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33화
월영당주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채찍을 미령이가 총관에게 던져준 검을 향해 휘둘렀다.
“앗-!”
비명소리…?
월영당주의 채찍은 검을 맞추기는커녕 갑자기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땅바닥에 늘어졌다.
그 사이 미령이의 한혈검은 총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월영당주는 총관을 무섭게 노려보며 재빨리 채찍을 다시 주워 들고 있었다.
월영당주가 검을 막으려 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던 총관이 ‘탄지공’ 같은 것을 날려 그녀의 손에서 채찍을 떨군 상황인 것 같다.
“운연… 나 지천공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오.”
총관 특유의 낮고 서늘한 음성과 함께 검이 스륵- 뽑아진다.
…어, 이거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웬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데, 몽몽이 경고해 왔다.
[지천공이란 남성의 에너지가 급격히 구체화하여 소지한 무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공격 시 타격점에 예상되는 순간 파괴력은 주인님 시대의 M16 소총을 200미터 거리에서 발사한 것과 맞먹습니다.]
M16의 파괴력? 200미터 거리에서라면 ‘유효사거리’ 안, 즉 군용 철모를 충분히 관통할 수 있는 파괴력을 뜻한다.
날카로운 검 날에 그런 파괴력이 집중된다고…?
맙소사-! 저 인간, 지 마누라를 아예 죽일 셈인가?
더 이상 구경하며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젠장, 늦었다. 이미 총관은 땅을 박차고 월영당주에게 질주하고 있었다.
내가 놀랄 틈도 없이 쩌엉-!! 하는 굉음과 함께 월영당주의 몸이 본래 자리에서 10여 미터쯤 주르르 미끄러졌다.
이런 제기-!
“그만~! 그만 해!!”
내 고함소리에 총관이 흠칫, 몸을 굳히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좀 해. 그 정도로… 끝내라구.”
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금씩 약해졌다.
나는 월영당주가 총관의 일검에 속절없이 당할 줄 알았는데, 지금 굳건히 서 있는 그녀의 자세를 보니 두 손에 든 무기, 왼손의 검과 오른손의 채찍 손잡이 부분을 십자로 교차하여 총관의 검을 막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내가 월영당주를 너무 약하게 봤나…?
공연히 남의 부부싸움에 내가 흥분해서 끼어든 것 같아 웬지 민망해진 나는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래서 야후 장로나 누구든 싸움을 말리지 못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우, 운연! 괜찮으시오?”
때마침 월영당주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며 피를 울컥 토했고, 총관은 당황하여 그녀에게 달려갔다.
일견 멀쩡해 보였지만, 실은 총관의 일검을 막아내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던 모양이다.
“저, 저리가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욧!”
월영당주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 비틀대면서도 다가오는 총관의 손길을 거부하며 소리쳤다.
“흥- 때려 놓고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척하다니. 염치도 없는 사람 같으니.”
…참 얄밉게도 말한다. 애초에 집요하게 시비를 건 것은 그녀 자신이면서…
후…
그러나 그녀의 상태가 걱정된 총관은 그녀 앞에서 대꾸도 못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약간 못나 보이기까지 하는 총관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크허, 험-!”
나는 ‘이젠 나 좀 봐…’라는 뜻으로 헛기침을 하며 월영당주와 총관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월영당주가 곡주님을… 뵈, 뵈옵니다.”
다가오는 나에게 포권하며 인사하는데, 중간에 말이 끊긴다.
가까워지면서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 월영당주의 안색이 무척 창백하고, 입가의 선혈이 더욱 섬뜩했다.
“쯧쯧… 간만에 재회한 부부가 어쩌자고 검과 채찍 같은 병기로 인사를 나누는 건지 원…”
내가 혀를 차며 입을 열자, 총관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사이 월영당주는 재빨리 내 앞으로 나섰다.
“저 소운연… 월영당을 맡고 있는 자로서 곡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총관은 이제 포기한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총관에게는 미안하지만, 들어보기는 해야겠지?
“뭔지 말해보게, 소당주…”
내 허락이 떨어지자, 월영당주 소운연은 씨익- 득의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인 총관에게 약 올리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가까이 보니 나와 비슷한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매며 이목구비가 크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는, 탤런트 김혜수 같은 ‘건강미인’ 타입이다.
“곡주께서 이번에 천이단과 독특한 내기를 하시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어, 그건 이미…”
“예, 명령을 철회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
응…? 갑자기 월영당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월영당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매번 중요한 사항은 ‘천이단’에게 의뢰하니, 월영당은 매년 수천 냥의 예산을 낭비하는 쓸모없는 곳에 지나지 않습니까?”
“………….”
논리의 정연함이나 그런 것을 따지기 이전에, 월영당주의 날카로운 어조와 강렬한 시선에 기가 죽어 나는 얌전하게 그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곡주님! 천이단과 그런 식의 내기가 성립되는 것도 사실 저희로서는 유쾌한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천년 기반을 불과 20년 역사의 월영당이 따라잡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죽이고 그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총관 말대로 너무 위험하고 돈도 많이 들어서 문제지 뭐.
“그 동안은 천이단의 추측하기 어려운 저력, 또 그간 쌓아온 본 곡과의 우의,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곡주님의 기발한 제의를 들었을 때 저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도대체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돈 아끼려고 그래… 라고 했다가는 나도 채찍으로 맞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월영당주는 내가 결정을 번복한 것이 전부 총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애초에 월영당이 조직된 것은 곡주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현재 월영당이 강호에서 손꼽히는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다고는 하나, 천이단을 능가하지 않고서는 천하를 헤아리는 곡주님의 눈과 귀라고 자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곡주께선 심사숙고하시어 저희 월영당에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강한 어조로 말을 마치고 포권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월영당주. ‘여장부’라는 생각이 든다.
흠, 그리고 나도 그동안 들은 것이 있는데, 20년 전이라던가?
원판의 사부 ‘사천대령신군’의 손에 이끌려 이 곡에 들어왔던 당시 6살 꼬마였던 원판의 ‘건의’에 의해 설립된 것이 바로 ‘월영당’이라고 했다.
고작 6살에 ‘정보의 중요성’을 알았다니, 미친놈은 미친놈이라도 천재적인 미친놈이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총관 저 인간은 아무래도 지 마누라를 아끼느라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것 같고, 나 역시 핑계 삼아 실수로 지시했던 골치 아픈 일을 취소해서 안심했는데… 제기, 월영당주가 자청해서 나설 줄이야.
응? 가만,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한걸…?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월영당주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소당주 의견은 잘 들었어. 근데, 그보다…”
월영당주와 총관이 나를 주목했고,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당주는 어떻게 이번 일을 벌써 안 거지?”
부부가 거의 동시에 움찔, 그리고 둘은 반사적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총관에게 천이단에 대한 말을 꺼낸 건 바로 어제였다.
내 명령에 따르면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천이단’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할 판이었는데, 마누라 월영당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핑계를 대며 일을 진행하지 않았던 총관이 굳이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확실히 하기 위해 총관에게도 물었다.
“총관이 소당주에게 알려 준 건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소당주는 어떻게 알았지? 설마-! 총관이나 혹은 내 주위에도 야영(夜影)을 심어 놓은 건 아니겠지…?”
“다, 당치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곡주님께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아니라고 부인은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경과를 말하는 것은 어물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이 시대에 첨단 전자 장비로 도청을 했을 리는 없다.
물론 무공이 높은 고수는 원거리에서도 작은 소리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톡! 톡! 톡!
[무공을 익힘으로써 시각과 청각의 상승은 일 갑자의 내공에 시각 3.32배, 청각 4.15배로 추정됩니다. 어제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님 신변 보호를 위한 인물들과 건물을 지키는 인물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원거리 도청 행위가 가능한 인물은 현재 곡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 임상실험 데이터가 없어 오차 가능성이 높으며, 해당 신경계 기능 향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용도의 무공일 경우, 해당 수치에 96%까지 플러스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제기… 내가 익숙해졌다고 판단한 건가? 몽몽이가 제공하는 정보가 갈수록 복잡해지는 것 같다.
뭐, 일단 누가 숨어서 엿들었다는 가정은 빼기로 하면, 그 자리에 있었던 총관이나 소교, 소령이 이 세 명 중 한 명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얘기다.
나는 월영당주와 총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본래 원판의 눈매는 매우 날카로워서 이렇게 표정 없이 보기만 해도 대부분 쫀다.
거기다가 조용히 깔리는 음성으로 말하면 효과는 만점이다.
“우선, 총관부터 말해봐. 대청각에서 나와 나눈 얘기를 누구에게 누설했는지…”
모처럼(?) 심각한 주인의 표정을 본 탓인지 총관은 긴장으로 굳어진 채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힐끗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도 시선을 돌렸다.
좀 아까까지만 해도 그곳에 서있었던… 화이트 롱 수염 노친네, 야후 장로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야후 장로…?”
“아, 예… 어제 야후 장로께서 이번 일의 진행을 물어보시기에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중에 무심코…”
이번, 장청란 등과 얽힌 일은 어쨌건 야후 장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노인네가 현재 상황을 궁금해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무심코…? 그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