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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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 제기, 제기랄…을 외치며(속으로) 며칠을 보냈다.
한가한 저녁 시간에 술 한잔하는 것을 며칠 동안 자제했더니만,
뭐 어찌 어찌 되겠거니..하고 희망적으로 생각했던 것들까지도
괜히 더 고민되고 걱정이 앞서는 것도 같았다.
우선, 눈앞에 쌓인 중요한 골치 거리들을 꼽아 보자면…
첫째, ‘마봉후’의 후인으로 키운 대교를 몰래 비밀 창고에서 탈출시키는
방법과 시기…
탈출 방법도 생각해 본 건 있지만 아직 확실한 조사를 마친 것은
아니었고, 탈출 시기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둘째, 대교의 무공을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을 기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 그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셋째, 비무 장소가 중원의 어디가 되었든 내가 안전하게 갔다올 대책을
마련하는 것. 이건.. 내가 ‘우리 시대의 도덕심’을 버리면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문제는 더 이상 나 때문에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외에도 골치 아픈 일이 꽤 된다.
장명의 음모를 효과적으로 파헤치고 강호인들에게 폭로하는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 장명 놈 일당에게 인질이 되어 있는 구월화의
가족과 연인을 구해 주는 것도 그리 쉽지 만은 않을 듯하고..
그리고 또….
으으.. 빌어먹을, 그냥 오늘은 한잔하면서 머리 식히고 내일 다시
생각할까..? 라는 생각이 절정에 달한 것이 3일 째 되는 날 밤이었다.
고화옥을 만나고 난 날, 당분간은 술 안 마셔..라고 해 놓았기 때문에
미령이는 간단한 야식만을 내왔는데 하필, ‘물만두’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안주’ 중의 하나인…
향긋한 육수에 반쯤 잠겨 방긋 방긋 웃고 있는(?) 먹음직한 만두들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미령아, 가서 술 좀…”
이 때, 불현듯 떠오르는 유식한 문구, ‘작심삼일’..
으.. 안돼! 천하의 진유준이 그런 의지 분실 사내가 될 수는 없어!
“..아, 아냐. 취소, 취소다. 그건 뭐, 다음에..
에.. 이거 고기 만두냐..?”
“예, 그러합니다.”
미령이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지 언니들에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그제도, 내가 야참만 나오면 공연히 말도 버벅대고 방황(?)하다가
매우 쓸쓸한(?)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댔다 는 것을…
하지만.. 음.. 오늘 물만두는 정말 맛있다.
호오.. 이게 진짜 오리지날 중국식 물만두의 맛이란 말인가?
이거- 쥑이는데…?
“…우물우물.. 미령아, 내일.. 이 만두 만든 자에게
우물우물.. 뭐든 상 좀 주라고 그래.”
만두를 먹으며 흐뭇한 표정이 된 나의 명령을 기쁘게 받드는
미령이에게 나는 몇 마디 덧붙였다.
“안주..여도 좋겠지만.. 우물우물.. 만두는 말 그대로
‘음식’이었어… 우물우물, 쩝! 쩝!”
술 먹는 것을 생략해도 만족스러울 만큼 맛있는 만두와
나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금주’까지 하며 그그극!
머리를 굴리던 5일 째 되는 날, 드디어 해남파, 아니 장청란의
사자인 일선녀(一仙女) 고화옥이 다시 이 곳을 찾아왔다.
며칠 전과 같이 총관과 대교 자매들을 대동하고 대청각에서
그녀를 만났다.
고화옥이 가져온 해남파의 서신을 나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서신 내용에서 인사말이나, 쓰잘대기 없는 형용사를 빼면..
골자는 이러했다.
- 냉화절소 장청란 VS 마봉낭자의 비무 동의.
- 비무 장소, 형주(荊州)의 목야평(沐野平).
- 비무 일시, 6개월 후.
- 비무 일시 연기 사유, 장청란의 정식 화천루주 취임.
- 비무 조건, 장명 부부 석방과 야황살후 소진광의 신병 인도.
그리고….
그리고..의 다음이 파격적이었다.
너무 파격적이어서… 참내,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서신을 다 읽은 나는 여유 있는 태도로 기다리고 있던
고화옥에게 웃음기를 섞어 물었다.
“후후… 이래서야, 이번 비무.. 너무 부담스러워지 는구려.
난 그저 양파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해결되는 것을 바란 것뿐이었는데…”
“당금 강호에서 비화곡과 화천루를 대표하는 고수들의 비무가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저희 측 조건을 추가했으니,
진곡주께서도 적당한 조건을 걸도록 하십시오.
어차피 소용없는 조건일지도 모르지만…”
이 여자.. 의식적으로 아주 얄미운 목소리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날 도발하는 걸 보니 장청란이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흠… 하지만..! 조금 전(?) 자신감이 생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럽시다.”
나의 툭, 던지는 듯한 가벼운 대답에 고화옥의 안색이
약간 굳어지는 것 같다.
고화옥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와 걱정스러움, 불안감 등등의
감정이 섞여 떠오르고 있었다..고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웃고는 있어도 좀 복잡한 심정인 것 같기는 했다.
뭐.. 최소한 내가 원판 ‘극악..’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자라는
인상을 주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다.
“우선 그쪽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마지막 추가 조건은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회답은 좀 미루어야 할 것 같소. 그 문제와 우리 측이 승리할 경우의 조건, 기타 세세한 것은 다시 서신을 보내리다.”
고화옥을 보내고 난 후, 나는 총관에게 서신 내용을 보여주었다.
소위 파격적인 부분을 읽기도 전에 총관은 매우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형주의 목야평…? 그곳이라면 본 곡으로부터 다소 멀긴 하지만 천살막(天殺幕)의 총단이 바로 지척이라 본 곡에 매우 유리한 곳… 어째서 이런 장소를…? 게다가 하필 이런 시기에 장청란이 정식으로 화천루주에 오른다는 것은…”
그동안 내 머리 속에서 돌던 커다란 맷돌이 이번엔 총관 머리에서 그그극~! 그그극~!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거참, 겉으로는 무지 두뇌파로 생겼는데 말이야…
뭐, 내가 ‘천재’라는 망상은 스스로 접은 지 오래지만, 나로써는 장청란 측의 의도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천살막’이라면 과거에 야후장로가 짱으로 있었다던 그 살수집단을 말하는 거다. 이번 비무의 경품(?)이기도 한 야황살후 소진광…
“아, 혹시 장청란은 야후 장로님을 인질로 삼기 위해…”
“딩동댕~!”
“예..?”
“정답이란 의미야. 천살막이 분명히 강호상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살수 집단이지만, 당연히 우리 비화곡과는 남남이 아니야. 그런 천살막의 세력권 안에 비무 장소를 정해서 자신들이 많이 양보한다는 티를 내는 거지. 그러나 장청란이 승리할 경우, 야후장로는 그쪽 수중으로 넘어가고… 그럼 천살막은 해남파에 아무런 장애가 못 되는 거지.”
야후 장로… 그런 터프하고 막 나가는 성격의 인물이 은밀하고 치밀한 행동이 기본인 살수들의 짱이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천살막에 대해 조금 알아봤던 것이 판단에 도움이 되었다.
야후 장로가 비록 20년 전에 이 비화곡의 장로가 되면서 천살막을 자신의 아들에게 넘기고 떠났다지만, 현 막주(幕主)가 엄청 효자이기도 하고, 야후 장로의 현역 시절의 카리스마 때문에 지금도 천살막의 살수들 사이에서 야후 장로는 신(神)과 동기동창(무슨 군대 고참 얘기하는 것 같다.), 여신(女神)의 기둥서방(이건 좀 심했나..?)쯤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면 장청란이 하필 이때 화천루주 자리를 승계하는 의도는…”
“것 두 감 잡았쓰~!”
“예..? 무슨…?”
“에, 그냥.. 짐작이 간다는 뜻이야. 이봐, 총관!”
“하명하십시오, 곡주님!”
“자꾸 따지지 마!”
“조, 존명!”
총관은 별로 따진 것도 없이 찐따를 먹고 찌그러져(?) 얌전히 서신을 마저 읽었다.
“아니..? 이, 이건…?”
총관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지며 멍하니 날 올려다 보는 것을 보니 이제야 ‘파격적인 조건’을 읽었나 보다.
그러나 내가 며칠 동안 구기고 있던 인상을 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빠르게 안도하는 눈치였다.
사실, 자제하고 있던 우리 시대 말투를 가볍게 쓰게 된 이유가 지금 내가 매우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장청란이 반 년씩이나 대결을 미룬 이유… 화천루주 자리를 승계한 다음 대결을 하겠다는 이유…
지난번 유일하게 고화옥의 표정이 변했던 순간…
내 결론은… 장청란은 아직 ‘월형신공’을 다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설사 이미 완성했다 하더라도 장청란도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사마외도 고수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비화곡의 대장로 자리까지 올랐던 마봉후의 무공을 그만큼 부담스러워 한다는 얘기…
흐… 그동안 내가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그 점이었는데…
나는 ‘자신감’과 ‘반 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얻은 기쁨에 겉으로는 피식 피식… 속으로는 움뿌왔핫하하~~!! 하고 웃었다.
그래서, 다음 명령은 꽤 한참 있다가 내릴 수가 있었다.
“..총관, 당주급 이상 모든 간부들 집합시켜.”
내 소집 명령에 모여든 살벌무쌍한 인물들이 대청각에 주욱 늘어앉은 풍경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잘 몰라서.. 10여 일 정도 기간 동안은 매일 아침 정기 간부 회의를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파와의 큰 싸움 같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그저 형식상의 회의, 내지는 ‘조회’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다음엔 회의 자체를 하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소위 ‘조회’ 때도 대다수의 간부들이 오지만 오늘은 더 많이 온 것 같고, 누가 누군지는 당근, 모르겠다.
음.. 그래도 몇몇 인물들은 기억이 났는데, 아마도 그들의 이름이 좀 특이해서 그런 것 같다.
저 요염한 미녀 ‘비취각주 취음란’…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서 은근히 수작을 걸고 있는 뺀질뺀질한 제비족 같은 젊은 남자는 외당당주(外堂堂主) ‘옥면마수(玉面魔手) 고시기(지금도 취음란 각주를 꼬시고 있는 듯..)’…
부리부리한 두 눈을 번득이고 있는 임꺽정처럼 한 터프 아니, 두세 터프 하게 생긴 털보 아저씨는 무지막지하고 광폭한 돌격부대라는 폭풍당(暴風堂) 당주 ‘광부(狂斧) 상관마(뭘 상관마..?)’…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는 30대인데 머리가 온통 백발이라 ‘백발귀(白髮鬼)’라고도 불린다는 내당당주(內堂堂主) ‘상천검귀(霜天劍鬼) 우기내(잘 우긴다는 건지 잘 웃긴다는 건지 몰라도…)’…
하여간 이름들 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