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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53화


  • 53 –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이리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일단은 중학교 때 좋아하던 양희은의 ‘아침 이슬’로 시작한 다음…

“희망이여 빛이여.. 아득한 하늘이여..
나의 백마가 울부짖는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바람을 가르는 칼..
나 소리 높이 외친다.. 나 소리 높이 외친다..
위대한 천명을 위해..
오늘도 달린다.. 오늘도 달린다..

추억의 만화 영화 주제가(원탁의 기사)를 조금 바꿔서 마무리!!

짜집기 표절… 생각보다 힘들었다.
게다가 술이 좀 깨서 그런지, 이제까지와 달리 무척 민망하다.
난 지금 몽몽의 해석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니까, ‘표절’에 ‘립싱크’까지 한 셈인가?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상인데도 난 이렇게 민망하고 쑥스러운데,
사람들이 뻔히 아는데도 소신 있게(?) 밀고 나가며 인기도 유지하는 우리나라 표절 작곡가와 립싱크 가수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그들은 창피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게 안면은 특수 합금 처리하고, 신경 제거 수술이라도 받아 무신경 상태로 데뷔하는 건 아닐까?

어쨌거나, 나 진유준의 ‘표절 무대’도 꽤 성공을 거둔 듯하다.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날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고,
특히 문제의 여자 이화는 나쁜 말로 ‘빠순이’라고 부르는 연예인들의 광적인 소녀 팬 모드로 들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가만? 이렇게 되면.. 어-? 이화가 다시 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웨이터들이 그녀가 앉을 의자를 들고 뛰어 오고…

“..이만 가자, 얘들아.”

난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화를 무시하고 1층 계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대가..? 어, 어째서..?”

“아, 난 본시 내기에 참여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니 예외로 합시다.
아까 당신의 연주와 노래는 잘 들었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놀러 오리다.”

“그, 그런..! 다음이라면 또 언제가 되오리까?”

“기약할 수는 없소. 뭐, 바쁜 일이 없고 소호루의 술 한잔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음, 붙잡고 싶어 안달하는 여자의 표정을 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군.
나 진유준 본래의 얼굴에 가까운 용모로 돌아가 거둔 성과라 더욱 뿌듯하다.
역시 여자들은 연예인(?)에 약한 걸까..?

“후후…”

내 옆에 바짝 붙어 걷던 미령이가 갑자기 짓궂은 표정이 되어 웃는다.
어..? 이 아이 어느 틈에 해수(解水, 분장을 지우는 물)를 써서 얼굴을 본래대로 했지?
엑-! 말릴 틈도 없이 머리의 두건까지 벗어 던진다?

“아~!”

이화는 신음성과 함께 말을 잇지 못했고, 실내의 모든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다.
본래의 고운 피부와 긴 머리채를 드러내 환상적인 미소녀로 돌아온 미령이는 이화에게 혀를 한 번 날름해 보이고는 보란 듯이 내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한다.
으- 이 말괄량이 같으니, 끝까지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허어~ 천하의 이화 아씨가 오늘 낭패를 만났군.”

“어쨌든 사내에게 거절 당한 데다, 저런 아름다운 소녀의 사내라니..”

1층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수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계속된다.
이거.. 아무래도 끝내 무협지 단골 메뉴 ‘주루의 결투’가 이루어질 분위기지..?

“거기 서랏-!”

내 이럴 줄 알았어. 아까 그 패권웅 왕정이 2층에서 곧장 이쪽으로 날아오는 군.
저 덩치가 날렵하기도 하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우리 일행과 1층 입구 사이에 사뿐히 내려선다.
이어 같은 패거리로 여겨지는 자들이 2층 계단을 장악한 채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네가 시성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화 아씨께 이토록 창피를 주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흥-! 경쟁에 패하고도 창피함을 모르고 나서다니, 정말 얼굴이 두꺼운 자로군.”

이젠 미령이가 상대를 자극하는 걸 말릴 생각도 안 든다. 이 트러블 메이커 같으니..!

“내가 창피를 당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이화 아씨를 무시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내야겠다.”

그렇게 외치며 비장한 태도로 다가서는 패권웅 앞을 백상이 가로막는다.

“잠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 일갈로 일단은 상황 중지.

“여기서 싸우면 당신의 이화 아씨 소호루가 남아나겠어? 밖으로 나가는 게 어때?”

패권웅의 동의 아래, 우리 일행과 그쪽 패거리도 밖으로 몰려나가서 다시 상황 재개..!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싸움 구경이나 하고 가지 뭐.
내가 한 번 쉼표를 찍어서 그런지 좀 전과 달리 패싸움 분위기가 사라지고,
저쪽에선 패권웅이 대표로 나선다. 우리 쪽은…

“제가 상대해 보겠습니다.”

“음.. 그래, 백상. 하지만 대충 상대해 줘.
나 또 이런 식으로 나올 건데 이 곳에 원수를 만들어 놓아 좋을 건 없으니까.”

백상은 “존명!”이라며 대답했다.

패권웅이 한 뼘 정도 더 큰 것 같지만, 덩치는 백상이 더 좋다.
물론, 백상이 살이 조금 더 쪘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혈랑대 십인장 백상, 그의 솜씨를 볼 기회가 왔다.

황성이 덧붙였다.
“백상은 비록 십인장이지만, 무공은 저희 백인장들 못지않습니다.”
흠.. 그래? 생각해볼 만한 설명이다.

패권웅이 자기 소개를 한다.
“이 몸은 패권웅 왕정이라 하오.”
백상도 대답한다.
“무명소졸인 백상이오.”
싸움 전에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앗!”
선수를 쓴 건 패권웅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세 번의 공격을 퍼부은 후 물러난다.
백상은 놀라울 정도로 날렵하게 그 공격을 막고 피했다.

“평범한 일자권(日字拳)과 평권(平拳), 유엽장(柳葉掌)을 사용했네요.
백상이 명호를 밝히지 않아서, 일단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듯합니다.”
황성의 설명이다.
흠.. 명호란 고수들이 사용하는 무공에 따라 얻는 별칭이라던데, 백상은 상대에게 정보를 주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탐색전은 길지 않았다.

패권웅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주먹과 발차기에서는 바람 소리가 나고, 그 위력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난 번 봤던 고수 부부의 싸움보다는 조금 격이 떨어지지만, 현실감 있는 싸움이라 더 재미있다.
하지만 곡주 체면상 대놓고 응원할 수는 없어서 좀 밋밋하다.

패권웅이 갑자기 땅에 쓰러지듯 손을 짚고, 발로 백상을 향해 찼다.
백상은 뒤로 피했지만, 패권웅은 손을 축으로 큰 원을 그리며 발차기를 이어갔다.
공중에서 연속 발차기를 퍼부었고, 결국 백상이 맞고 말았다.

“연환퇴(連環腿)의 배합이 절묘합니다.
천궁퇴(穿穹腿)를 능숙하게 쓰는 것으로 보아 당랑권(螳螂拳)에 조예가 깊은 자로 보이네요.”
황성이 다시 설명했다.
그럼 그렇지, 꽤 고수였군.

“완전하지는 않지만, 칠성보(七星步)를 기반으로 하고 있군요.
아무래도 생각보다 고수였던 것 같습니다.”
미령까지 나서서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들이 나를 놀리는 건가?

“커험..! 그.. 그냥 구경이나 해라. 정신이 산란하다.”
괜히 심술을 부려보지만, 미령이 얌전히 수긍하고 입을 다문다.

싸움은 길어지고 있었다.
패권웅이 우세해 보이지만, 백상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백상에게 ‘대충’ 하라고 한 탓이 큰가 보다.

“하하! 정말 훌륭한 권법이오.
나는 아무래도 귀하의 상대가 못되는 것 같소.”
백상이 그렇게 말하자, 패권웅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크아앗!!” 외치며 광분했다.
살기 띤 공격으로 바뀌며 치명타를 노리는 모습이었다.
결국 백상이 당했다.

“어멋! 갑자기 호조수(虎爪手)로 급소를 공격하다니?”
미령이 깜짝 놀라 외쳤다.
다행히 백상은 큰 상처는 없었지만, 왼쪽 가슴이 찢겨 선혈이 흘렀다.

“흥! 상대가 봐주고 있는 것도 모르고 뻔뻔하게 살수(殺手)를 쓰다니.”
미령이 독설을 던졌다.
백상은 화가 난 듯, 그의 눈에선 살기가 서려 있었다.

“실은, 백상이 저보다 먼저 무공을 인정받아 천인장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2년 전 실수를 범해 강등되었지만…”
황성의 말에 놀랐다.
그럼 백상의 진짜 실력은…

백상이 살기를 뿜으며 다가가자 패권웅이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이 싸움을 멈춰야 할 것 같은데…

“멈추시오!”
갑자기 일갈이 들리며, 흰 그림자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본래 노부가 나서지 않으려 했으나, 사소한 시비가 너무 커지는 것 같구려.”
귀유옹이라는 노인이 등장했다.

“노부가 중재할 테니 부디 이쯤에서 싸움을 멈추는 것이 어떻겠소.
백대협도 조금 전까지 진심으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백상은 살기를 거두지 않는다.
“난 이미 살기를 멈출 수 없소. 패권웅 대신 노선배가 죽어주겠소?”
백상의 말에 귀유옹의 표정이 변했다.

백상이 갑자기 귀유옹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지만, 눈을 한 번 깜빡한 사이 그들은 다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흥, 늙은이가 과연 믿는 구석이 있어 나섰군.”
백상이 냉랭하게 말했지만, 귀유옹은 아직 멀쩡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했다.

“이, 이럴 수가.. 지금 그 무공은.. 서, 설마 혈..”

다행히 황성이 눈치 빠르게 고함을 질러 귀유옹의 말을 막았다.
“손을 거두고 물러나라!”
백상은 명령을 받들며 물러났다.
패권웅 측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조용했다.

귀유옹은 백상의 무공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그, 그렇다면..?”

그 순간, 내가 개입해 귀유옹의 말을 막았다.
“거기까지!”
귀유옹은 순간적으로 나에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나는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음.. 지금 왜 백상을 물러나게 했는지, 노선배는 알 것이라고 믿소.”

귀유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험..! 이 늙은이가 잠시 착각을 했나보구려.
아직도 이렇게 남의 싸움에 끼어들기를 즐기니, 아무래도 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소이다. 허허허…!”

나는 귀유옹을 칭찬하며 웃었다.
“그렇지 않소이다. 내가 보기에 노선배는 장수하실 상이오.
이렇게 싸움을 말리고 덕을 쌓으니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오.”

우리 대화를 해석하면, 이렇게 들릴 것이다.
“이 늙은이가 암행 나온 곡주를 알아 봤으니, 저를 죽여 입을 막으시겠지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죽여!”

귀유옹은 웃으며 답했다.
“헛,헛,헛..! 노부가 아는 게 무에 있겠으며, 나이를 먹으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라오.”
“게다가 나는 이미 너무 늙어 진대협 같은 인재를 다시 볼 홍복을 누릴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즉, ‘모른 척 하겠으니 살려달라’는 말이다.

나는 멋지게 자리를 뜨려 했다.
“자, 그럼 이 몸은 이만!”
장포를 휘날리며 멋지게 돌아섰다.

그런데 조금 걸었을 때, 뒤통수가 가려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귀유옹은 이미 사라지고, 구경꾼들도 흩어졌다.
다만, 초겨울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거리에서 흰 옷자락을 날리며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화가 있었다.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오늘 하루는 ‘무협지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짜증도 났지만, 대체로 재미있었다.
다만, 본단으로 돌아와서는 완전히 지쳐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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