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7화
비화곡주라는 신분을 숨기고 곡 바깥의 적당한 여자를 꼬셔서 보리밭 혹은 물레방앗간 같은 곳으로 유인해, 교교한 달빛 아래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는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밤을 꿈꾸었지만…
“나갈 수나 있어야 뭘 하든지 말든지…”
술을 잘 마시던 중에 혼자 헛소리를 하니 소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나는 생선회가 뒤집힐 정도로 한숨을 몰아 쉰 다음, 한잔 술을 원샷했다.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떼거지로 나갈 수는 없고, 혼자 나가면 언제 정파 고수들이나 시민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정 난 짐승도 아닌데, 그 일을 목숨 걸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니 더 하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뭘까?
예전에는 여자를 품고 싶어 하는 군대 동기나 친구들을 경멸하지는 않았어도 동조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껄떡쇠가 된 것인지…
자기 비애에 빠져버린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몇 잔 더 마셨다.
취했는지 소교가 불안해하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와 원판은 닮은 점이 있다.
사소한 일로도 감정 변화가 수시로 일어나, 나조차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런 내가 소교에게는 어떻게 비춰질까?
“어이, 소교야.”
“예, 곡주님.”
“너도 혹시… 내 호위 무사가 되기 전에는 한 번도 날 본 적이 없니?”
“저희 자매 모두… 아, 대교 언니만 진회루에서 곡주님을 뵌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래?”
비화곡은 산적들의 산채처럼 한 무리가 덜렁 모여 있는 곳이 아니다.
외곽 곳곳에 초소가 설치된 대다 죽음의 진(陳)으로 보호되는 안전 지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크기 정도는 될 것이다.
내가 거처하는 이곳은 방위 사령부 정도의 군사 요새라 할 수 있지만, 외곽 지역은 평범한 시골 동네와 다를 바 없는 시민들이 사는 곳이다.
게다가 이 시대에는 TV나 신문 같은 매스컴이 없어서, 소교 자매들처럼 대통령 격인 비화곡주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은, 위험한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평범한 신분으로 정상적인 연애가 가능하다는 것!
왜 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일이 대충 처리되면… 흐흐흐……
내 얼굴은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에 짙은 눈썹을 하고 있다.
크고 쌍꺼풀 진 두 눈은 유지했지만, 원판 ‘극악..’의 여자처럼 가늘고 섬세한 턱 선은 좀 더 각지게 바뀌었고, 전체적인 얼굴 형태도 남자답게 변했다.
이 시대의 인피면구라고 불리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눈과 코 주위의 접합 경계선을 다듬어 완성된 이 얼굴…
하하! 본래의 나 진유준의 얼굴과 비슷하지 않나? 내가 나로 변장했다니 기분이 묘하다.
“자… 어때? 어디 이상한 곳 있어?”
내가 돌아보며 묻자,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외당 부당주 마진풍이 고개를 저었다.
“훌륭하십니다. 몇 번 해 보지도 않고 그렇게 빨리 익숙해지시다니…”
“만들어 준 거 쓰는 건 대단할 게 없지. 이렇게 잘 만든 외당이 훌륭한 거지. 정말 수고했어.”
내 칭찬에 기뻐하는 마진풍 부당주를 내보내고, 나는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인상을 구기고,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잡아당겨 보았는데,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얼굴에 착 달라붙어 본래 피부와 구별이 안 가고, 착용감도 나쁘지 않았다.
마진풍 말로는 땀도 배출되는 고급 인피면구라고 한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가면을 만들려면 헐리우드 일류 SFX 전문가를 동원해야 할 정도 아닐까?
후후… 내가 주문한 대로, 본래의 내 얼굴과 비슷한 이 얼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소교를 시켜서 이 가면을 만든 외당 소속의 기술자들에게 상이라도 내려야겠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평소 먹고 자는 방 옆방이다.
여기서 가끔 지도나 보던 내가, 최근 며칠 동안은 인피면구 착용과 뒷처리 요령을 연습했다.
총관이나 세 자매가 나중에 묻는다면, 장청란과 대교의 비무 참관 시 변장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명분을 내세울 생각이다.
사실은, 보름 전 향어회 안주로 두꺼비 술을 마시며 떠올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술이 깨고 나니, 그 생각은 쑥스러워져서 관뒀지만, 신분을 감추고 일반 시민 구역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비화곡주가 아닌 평범한 청년으로서 여자를 꼬시는 건, 기회가 되면 시도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지만, 비밀 나들이 자체가 꽤 재미있을 것 같다.
콧노래를 부르며 내 방으로 돌아가자, 세 자매가 동시에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간다.
——————————
“어, 나야, 나…”
“고, 곡주님..?”
깜짝이야.
자매들이나 나나 놀라긴 했지만 재미있군.
허구헌날 내 옆에 있는 얘들도 못 알아볼 정도면 완벽한 변장이지..?
“후후… 어떠냐? 지금 내 모습?”
“괴, 굉장한 역용입니다.”
웬일로 말 수 적은 소령이가 먼저 입을 열어 감탄사를 발했고,
그 옆의 미령이는 어느새 장난기 어린 표정이 되어 있었다.
“과연..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시면 어떤 적도 본래 곡주님의 준수한 용모를 연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뭐시라고라고라..?
“….미령이 너, 지금의 내 얼굴이 아주 형편없다는 뜻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곡주님 본래의 고아한 풍모를 항상 접하다 보니,
그런 평범한 얼굴은 웬지… 쿡! 쿡!”
미령이 기집애가 나 열 받은 지도 모르고 쿡쿡대고 웃는 걸 보니..
아무리 정밀한 인피면구라도 세밀한 표정 변화는 잘 안 드러나나 보다.
“미령아.. 이 얼굴..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형님’의 얼굴이란다.”
“아.. 자, 자세히 보니 곡주님만은 못해도 사내답고 영웅의 기개가 느껴지는..”
“됐네, 이 사람아!”
우쒸… 나 진유준의 본 얼굴과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대충 비슷한 얼굴인데,
‘극악..’ 놈보다 그렇게 못하다고?
“소교, 니가 보기에도 이 얼굴이 영 아니냐..?”
“…사람의 용모를 어찌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미령이가 아직 어려 함부로 말 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거야 용서하고 말 것도 없고.. 대답이나 해봐.
이 얼굴.. 니가 보기엔 어때?”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짙은 눈썹과 굵은 입술이 잘 어울려 사내답고 굳건한 분으로 보입니다.
미남형이라기보다는 호남형이라 하겠습니다.
헌데.. 곡주께 형님이 계시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이것이..
조금 칭찬하는가 싶더니 슬며시 말을 돌리는군.
“어.. 친형제는 아냐.
우연히 만난 사람인데, 이름은 진유준..이라고 하지.
뭐랄까, 아주~ 훌륭한 분이라는 것만 알아둬.”
아이, 민망해라.
내가 내 칭찬을 하다니…
“진유준.. 진대협의 성함을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다.
곡주님과 의형제를 맺으실 정도라면 위대한 영웅이 분명하겠군요.”
“그, 글쎄… 진유준 하사를 위대한 영웅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게.. 하여간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기는 해.”
“하사.. 처음 듣는 명호로군요. 세속을 등진 은거 기인이신 모양입니다.”
“명호..? 그래 뭐, 명호라면 명호겠지.
아래 하 자에 선비 사 자 쓰는…”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는 명호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분인 듯…”
“………..”
얘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갔군.
하지만 뭐.. 은거해 있다는 부분은 과히 틀린 얘기도 아니지?
영혼은 여기 엉뚱한 놈의 몸 속에 은거 중이고,
몸은 깊고 깊은 동굴 속 얼음 구덩이에 은거..
음, 그러고 보니 좀 걱정되는군.
몽몽은 내 몸이 거기에 몇 십 년 있어도 까딱 없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라도….
“후…. 언제 한 번 보러 가긴 해야 하는데…”
내가 혼자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소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곡주님, 혹시 그 분 신상에 좋지 못한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음.. 사실 그 분은 얼마 전 꽤 나쁜 일을 당했지.
하필 인생의 새로운 전기(제대)를 맞은 순간에 아주 엄청난 일을 당해서
지금은 죽었다고 하기도 살았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구.”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소교도 그렇고 소령, 미령이까지 자기 일처럼 슬픈 표정이 되어 있다.
귀여운 것들.. 고맙다.
“후.. 거기엔 매우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어서 너희들에게 자세히 말해 주긴 어렵다만 뭐..
어쨌든, 같이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도 틀림없이 지금 너희들 마음을 고맙게 생각할 거야.”
음, 괜히 조금 심란했다만…
내가 내 육체로 복귀하는 것은 어차피 ‘진’이라는 그 미래 여자가 와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거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분 전환도 할 겸, 진유준 얼굴로 민간 지역 시찰(?)이나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