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3화
“…상대를 제압하거나 지배하는 최고의 요건은 ‘적당한 공포’라는 곡주님의 평소 지론.. 모두들 나름대로 곡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멍청한 사람은 조금… 심했던 경우도 있었지만요.”
미염당(美艶黨) 당주 ‘참절마녀(斬截魔女) 고리라’였다. 근데, 이 여자 표정이 왜 이래? 첫 인상만 가지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요사스럽게 웃는 표정… 으… 웬지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다.
“고당주..! 또 시작인가?”
불쑥 그녀에게 말한 것은 폭풍당 당주 상관마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어떤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상관마 쪽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아아… 저는 누구라고 말한 바 없는데요?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신가 보죠?”
입으로는 빈정거리는 말을 하면서, 상관마를 보는 시선은 제 3자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멸’의 빛을 담고 있었다.
“고당주!!”
터프 임꺽정 상관마는 거의 야수의 울부짖음 소리 수준으로 상대를 부르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이제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도 ‘상관마’…라는 뜻의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리라 당주를 손가락질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잘난 동생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때 아예 같은 묘를 쓰게 해줄까?”
상관마의 거침없는 말에 반응하여 고리라 당주 변신..!?
맙소사… 저게 저 청순 미녀에게 가능한 표정이야? 상대를 찢어 죽이고 싶어 환장한 ‘여 살인마’의 표정이 저럴까…?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인가? 더구나 감히 곡주님 앞에서…!”
마극파천대의 사마대주가 벌떡 일어서서 호통을 치는 것을 시작으로, 간부들이 우르르 나서서 씩씩대는 두 사람을 말리느라 한동안 대청각 안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두 당사자와 여러 사람들 간에 오가는 대화를 대충 조합해보면…
3년 전, 미염당주(도저히 계속 이름은 못 부르겠다. 생긴 거하고 너무 매치가 안 돼서…)의 여동생이자 부당주였던 고리리(자매 이름을 지었을 부모 얼굴이 궁금해진다.)가 점창파(點蒼派)의 고수들에게 사로잡힌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상관마와 폭풍당 무사들이 근처에 있다가 점창파 고수들을 습격했는데… 결국 점창파 고수들을 전멸시키기는 했지만, 애초에 인질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차별 습격 작전이었기 때문에 미염당주의 동생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염당주는 상관마 당주를 동생의 원수로 규정하여, 그 후로 지금까지 어떻게든 상관마를 없애 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나름대로 임무에 충실했던 상관마는 상관마대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뭐, 양쪽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사실 이런 면은 좀 보수적이다.
“말리지 마..!”
별로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대부분 알아듣고 동작을 멈추는 거 보니, 다들 내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싸우게 놔둬.”
다른 이들이 슬금슬금 두 주위에서 물러나자 두 남녀는 그제 서야 조금 불안한 표정이 되어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잔잔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서들 싸워봐..! 이 있으나 마나한 곡주는 구경이나 할 테니까….”
“고, 곡주님! 용서를!”
거의 동시에 털썩 무릎을 꿇는 두 사람…
역시 예상대로 그럴 상황이 아닌 데 웃는 ‘극악…’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
“내가 요즘 종교 문제로 살생을 피하고 있다는 거 알고 다들 겁이 없어진 모양인데… 안됐지만, ‘코리아교’가 인명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살생을 금하지는 않아. 대표적인 교리가 바로 살생유택(殺生有擇)이지.”
음, 얼결에 국사 시간에 외웠던 신라 화랑들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중의 하나를 써먹었네?
본래는 좋은 말 한 건데, 모두 겁먹은 거 보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긴 하다.
“속하가… 그만 잠시 정신이 나갔는지… 사사로운 감정으로… 곡주님 앞에서 소란을…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상관마 당주가 먼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용서를 빌었고, 미염당주는 분한 표정으로 조금 더 버티다가,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는 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처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곡주께 대죄를 범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에이… 저 터프 임꺽정은 몰라도 이렇게 예쁜 여자를 아까워서 어떻게 죽여…라는 것이 내 본심이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고…? 그럼 지옥전주(地獄殿主)와 당분간 친해 보는 건 어때?”
음… 두 남녀가 간부 체면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몸을 떨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지옥전에서 행해지는 ‘고문’이 살벌하긴 한 모양이다.
특히 지옥전의 전주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고문 솜씨로 원판 ‘극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지옥전의 주인(이름과 명호는 잘 생각 안 남)은 본래 간부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누구와 친해지면 그 사람을 고문하게 되었을 때 본분에 충실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하여 평소에도 지옥전 지하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고문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스펠링 맞지..?)라고나 할까…?
극악 공인(?)의 잔인성과 극악무도함을 지닌 자에게 넘겨질지 모른다는 사실에 떨고 있는 두 사람에게 나는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면, 이런 벌은 어때..?”
나 또 오버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연기’를 한 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못하는 것이 내 나쁜 버릇이긴 하다.
“두 사람, 결혼 시켜 줄까?”
나의 예상치도 못한 말에 두 남녀는 거의 기절할 듯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원수와의 동침이라..”
나는 ‘적과의 동침’이란 말을 떠올리며 키득대고 웃고 말았다. 이것도 내 나쁜 버릇 중 하나이다.
군대에서도 쫄따구들을 집합시켜 ‘구타’하는 것은 싫어했지만, 대신 평소에 무지하게 장난치고 놀려먹어서 악명이 높았었다.
내가 웃음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한 것은 문득, 원판처럼 나도 극악한 인간성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찜찜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가만 보니 터프 임꺽정 상관마의 표정이 왜 저래..? 저 인간.. 어째 기뻐하는 듯한… 설마..?
내가 뜻밖의 사실을 눈치채고 좀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미염당주가 불쑥 내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곡주님의 뜻이라면!”
“고, 고당주…?”
눈에 띄게 버벅대는 임꺽정 상관마… 그러나 미염당주는 결코 평소의 애잔한 표정이 아니었다.
“분하지만 무공으로 복수하기 어려우니.. 함께 지내며 평생 괴롭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이거야, 원… 외모는 영화 천녀유혼의 ‘왕조현’보다 청초한 여자가 지금 분위기는 원초적 본능에서의 ‘샤론 스톤’을 능가할 정도로 요사스럽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상관마가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곡주님-!!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어떻게 데리고 살겠습니까! 차라리 지옥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당신.. 정말 날 그렇게 생각하나요..?”
어느 사이 청초+애잔 모드로 돌아간 미염당주가 가냘픈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상관마는 사춘기 소년 마냥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한다.
“흥-! 꼴에…”
다시 샤론 스톤 모드! 더 열 받아 하는 상관마…
지금까지 저런 여자를 상대로 상관마가 살아있는 것이 용하다. 진작에 미염당주가 전문 분야(?)인 미인계로 나갔으면 상관마 같이 단순한 성격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넘겨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당주의 지위이기는 하나, ‘폭풍당’이라는 돌격 부대의 주인답게 무공은 한 수 위인 상관마… 이 인간이 실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여자 미염당주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약간 통속적(?)이긴 해도 재미있는 상황이어서 좀 더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하지만, 계속 엉뚱한 일에 정신 팔다간 본래 해야 할 일 자체를 까먹을 것 같다. 정신 차리자, 진유준.
나는 자세도, 표정도 가다듬고 정상적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잘 들어. 지금 당장 정파와 무력으로 충돌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전시(戰時)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일단.. 두 사람 문제는 화천루와의 비무를 끝낸 후로 유보하겠어. 하지만 그 사이 또 내 앞에서고 어디서고 둘이 싸웠다는 말이 들리면 그 땐 각오해. ..알지? 내가 시작하면 두 사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
비화곡의 중요 인물들은 대부분 강호상에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그 가족 친지들도 다 이곳에 있다.
원판 ‘극악..’의 비위를 거슬리면 그들도 사이좋게 단체로 하늘나라 국민이 되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게다가 드물지만, 폭풍당 당주 처벌 시 폭풍당 무사들까지 몰살시키는 식으로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 빌어먹을 원판 ‘극악..’ 놈의 생활신조는 ‘세계는 넓고 죽일 인간은 많다..’ 아니었을까?
음… 어쨌든 그런 원판의 업적(?) 때문에 두 사람은 충분히 내 협박에 납득하는 눈치였다.
자, 그럼 본래 진행으로 돌아가자.
쬐금 기대했던 정상적인(?) ‘인질 구출 작전’의 경험자가 없으니, 그냥 간부들 명단 보고 찍어 놨던 이들로 일을 추진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장명의 마누라인 삼홍랑 구월화 가족 및 애인 구출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