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화


내가 내준 지상 과제에 ‘불만’이 없지 않은 것 같던 총관(혈마검호 란다, 명호가…)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밝아지고 있었다.

“네 자매의 재능이 놀랍습니다. 제가 왜 그런 인재들을 몰라 봤는지… 곡주님의 영명한 안목에 새삼 감탄할 따름입니다…”

그래…? 재능 어쩌구는 그냥 한 말이었는데…

하여간 내 안목을 칭찬하는 것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네 자매를 가르치는 데 재미가 들린 그가 총관 일조차 소홀해 하는 것 같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소녀들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고… 지금은 곡주님이 무섭지 않습니다.”

대교 말대로 정말 환상적으로 귀엽고 앙증맞은 막내 미령이가 두 번째 내 방 당번이 되었을 때,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나에 대한 느낌을 그렇게 밝혀왔다.

음… 좋아, 좋아… 그럼, 내일은 결정타를 먹여 주지.

흐… 오늘이 바로 약속한 열흘째다.

나는 애들(차츰 나도 가락이 붙는다)을 시켜 비취각 진회루(무지하게 운치 있게 꾸며진 연회장이다)에 음식상을 차리게 하고, 그 앞 공터에 ‘연무장’을 꾸미도록 했다.

대교, 소교, 소령, 미령… 네 자매와 당주급의 고수들이 내 앞에서 대련을 펼쳤다.

캬… 술맛 난다.

총관이 자매들의 몸놀림을 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전에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몰라도 불과 열흘 사이에 당주들과 자웅을 겨눌 정도로 성장한 걸 보니 나도 솔직히 감탄했다.

비록 승부를 가리는 결투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을 상대한 당주들이 저마다 놀라워하고 있었다.

“총관 어르신의 새로운 제자들이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놀랍게 성장했소이다. 정말 감탄했소!”

당주들의 인사에 총관이 흐뭇한 미소로 답례했다.

“당주들께서 많이 봐주셔서 제 얼굴이 섰습니다. 그리고 네 자매의 소질을 한눈에 간파한 곡주님이 아니었으면, 전 좋은 제자들을 놓칠 뻔했습니다.”

어지럽게 내 안목을 칭찬하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후후… 점점 더 술맛 나네?

나는 12명의 당주들까지 모두 자리에 앉게 한 후, 한쪽에 상기된 얼굴로 서있는 자매들을 불렀다.

“존명!”

칼이다.

군대에서도 이렇게 동시에 대답하고, 동시에 움직이는 일사불란함은 보기 힘들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역시 준비시킨 거지만) 명검 다섯 자루를 자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총관에게 물어보니까, 대교 넌 정통 검이 어울릴 거라고 했고… 소교는 변화무쌍한 연검이… 소령이는 보기보다 힘이 좋은데다 양손의 감각이 다 좋으니 쌍검… 그리고 미령이는 날렵하고 대담하니 짧고 날카로운 한혈검… 상관당주가 애써 구해 온 거니까, 잘 쓰도록!”

네 자매가 무기까지 챙겨주는 나의 배려에 감격하여 펑펑 눈물을 쏟는 사이, 나는 다시 상자 하나를 가져오도록 했다.

자기 앞에 놓여진 작은 상자를 대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며 손도 대지 못했다.

“열어봐, 난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비취각 각주에게 고르라고 했는데… 맘에 들지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내가 직접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처리되는 건 성의 없어 보이기 마련일 텐데… 상자를 열고 그 안의 보석 목걸이(음, 내가 봐도 예쁘군)를 꺼내 드는 대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와 상자를 여는 것도, 목걸이를 집어드는 것도 힘겨워하며 하염없이 운다.

음… 우는 모습도 귀엽군…

“지난번에 그랬지, 열흘 후면 17살이 된다고… 후후… 생일 축하해.”

당주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저희들끼리 귓속말을 하기도 했다.

음… 생일까지 챙겨주고, 이렇게 되면 내가 대교를 총애한다는 상징이 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뭐… 바로 옆에서 지켜주는 호위병들에게 잘해 주는 게 정상 아닌가?

흠… 네 자매 모두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날 추앙하는 표정이 되었군… 흐흐… 응…?

아, 아니… 방금 떠오른 생각은 최소한…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품다니… 정신 차리자, 나는 ‘로리타’ 취향이 되기 싫어…

그날 밤… 나는 네 자매를 모두 내 방으로 불러들여 ‘미주’를 한잔씩 따라 주었다.

도수가 약한 거로 특별 주문(?)한 것이었다.

“아까는 당주들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이렇게 마주 앉아 한잔씩 마시는 게 진짜 생일 축하 분위기가 나겠지?”

이제 자매들은 내가 뭔 말만 하면 감격에 겨워한다.

음… 어째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드네.

“어때, 총관에게 무술 배우는 건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소녀와 제 동생들은… 곡주님의 은혜에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천한 저희들이 어떻게 이 은혜를 다 갚을지…”

“너희들이 왜 천해. 또 그딴 말하면 화낸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 내 시비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호위 무사들이야. 뭐… 가벼운, 아침에 깨워주고, 찻잔 날라 주고… 그 정도 시중은 좀 들어줬으면 하지만 말야.”

이렇게 갑자기 ‘시비’에서 ‘호위 무사’로 격상된 것이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자매 모두 눈빛이 점점 더 심상치가 않아진다.

아니, 솔직히 술기운에 불콰해진 내 눈빛도 심상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얘들은 너무 이쁘다.

“자, 이제 가봐. 오늘은 모두 가서 쉬도록…”

“제발… 곡주님. 오늘도 곡주님을 지킬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저희 자매는 한시라도 곡주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명령이야! 모두 가서 쉬어.”

네 자매가 안타까운 얼굴로 방을 나가고 나서도 나는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을 술로 달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실수한 거 아닐까?

여차하면 나도 정말 변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후… 일단 자자…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곳에 날아(?)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현재의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불과 두 달 전에 더블백을 메고 룰루랄라- 고향으로 향하던 내가 아니던가…

아… 내 소개가 아직 없었나?

내 이름은 진유준. 나이는 24살이고… 대한민국 특공대 하사 출신… 제대한 지 아직 두 달도 안 됐다.

그 터무니없는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어이없는 상황에서 집을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곳의 시간과 공간 배경은 좀 이상하다.

이곳의 ‘역사서’를 가져다가 미래 로봇 ‘몽몽’을 통해 해석을 시켜 봤지만,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본래 몽몽에게 입력되어 있는 ‘역사’와 아주 많이 틀리다는 것이다.

내 짧은 중국 역사 지식을 더듬어 보아도 역시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단순히 ‘과거’로 날아온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날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천장엔 내 기분을 좀 나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섬뜩한 자객이 숨어있고, 이 겉으로는 아름다운 계곡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내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 목숨을 던진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 비리비리한 몸은… 내 몸이 아니다.

특공대에서 지낸 3년 동안 박박 기며 단련된 구릿빛 내 육체는 지금 동굴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다.

빌어먹을…

그 엿 같은 여자만 만나지 않았어도…

미래에서 왔다는 ‘진’이라는 그 여자… 현재로서 내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고,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다.

허락도 없이 날 이런 알 수 없는 시대와 장소에 떨궈 놓고는 겨우 이 작은 지능형(知能形) 로봇 하나 남겨주다니…

군대식 험한 욕으로 가래침으로 마빡을- 어쩌고 싶은 여자다.

젠장… 두고 보자!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