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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38화


나는 진심 어린 한숨을 푸욱-! 내 쉰 후 말을 이었다.

“날 때부터 이따우로 생겨먹은 거.. 뭐, 어쩌겠소.
팔자려니~ 해야지. 그보다 내 인물평 하려고 이 험한 곳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본인에게 전하실 말씀은…?”

음.. 어쨌든 이 세계로 온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중한 말투로 말해보는 것 같다.

고화옥도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군.

“..진곡주님의 이번 제의.. 물론 저희 아가씨께서도 귀 곡 고수와의 비무(比武)를 피할 마음은 없습니다.
공정한 비무라면 그 어떤 상대의 도전도 마다할 아가씨가 아니시지요.”

음… 이 여자, 꽤 노골적이군.

“공정한 비무라면,이라.. 이번 비무가 공정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소?”

내 말에 대답하기 전에 약간 숨을 고르는 듯 보이는 고화옥…

그러고 보면 이 여자도 꽤 괜찮다.

나보다 최소한 서너 살은 연상인 듯도 하지만 그만큼의 성숙한 매력과 구월화 만은 못해도 상당히 볼만한 가슴..

응..? 으으.. 이 판국에 이 무슨 망언, 아니 망상이람?

으으.. 진정하자, 진정해..

“우선…”

고화옥은 뭔 말인가 꺼내려하다가 입을 다물었고, 매우 서늘한 눈빛으로 날 꼬나보기 시작한다.

눈치도 빠르지, 나의 음흉한 시선이 방금 자신의 어딘가를 더듬었는지 알고는 경멸의 마음이 생긴 듯..

총관도 눈치 챘는지 공연히 딴청을 하고.. 에구, 팔려…

억지로 웬수 같은 원판의 육체는 진정시켰다만, 나 자꾸 왜 이러지?

이러다가 정말 껄떡쇠 되는 거 아냐..?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음… 굉장히 빨리 표정과 목소리를 안정시키는 걸?

이 정도쯤이야(?)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건가?

“첫째, 본파의 총령이신 장명님의 인도가 이번 비무의 조건이라는 점.
애초에 장명님을 귀 곡에 억류하고 있는 것부터가 강호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고
본파의 아가씨가 비무에 집중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오.

둘째, 비무 장소로 지정한 ‘장우봉(長 峯)’은 일견 공정한 장소로 보이나
실은 귀 곡의 총관, 혈마검호께서 진전을 얻은 장소로써 과거 마도인의 은거지..
본파가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을지 알 수가 없겠지요.

셋째, 이번 비무의 참관자들을 귀 곡과 본파의 요인들로 한정한다는 것은
귀 곡이 세력으로 유리함을 점하려는 의도도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오.”

“……….”

뭐, 첫 번째와 세 번째 지적은 총관이 사자에게 들려 보낼 도전장(?)을 점검 받으러 왔을 때부터 나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인데,

두 번째 장소 얘기는 좀 뜻밖이다.

나도 아직 비무 장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는데, 그런 장소였단 말이지..?

총관이 무예를 수련했던 장소.. 과거 마도의 고수가 은거해있던… 흠,

총관이 무슨 생각으로 장소를 정했는지 몰라도 오해(?)를 받을 만한 장소이긴 하군.

“무엇보다, 본파의 총령님과 부인의 신병을 본파에 인도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차인표’처럼 거만하게(?) 한 손가락을 세워 흔들어 보이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그건 곤란하오. 뭐.. 듣자니 귀파에서는 장명이 우리 비화곡의 야후 장로를 암습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 고 하던데…”

그랬다.

월영당의 보고에 의하면 해남파에서는 장명이 수하 무사들과 함께 순찰을 나갔다가 재수 없게(?) 비화곡에서 온 마두를 만나 무사들은 전멸, 자신은 피납..

뭐 그렇게 알고들 있단다.

그의 부인인 구월화가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남편을 구하러(?) 비화곡에 뛰어든 일은 감동의 스토리로 각색되어

해남파 사람들은 물론이고 강호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중이고..

아, 그리고 그 ‘시너지 효과'(모처럼 외워 놓은 단어 써먹는다.)로 장명의 큰아들이 임시 총령이 되어 해남파 무사들을 이끌고 있다지..?

“그, 무슨.. ..흥! 비록 사마외도라 하나 그 정점에 위치한 진곡주가 이토록 치졸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할지는 몰랐소이다!”

오.. 이 비화곡 안에서 내게 코웃음을 치지 않나, 욕을 하지 않나..!

역시 신선한 느낌인걸..?

“고화옥! 곡주께 무슨 망발인가?”

열 받으면 바로 반말로 바뀌는 총관…

“흥-! 야황살후 소진광이라 하면 과거 천살막(天殺幕)을 이끌던 절정고수.

장명 총령이 천하의 야황살후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요?”

고화옥이 만만치 않게 표독스럽게 외치자, 총관의 눈매가 대뜸 가늘어진다.

총관은 분을 삭이며 내게 고개를 돌려 어떻게 할까요..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는데, 그게 총관에게는 ‘다 내게 맡겨..’라는 뜻으로 전달되었는지 얌전하게 고화옥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본파가 비록 당대에 쇠퇴하여 잘난 비화곡 인사들 눈에 하찮아 보일지 모르겠으나,
무수한 제자들이 살해되고 총령부부가 납치된 지금 귀 곡의 요구에 순순히 끌려 다닐 만큼 무르지는 않소.
이번 사태에 단호히 대처, 강호의 도리를 세우는 것! 이 것이 본파의 의지올시다.”

“………….”

카랑카랑하게 쏘아붙이는 고화옥에게 나는 ‘그게 아니라, 화천루가 움직일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아냐?’라고 대꾸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일단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본 다음 입을 열었다.

“…뭐, 좋소. 일단 우리가 전부 잘 못한 거로 합시다.”

“무슨 말을…”

“사실 아니지만, 어느 쪽이든 우린 상관없으니까.
맘대로 생각하라는 거지 뭐.”

“진곡주!!”

발끈하는 고화옥에게 나는 다시 차인표 손가락질(?)을 하며 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일단! 들으시오!”

뭐랄까.. 난 사실 누구와 토론이나 논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상호 비방’ 수준의 대화는 사절이지 만 말이다.

현재 고화옥과의 대화는..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상대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좀 그렇지만,

무엇보다 현재 내 신분이 장난이 아닌 관계로 중간에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가질 수 있고,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다.

“해남파의 무사들을 해치고 총령 천진수 장명과 삼홍랑 구월화를 우리가 납치했소.
그렇게 인정하겠소.

어찌되었든, 본 곡의 입장에서 시비가 붙어 끌고 온 정파의 인사를 순순히 돌려주는 것도 우습고..
귀 파의 아가씨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저 화천루의 후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는 냉화절소 장청란 소저가 본 곡의 고수 한 명을 제압한다면…
그럼 장명 부부를 풀어주고, 아울러 이번 일을 일으킨 야후 장로.. 과거 천살막의 주인이었던 야황살후 소진광도 귀파에 넘겨 주겠소.”

좀 긴 대사여서.. 잠깐 끊고, 혹시 잘못 말한 부분 없었나 되새겨 보았다.

음.. 대충 맞는 것 같으니 슬슬 결정타를 날려 볼 꺼나..

“또한..! 비무 장소는 귀 파에서 원하는 대로 따르겠소.
뭐.. 해남파도 좋고, 하다못해 소림사 앞마당으로 하자고 해도 좋소.
당연히 참관인도 제한 없고…”

역시 파격적인가?

고화옥이 놀라는 건 당연한 거고.. 총관까지 공연히 어쩔 줄을 몰라하는군.

“자- 본인은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를 양보했소.
더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고.. 아니면 돌아가서 귀 파의 아가씨에게 내 뜻을 전해 주시오.”

그리고 마무리…

“..아참, 여지껏 손님을 세워 놓고 있었네?
더 할 말이 있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좌자를 준비시키겠소.
그리고 차 한 잔 어떠시오? 이번에 서역에서 입수한 흑주차(커피)가 향이 아주 일품인데…”

별안간 디게 친한 척하는 음성과 태도로 돌변한 나를 고화옥은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흐… 이 극악서생이란 자가 어떤 인간인지.. 헷갈리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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