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3화


빰빠라밤빠~~~~

응?

빰빰빠바아….

나는 화들짝 놀라 게슴츠레한 눈을 번쩍 뜨자마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기상 나팔소리닷~!’

깨닫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나의 몸은 자동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있었다.

어랏-? 대한민국 군대의 모포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드러워졌지? 마치 비단결처럼…

나는 머뭇거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나의 이성까지 잠에서 깨어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고, 곡주님…”

미령이의 당황한 음성이었다. 네 자매 모두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검을 빼든 채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 좋은 아침? 근데 왠… 살벌한 분위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더듬거렸다.

대교와 소교가 검을 거두고 다가와 내 옷을 챙겨 주었다.

나는 아직 군대 습관이 남아 겨울에도 팬티 이상은 걸치지 않고 잔다. 그래서인지 제일 어린 미령이는 아침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본다.

그건 그렇고… 으…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군대 시절을 회상하며 잠들었기 때문인가?

난 내가 정말로 군대 ‘내무반’에서 깨어난 줄 알았다. 체-?! 그렇다고 해도 모포 개는 동작이 아직 몸에 배어있다니…

“대교, 오늘 아침은 말이야… 안 먹어!”

“그, 그러시면 곡주님 옥체에 해롭습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어 보인 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무리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어도 제대의 기쁨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은 ‘멋대로 하는 것’이다.

눕고 싶을 때 눕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물론 먹기 싫으면 안 먹는다.

그 기본적인 것만 자유로워도 나는 행복했다. 나는 제대한 지 이제 겨우 40여 일째다.

아무리 천사 같은 계집애가 몸을 생각해 뭣 좀 먹으라고 해도 그 짜릿함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 여기다가 모닝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가 곁들여지면 금상첨화일 텐데…

지금 나에게 커피는 없어도 담배는 있다.

그럼, 오늘은 특별히…

나는 침상 밑에 숨겨 두었던 군용 팔팔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더블 백에 들어 있던 반 보루가 이제 두 갑밖에 안 남아서 아껴 피우느라 참고 또 참았지만, 아침엔 역시 참기 어려웠다.

나는 창가에 앉아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음… 좋군.

총관 놈이 연초대(할아버지들이 쓰는 곰방대 같은 것…) 물고 있는 것을 지난주에야 발견해서 여기에도 담배가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근데… 총관에게서 연초대와 연초를 얻어내긴 했는데, 막상 피워보니 맛이 영- 아니었다.

종이에다 직접 싸서 피워봐도 역시 너무 독하고 뒷맛이 썼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곳의 담배를 피우고, 내 팔팔은 가끔씩 아껴 피우는 중이었다.

“…곡주님께서 아침에 즐기시는 연초는 매우 특이합니다. 향기도 매우 달콤하고…”

대교가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냥 피식 웃어 보이기만 했다. 포장에 국방색 완장을 두른 군용 팔팔이 향기라니…

근데… 어… 어…? 웬 낯익은 향긋한 냄새는…?

설마…?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하하…”

총관 혈마검호(한자로는 血魔劍豪…라는 것 같다)가 웬일로 웃음을 앞세우고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드, 들어와. 근데 설마, 그건…”

어느 사이 나갔다가 총관과 함께 돌아온 소교가 작은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있었다.

그 찻잔에서 풍겨오는 너무나 낯익은 향기…

소교가 생긋 귀엽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찻잔을 들고 우선 한 입 맛을 보았다.

하하… 공연히 헛웃음을 지으며 총관을 보았다.

틀림없는… ‘커피’였다.

우후… 후후… 으… 히히…

절로 이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블랙 커피의 황당할 정도로 쓰고 독한 맛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짬밥’이 차서 당당하게 내무반에서 ‘에로 소설’을 읽을 때처럼 킬킬대며 연신 커피로 혀끝을 적셨다.

“껄껄… 서역 상인을 통해 애써 구한 보람이 있군요. 곡주께서 이토록 기뻐하실 줄이야…”

나는 총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담배엔 커피, 커피엔 담배… 이게 내 신조(?)였다.

아끼는 팔팔 한 개피를 더 꺼내 커피와 함께 즐기고 난 다음에야 나는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 프리마… 아니, 우유하고 설탕 좀 구할 수 없을까…?”

“설탕…이라고요?”

“그러니까… 단 거, 음식을 달게 하는 가루 말야. 가루…”

“아… 당분(糖粉) 말씀하시는군요. 음… 제가 무지해서 흑주차(黑珠茶)에 우유와 당분이 첨가되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곡주님.”

내 팔목에 채워져 있는 몽몽은 상대가 말하는 것을 빠르게 한국말로 해석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남으면 처음 등장하는 단어의 한자 의미를 분석해 알려 주기까지 한다.

음… 여기선 커피를 검은 보석으로 만든 차라고 한단 말이지?

일단은 다시 대교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총관에게 손을 저어 말렸다.

“아, 그건 나중에 준비해 줘. 이번엔 됐으니까… 그보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네 자매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맘껏 하고 싶었던 일이 한 가지 더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의아해하며 긴장하는 총관에게 나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봐… 거, 뭐냐… 그 춘화라고 해야 되나… 그거 있잖아…”

이 양반, 새삼스럽게 왜 이리 순진한 척을 해? 하는 표정으로 총관이 비직 비직 웃었다.

“비취각에 널린 게 그거입지요. 지금 대령하리까?”

나를 비롯한 높으신 양반들(갈수록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이 술 마시고 노는 비취각, 역시 거기에…?

“오늘 일정… 특별한 거 있나?”

“…현재, 곡주께서 특별히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없습니다.”

말은 그랬지만, 실제로는 ‘니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고 살았니?’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쨌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춘화… 흐흐… 고대 중국의 ‘에로 서적’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직접 가지 뭐. 음… 낮술, 아니 해장술 한잔 할 거나?”

오오… 이럴 수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이 시대에 이렇게 정교하고 적나라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니!

대여섯 권의 책 중 나는 ‘처녀경’이라는 제목의 책을 특히 신나게 보았다.

다른 책들도 남녀의 정사 장면이 그려진 그림은 만만치 않았지만, ‘처녀경’은 특히 소설적인 내용도 재미있었다.

‘소문경’이라는 잘 나가는 청년 무사가 양가집 처자, 그것도 확실한 ‘처녀’로 소문난 여자들만 골라 유혹하고 농락하는 흥미진진한 고대 중국의 에로 소설이었다.

‘옥보단’을 패러디, 혹은 그 아류작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하여간 무지하게 재밌었다. 흐흐…

“곡주… 이 아이들은 모두 이제까지 남자를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총애하시는 대교 자매들만은 못할지 몰라도 비취각주가 특별히 선별한 아이들이니…”

빠르다.

내가 집중적으로 보는 책 때문에 내가 ‘어린 처녀’ 취향이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 어느 틈에 술상 앞에 어리고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여자, 아니 소녀들 세 명이 대령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세 명씩이나…?

총관의 표정… 잔잔하게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오히려 한동안 좀 이상했던 내가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소녀들 너머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엄청난 미모와 색기를 겸비한 여자 ‘비취각주’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저기… 성의는 고맙지만… 됐어. 난 술 먹으면서 독서하러 온 거야. 얘들은 필요 없고… 취음란각주도 한잔할래?”

“곡주께서 권하는 미주야 어찌 마다하리오까…”

깜짝 놀랄 정도로 색기가 넘치는 음성으로 대꾸한 비취각주가 웃으며 술상 앞으로 다가섰다.

평소엔 이 ‘비화곡’의 주인인 나와 당주 이상의 신분 높은 자들의 술자리 제공, 그리고 특별한 외부 손님들 접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비취각’을 맡고 있는 이 여자.

이미 돌기 시작한 술기운 때문일까? 혹시 내가 이 시대에서 이성을 잃고 여자를 탐하게 된다면 그 처음은 바로 이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소녀들보다야 나이를 많이 먹었겠지만 그래봤자 20대 초반에 불과해 보이는 여자.

음탕한 분위기와 다소곳한 분위기가 혼란스럽게 함께했고, 옷차림도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웬지 빈틈이 없어 보였다.

묘하고… 그리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솔직히, 다른 일을 멋대로 하듯… 여자와 뒹구는 짓도 아무도 내 본 모습을 모르는 이 세계에서 부담 없이 해버리고 싶은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최후의 보루’였다.

자존심…? 아니, 그 어떤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차라리 돈을 주고 창녀를 사지, 현재의 내 말도 안 되는 ‘권력’으로 여자를 안는 것은 죽도록 싫었다.

‘여자’만은 내 능력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것까지 편하게 해버리면 나는 정말, 원판 ‘극악서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비취각주가 따라준 술 한 잔을 마신 후 다시 ‘처녀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추접해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이건 내가 맞다.

“곡주님… 대교 자매의 ‘방중술’은 각별한 대가 있겠지만, 역시 곡주님을 흡족하게 모시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좀 더 교육을 하오리까…?”

은근한 어조로 비취각주가 말했다.

방중술…?

그 어린 것들에게도 잠자리 교육을 시켰단 말이지?

나는 의식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이봐, 대교 자매는 밤에 데리고 놀려고 내 곁에 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그 애들은 내 호위무사야.

참고로… 난 아직 그 애들을 손댄 바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취음란 각주와 총관은 전혀, 절대로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제기… 더 설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교 자매 중 대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곡주님..! 주흥을 즐기시는데 송구하지만, 조금 전 곡 바깥에서 ‘야후’ 장로께서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야후…는 아니고, 夜吼…라고 했었지 아마.

나는 눈을 껌벅이며 총관을 보았다. 그는 여유 있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대는…?”

“해남파의 장명 일당이라고 합니다.”

“장명…?”

총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 자가… 좀 해?”

내가 눈치 없이 묻자 총관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장명 그자야 별거 아니지만, 그 자의 배후 인물… 냉화절소 장청란이 문제지요.

아시다시피… 장청란은 화천루의 후인이라는 소문도 있고….”

뭔 소린지 몰라 나는 눈만 껌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건 해석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목의 ‘몽몽’을 톡톡 세 번 두드린 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봐, 몽몽… 방금 얘기, 니 데이터에 있는 얘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