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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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두와의 눈싸움에 이긴 흐뭇함에 잠긴 나에게 월영당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곡주님. 본 당주는 당의 일이 있으니 이만 복귀하겠습니다.”
흐흐… 건 안되지. 기껏 쌈박질 못하게 했는데..
“아니, 일단 이번 장명과 장청란 일은 천이단에 맡겼으니까 소당주는 당분간 곡에 남도록 해. 그리고.. 총관과 함께 천이단 문제를 상의해 봐.”
“천이단 문제라 하시면…”
“애초에 내가 언급했던 그 문제.. 천이단에게 일거리를 맡기고 그들의 수법을 연구하는 거 말야. 이번 일 마무리 지으면 바로 그 일 시작할 테니까, 둘이 그 계획을 짜보라는 얘기야.”
“..존명!”
조금은 얼떨떨했던 표정이 금세 밝아지며 기운차게 포권하는 월영당주에 비해 총관의 얼굴은 매우 애매하고(?) 복잡해 보였다.
부부싸움의 한 예로.. 한때 사업하던 거 거덜 내고 부모님 집에 얹혀 살았던 큰 형 부부..
연애 시절부터 티격태격하는 데 재미(?)를 붙였던 부부였는데,
거의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던 두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 눈치 보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되자
당장에 두 사람 사이는 내가 봐도 썰렁해졌었다.
뭐랄까.. 웬지 활기가 없고 심하게 말하면, 그저 서류상의 ‘부부’ 같았다고 할까?
나중에 다시 분가해 나갔을 때.. 장롱이나 탁자 하나 위치 선정하는 데 큰 형과 형수는 싸웠다.
웃기는 건, 그때서야 두 사람이 ‘부부’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자아.. 총관, 월영당주 부부..
어디 한번 함께 지내보라구, 두 사람.. 과연 ‘절대로 싸워선 안 되는 부부 생활’이 어떤 건지 말야.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바탕이 될지, 스트레스가 쌓여 아예 망가질지, 그거야 두 사람 몫이지만….
흐… 생각보다는 쉽지 않을 걸?
아주 가벼운 듯 보이지만 난해한 처벌(?)을 끝내고 나서 나는 대교에게 가기 위해 대청각을 나섰다.
오늘은 대교에게 무슨 영약을 먹일까나. 룰루루~
다음날…
나는 지금 또 대청각에 앉아 있다.
지금 내 기분은 뭐랄까, 약간의 긴장과 호기심..?
음… 하여간 처음으로 이 비화곡 시민(?)이 아닌 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웬지 모를 기대감 같은 것도 든다.
이틀 전 해남파에 보낸 우리측 사자(使者)와 함께 장청란이 보낸 사자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5시간 정도 전이었고,
곡의 입구에 도착했다고 한 건 40분 전이다.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극악 조직, 극악 짱이 한판 엉기자.. 그러는 데 무턱대고 예스, 노를 결정하기는 껄끄러웠을 것이고..
이편의 의도.. 정말로 단순한 ‘무공 대결’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인지 탐색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우리측, 정확히 말해 ‘극악서생’의 진의를 탐색할 목적으로 온다면..
상당히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 급 인물일 것이고..
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더 긴장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좀 낙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저쪽에서 선정된 모사를 속인다거나 하는 건 자신 없지만 뭐.. 이번에 나는 정말로 정정당당한 무공 대결을 원하는 떳떳한(?) 입장이니까 말이다.
“곡주님께 아룁니다. 해남파의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대청각 소속 무사 한 명의 보고가 있자마자 대청각 입구에 낯선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남파를 감시 중인 월영당의 보고대로.. 여자였다.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
가벼운 백의 경장 차림에 날렵한 몸매.. 아름다운 얼굴이긴 한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운 여자였다.
실내로 들어선 여자는 웬지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어 상좌의 날 올려다보며 잠시 입을 열지 못한다.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해남파의 사자, ‘고화옥’이라 하오.”
웬지 뾰족한 느낌이 드는 음성과 말투.. 포권 하면서 고개는 아주 살짝 숙이는 인사..
별로 정중하지 않은 인사라.. 뭐, 오랜만이라 그런지 저런 상대도 나름대로 신선(?)하군.
“해남삼선녀(海南三仙女) 중의 수장이 오실 줄은 몰랐소이다.”
보고를 들어 이미 상대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총관은 짐짓 포권하며 나선다.
고화옥이라는 여자는 웬지 흠칫하는 듯 하더니 역시 포권하며 총관에게 인사했다.
“천하의 혈마검호께서 하찮은 여자를 알아주시니 영광이오.”
“냉화절소 장여협과 해남삼선녀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던 터.
누가 이 비화곡을 단신으로 방문할 배짱을 가졌는지 궁금했는데 바로 일선녀(一仙女) 고여협이었구려.”
“사마제일검이라는 지대협의 명성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요.”
뭐야…
난 본체 만체 지들끼리 잘도 인사를 나누는군.
그건 그렇고.. 흠, 해남삼선녀 고화옥… 총관이 인정할 만한 고수… 장청란 측근…
“..역시 ‘화천루’인가..?”
응..?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들었나..?
갑자기 매우 서늘한 시선을 보내오는 걸..?
“아.. 무심코 한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에-
내가 극악.. 아니, 진유.. 아니, ‘진하운’이라고 하오.”
제기, 별로 쫄진 않았는데 첫인사를 버벅대고 말았다.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자기 소개하는 것도 무지 어색한데, 원판 이름이 나와 성이 같아서 순간적으로 더 헷갈린 것이다.
이거.. 천하의 극악서생 치곤 처음부터 분위기가 너무 무게감이 없었던 것 같지..?
쓴 입맛을 다시는 날, 그래도 신중히 탐색하는 듯 여전히 송곳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고화옥은 차가운 냉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남자임에도 절세가인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외모..
약관의 나이에 이미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천절선생’을 능가했다는 경이로운 학식..
천하 여인의 심장을 녹일 만큼 고혹적인 미소..”
응..? 별안간 뭔 소리야? 내.. 아니 원판 얘긴가?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소는 강호에 이는 혈풍(血風)의 전주곡…”
“일선녀! 무슨 말을…”
피보라 어쩌구 하는 말에 발끈하여 나서는 총관을 손짓으로 저지하고 고화옥에게 계속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화옥은 별안간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부드럽고 아름답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연유로.. 극악서생.. 어떤 사람들은 곡주를 그렇게 부른다지요.”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는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적절한 발뺌…
과연 이 여자도 ‘여우과’로군 그래.
“본좌를..”
그러고 보니 ‘본좌’란 말 처음 써보는데, 기분 묘하네 거…
“..흠, 본좌를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무슨 상관 있겠는가..마는…”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막내 미령이에게 ‘거울’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잽싸게 튀어가서 작은 손거울을 가지고 돌아오는 미령이..
역시 항상 빠릿빠릿한 아이다.
원판의 방에는 거울이 없어서 그동안 가끔 옆방에서 거울을 봤는데,
기집애 같은 새하얀 얼굴에 근육 하나 없는 비리비리한 몸을 보다 보면 짜증났었고..
그래서 최근 두어 주 정도는 거울도 안 보고 지내왔었다.
미령이가 가져온 거울로 현재 내 얼굴을 비추어 보니.. 제기, 새삼 짜증나는군.
나는 그 짜증스런 표정 그대로 고화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어떤 사람들은 모두 눈이 삔 사람들인 모양이오.
이렇게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이 어떻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웃을 수 있겠소. 안 그렇소..?”
고화옥은 어쩐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난 진심이다.
무조건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우리 대한민국 특공대에서는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강인한 육체를 가진 남자는 일단 인정하고 본다.
나도 사실 그렇게 람보처럼 우람한 몸은 못되지만, 특공대 분위기에 세뇌(?) 되어서 그런지
일단 외견상 희어멀건한 사내놈들은 무조건 싫었다.
성질도 더러운 살인마, 극악변태인 놈이 이런 병색 완연한 계집애 같은 얼굴까지…
으으, 싫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