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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41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이라면, 저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가냘프고 청초한 스타일의 미녀도 만만치 않다.
뭐… 웃긴 이름의 고전 명작(?)이라고 할까?

미염당(美艶黨) 당주 ‘참절마녀(斬截魔女) 고리라’.
이름은 그래도, 다른 간부들처럼 저 여자도 남다른 면모가 있다고 했다.

불면 날아갈까 싶게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몸매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라치면 보는 사내 가슴에 불길이 당겨질 것 같은 보호본능 자극 촉발 용모…
미모의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요인 암살 조직인 미염당의 주인답기도 한데, 실제로는 엄청나게 강하단다.

나야 아직 본 일이 없지만, 굳이 미인계를 쓰지 않더라도 군소 문파 장문인 정도의 고수도 맞짱 떠서 보낼 수 있는 실력자라고 한다.
하긴… 이곳 식구인데 어련하시겠어.
이곳에 나 빼고 정상(?)인 사람이 있기나 하려는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게 총관이 보고를 해왔다.

“곡주님, 현재 외유 중인 간부 3인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의 집합이 끝났습니다.”

“음… 좋아. 일단 먼저 지금까지의 상황을 총관이 모두에게 설명해 줘. 아직 다들 이번 일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을 테니.”

“존명!”

총관이 지금까지의 일들, 장명과 야후 장로 간의 사소한(?) 시비에서 화천루주와 우리 측 고수와의 비무로 번진 일련의 상황을 좌중에게 전달하는 동안, 나는 곰곰이 딴 생각을 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석 달째로 접어드는 참이다.

처음 한동안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명호를 알아내서 억지로 외운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아예 모든 간부들의 명단을 몽몽에게 입력시키고 필요하면 물어봤었다.
하지만 일일이 몽몽에게 물어보다 보니 번거롭기도 했고, 또 대화 중에 몽몽의 설명을 듣다 보면 다소 어색하고 대화가 조금씩 끊기는 문제도 있었다.

뭐…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을 대할 필요가 별로 없어서 크게 못 느꼈는데, 아무래도 현재까지의 방식으로 몽몽의 정보를 이용하는 것은 특히 많은 사람과 접할 때 불편한 점이 너무 많을 듯싶었다.
몽몽에게 한국말로 말하고 나서 ‘고리아 교’ 주문 외우는 거라고 둘러대기 어려운 상황도 많을 것이고…
음… 아이디어가 있긴 한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톡! 톡! 톡!

“이봐, 몽몽… 나 이제 망막 스크린 기능에는 많이 익숙해졌잖아, 그치?”

[신경계 적응은 이제 풀 버추얼 스크린 기능을 무리 없이 이용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음… 그래, 요사이 느꼈어. 이젠 몇 시간씩 그거 봐도 별로 어지럽거나 하지도 않고… 눈 떴을 때 헛것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말인데, 망막 스크린 기능을 눈 감지 않고 쓸 수는 없니?”

[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영상 정보가 많은 상태에서는 가상 신호의 강도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장시간 사용 시 시신경의 혼란과 과부하로 시력 자체의 저하 현상을 가져올 수 있으며 실명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흠… 좀 위험하다는 얘긴데, 그래도…

“이제까지 내가 사용한 정도 말고, 그러니까 영상을 모두 보는 수준이 아니라 간단한 막대 그래프와 문자를 보는 정도는 어떨까?”

[7가지 이하의 원색과 망막 면적 10% 이하의 영상이라면 1일 5시간 28분이 권장 사용 시간입니다.]

“그-으-래…?”

그나마 다행이다. 후후… 그럼 한 번 작업 환경(?)을 꾸며 보기로 할까?

“에… 그래, 그건 그쯤에… 그리고 그건 그래프와 수치를 함께… 어, 글자 크기가 좀… 그래, 그 정도가 괜찮군. 이거 꼭… 아, 혹시 마우스는…? 어… 그게 뭐냐면… 맞아, 그거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앞을 보는 상태에서 눈앞에 다른 영상을 본다는 것은 예상보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느덧 총관의 얘기가 모두 끝나 간부급 고수들의 심각한 시선이 모두 내게 쏠리는 바람에 대충 몇 가지를 꾸미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지만 그래도 당장 쓸만은 할 것 같았다.

우선,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남자…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의 간단한 프로필이 허공에 문자로 떠올랐다.

<마극파천대(魔極破天隊) 대주(隊主). 뇌제(雷帝) 단목상(單睦尙). 최근 접촉. 45일 전, 32분 소요. 접촉 사유. 정기 간부회의.>

그리고 그 옆 허공에는 노란색의 막대 그래프가 하나 떴는데, 그건 그의 에너지(내공) 수치이다.
물론 몽몽이 원거리에서 스캔한 추정치라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근데 이 인간… 대단한 걸?
거의 3갑자(180년)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고 있다니…

“할 말 있으면 해봐, 단대주…”

흐… 내 앞에 등장한 인물이 누군지 바로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마음에 안정을 주는지 처음 알았다.
게다가 무지하게 재미있다.

눈앞에 간단한 데이터가 계속 제공되니까, 마치 나 자신이 미래 로봇 ‘터미네이터’라도 된 기분이 든다.
내가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역전의 용사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이 중년의 장한 단목상 대주는 웬지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곡주님..! 지 총관의 말에 의하면 이번 해남파의 협의는 거의 일방적으로 본 곡에 불리한 조건들입니다. 그 것은.. 곡주께서 흔쾌히 허락하셨다니, 곡주께 다른 복안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해남파, 아니 화천루라고 해도 그들의 조건이라는 것이 너무 오만방자한 것이 아닐지..”

그는 살벌한 표정을 풀지 않고.. 아니, 아무래도 말하면서 스스로 더 열을 받는 것 같다.

“이건 도무지.. 우선 화천루에서 그 따위 조건을 제시한 것 자체를 참기 어렵습니다. 허-참-! 어떻게 본 곡의 ‘강호 활동 금지’라는 조건을 내세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래, 그 거였다. 그 들의 소위 파격적인 조건은 바로 ‘비화곡의 강호 활동 중지’였다. 그리고…

“뭐, ‘영원히’는 아니잖아. 현 비화곡주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단서가 붙었지.”

“그, 그 것이 더욱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감히 곡주님을 상대로 그런 불경한 발상을 하다니!”

음.. 단대주가 더욱 인상을 구기며 이를 악무는가 싶더니 오른쪽 허공(?)의 두 번째 그래프가 서서히 올라간다. 물리적인 파괴력은 없으나 중요한 체크대상 에너지의 방출 수치….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는.. 곡주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에 마극파천대를 이끌어 해남파의 쓰레기들과 화천루 계집들의 껍질을 벗기고 그 터에 풀 한 포기 남겨 두지 않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의 노기 띤 말에 반응하여 불쑥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터프 임꺽정’…..

“그건-! 이 상관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무니 뭐니 할 것도 없이 저희 폭풍당에 맡겨 주십시오. 그 동안 그 계집들의 간이 얼마나 커졌는지 끄집어내어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람 백정’ 이미지가 우러나는 음성과 태도였다.
살벌한 두 사람(사람 맞아..?)에 이어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해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대청각 안은 살기 띤 욕설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아, 아.. 진정들 하라구. 진정…”

겉으로는 여유있는 태도로 그들을 달래는 태도를 취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무섭다.
뭔 놈의 인간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살벌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하고도 남을 놈들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더 끔찍한 느낌이 든다.

“참내… 진정하라니깐 두루…”

그러나 이미 모두들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며 당장에라도 해남파로 쳐들어가 살육을 벌일 의논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소외당한(?) 서러움에 내 뒤에 선 대교 자매들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순간, 소교가 소령이와 미령이에게 눈짓을 보냈고 소령이와 미령이는 각자의 검을 빼들었다. 응..? 무슨 짓..?

촹-!!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며 들려온 경쾌하지만 위협적인 소리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고수들답게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지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내 뒤쪽… 이 대청각에 들어 올 때 병기를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 즉 내 호위병인 대교 자매들을 향해 있었다.
힐끗 보니 자매들은 모두 잔뜩 긴장하여 입술을 앙 다물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상태…
내 뜻을 알아서 해석해서 대담한 행동으로 소란을 가라앉히긴 했는데, 얘들도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는 저 살벌한 시선들이 무섭긴 한 모양이다.

나는 좌중을 향해 어색하게 하핫-!하고 웃었다.

“이봐들… 나도 말 좀 하자.”

그제서야 군웅들(군마..가 맞겠지?)은 살기를 누르고 송구스런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다거나 겸연쩍어 하고 있다.
어쨌든.. 아무리 지들이 날고 기어도 짱은 나다.

“그거 말야… 상관없잖아. 결국 일이 끝나면 개망신 당하고 망가지는 건 그 쪽이야. 나는.. 그 때까지는 저 쪽에서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해.”

내 말에 대부분 수긍하는 눈치이긴 한데, 이번엔 믿었던(?) 비취각주 취음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곡주께선 이미 이 일에 대해 묘책을 강구하셨을 것이고.. 본 각주는 곡주께서 결코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우를 범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이미 곡주께서 결정하신 사항에 대해 저희들이 토론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태도였다.
어쨌건.. 좋아, 좋아. 좀 부담은 되지만 날 그렇게 믿는다니 기분 좋군.
근데… ‘천려일실’이 무슨 뜻이었더라..? 한자 공부도 좀 해야지 원…

“한가지 곡주께 궁금한 점은, 화천루가 내 놓은 조건에 대응할 우리 측의 요구 조건을 결정하셨는지요.”

“아, 그거..? 사실 것 두 우리한테 불리하긴 해. 우리는 사마외 전부를 거는 거고 그 쪽이야 통틀어봐야 해남파와 화천루 두 곳… 그래서 심술이나 좀 부려 볼까 해.”

나는 정말로 심술궂은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화천루주’이자 ‘천하제오미’ 장청란을 이 비화곡 소속으로 만들어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하는 것!”

실내에 찾아든 얼마간의 정적…..
뭐야, 내 말이 그렇게 썰렁했나?

“하하핫! 절묘하다, 절묘해!”

침묵을 깬 것은 외당당주 제비족(?) ‘옥면마수 고시리’였다.

“비구니도 아니면서 남자를 멀리하고 사마외도를 벌레 취급하는 청백지신의 고고한 계집들.. 그 계집들의 두목을 이 비화곡에 끌어온다? 하핫!! 그 것이야 말로 화천루를 멸문 시키는 것보다도 보람된 일이지요. 과연 곡주님은 이 고시리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존경의 절을 받으시지요.”

뭐야.. 이 자식, 싸이코 아냐..?
어랏? 정말 절을 하네? 그것도 앞으로 나와서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가만, 이 인간…

“이봐… 혹시 자네 장청란이 여기 오면 유혹할 생각인 거 아냐?”

고개를 든 고시리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회는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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