 주인이 불과 한 시간 만에 얼굴이 누렇게 뜨고 두 눈이 벌겋게 토끼 눈이 되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거지?

에구구.. 그리고 젠장맞을!

보통 무협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냥 끝내주는 영약 한 알로 해결되면 좀 좋지?

약 만드는 것이 뭐가 그리 복잡하고 까다로워?

그리고 몽몽 짜식, 양파 썰 때처럼 눈이 매운 기운이 있는 약을 다룰 때는 미리 미리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으으…

암튼, 고생한 만큼 보람이 느껴지기도 해서

난 만면의 미소를 띠며 대교의 입에 내가 만든 약을 흘려넣었다.

그리고 나서 대교의 몸에 약 기운이 제대로 퍼지게 되면

우선 땀이 더욱 많이 흐르며 안색이 붉어지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 전에 부드러운 천과 물을 준비해 두십시오.

약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면 여성의 의복을 모두 벗기고 전신의 땀을 닦아 내 주십시오.]

뭐시라고라-!

으..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건 분명 언놈의 농간이다.

왜 매번 대교와 나 사이에 이런 난처한 이벤트(?)가 생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