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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68화


물에 젖고 불은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젊은 날의 총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그 동안 계속 총관과 얼굴을 맞대고 지내와서 알게 모르게 전우애… 아니 그냥 정이 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웬지 감상적이 되어 버린 나는 빨리 누구라도 와서 총관을 구해주고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던 비디오를 앞으로 빨리 돌려보거나 읽던 책의 뒷부분을 미리 펼쳐 보고 싶은 것과 유사한 충동이 일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내가 꾸욱 참고 지켜보는 가운데 청년 지천공은 간신히 의식을 되찾더니 그야말로 처절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서는 비틀비틀 걷고 기고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마를 그렇게 참담하게 기어가는 그의 전방에 작고 초라한 움막 같은 것이 나타난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은 있으나 현재는 비워져 있는 분위기의 움막으로 들어간 지천공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는 것 같다. 그러더니 아궁이로 여겨지는 곳에 손을 넣어 재를 한 움큼 쥐어 낸다. 야전에서의 응급조치법을 알고 있었는지 재를 어깨며 가슴이며 의 상처에 발라 지혈하고는 바닥에 쓰러져 눕는다. 다시 의식을 잃은 그의 몸 위로 어둠이 덮어지고…

잠시가 지나 화면이 밝아오자, 지천공은 굵은 나무 가지를 지팡이 삼아 절룩거리며 어딘가를 걷고 있다.

미친놈처럼 산발을 한 머리모양에 여기저기 더럽혀지고 찢겨진 의복… 완전히 거지꼴을 하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물살에 떠내려오면서 돈 같은 것도 잃어버린 건지 정말 거지처럼 빌어먹으며 가고 있다.

그런 그의 상황과 금마표국에서 진행되는 일이 번갈아 비치기 시작한다. 누군가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실신하여 쓰러지는 지천공의 어머니. 울부짖는 누이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일까? 눈을 감은 지천공 어머니의 얼굴 위로 흰 천이 덮어진다.

지나가는 수레에 얻어 타려다 거절당하고 다시 힘없이 걷기 시작하는 지천공.

득의한 표정으로 웃으며 금마표국을 접수하고 있는 성천표국주… 그의 음흉한 시선이 한 쪽에서 울고 있는 지천공의 누이들에게 향한다.

어두운 창고 같은 곳에서 추위에 떨며 자고 있는 지천공.

성천표국주와 그 외 표국주들에게 집단으로 난행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지천공의 누이들.

제기- 말로 들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직접(?) 보니 상당히 비참한 상황이다.

어두운 숲,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에게 돈을 건네받고 있는 성천표국주. 사내들은 지천공의 누이들을 끌어다가 수레 위에 내던진다. 수레 위에는 이미 여러 명의 여자들이 묶인 채 떨고 있다.

음, 여자들이 팔려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한 노인이 있는 걸 보니 이 노인이 나중에 지천공에게 사연을 얘기해 주는 역할인가 보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정말 상거지 꼴이 되어 있는 지천공의 시야에 비로소 그의 ‘금마표국’ 건물이 나타난다. 그러나.. 건물은 그대로였으나 문 옆의 현판이 바뀌어 있다.

[ 성천표국 ]

바뀐 현판을 무섭게 노려보던 지천공은 여전히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선다.

“뭐야-! 지저분한 거지 놈. 빌어먹으려면 다른 곳을 알아봐.”

본래 자신의 집 앞에서 문지기들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지천공… 부상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상태에서 굶주린 탓인지, 그는 제대로 말 한 번 하지 붙여보지 못하고 길바닥에 널부러진다.

“무슨 일이지요..?”

쓰러져 있는 그의 귓가를 파고드는 낯익은 음성…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 아가씨..! 웬 거지 놈이 어슬렁거려서 혼을 좀 내주고 있었습지요.”

약혼자였던 지천공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성천국주의 딸 성가려!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먹을 것을 좀 주어 보내요.”

성가려의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지천공, ‘불쌍한 사람’이란 말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몸을 일으킨 그는 성가려의 시선을 회피한 채 천천히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웬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대던 성가려는 그러나 끝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문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로를 걷고 있는 한 노인. 그의 팔을 누군가가 나꿔 채더니 길옆의 골목으로 끌어들인다.

“놀라지 마시오, 집사. 나요, 지천공이오.”

“오오- 이럴 수가! 살아 계셨군요.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재회를 기뻐하며 한 편으로는 기막혀하는 두 사람. 예상대로 노인으로부터 그 때까지의 상황을 듣는 지천공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다.

“이 쓸모 없는 노물은 아가씨들도 지키지 못하고.. 흐흐흑-!”

“그..랬..단..말..이..지..?”

아주 천천히 끊어 말하는 총관의 입에서 아득, 빠직 하는 소리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으- 제기, 잠깐 멈춤!

눈을 뜨고 일어난 나는 잠시 침상 가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아- 쓰바! 연극부 활동하던 때의 습관 때문일까?

당시 총관의 감정에 동화되면서 나 자신 열이 받아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시대 사람들의 행동 패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통찰력을 늘이기 위해서..라는 제법 거창한 의미를 괜히 부여해 보기도 했으나, 솔직히 ‘재미’를 위해 시작한 총관의 과거 영화화였다.

근데 이렇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감정이입이라니, 후우~ 감성이 너무 풍부해도 탈이라니까….

혼자 잘 놀던 내가 점점 상태가 이상해지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소령이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내 눈치를 보고있다.

“..소령아.”

“예, 곡주님!”

재빨리 침상 옆으로 다가오는 소령이.

“너 말야. 총관.. 너희들 사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예? 무슨 말씀이신 지..?”

“음, 그냥 니가 보기에 너희들 사부가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고.”

“……”

내가 얘한테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나?

“…사부는 근본은 정(正)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정의를 논하는 고지식함으로 마도(魔道)를 걸으니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허걱! 소령이가 이런 고난도(?)의 대사를..?

“..전에 야후 장로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쩐지- 하지만 소령이가 아닌 야후 장로가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조금 놀랍군. 그 단순 무식 노인네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소녀가 보기에 사부는 분명 좋은 사람 같지만, 그렇지만 웬지 무섭습니다.”

음, 이제야 소령이 다운 말투로군.

“총관이 무서워? 나보다도..?”

피식 웃으며 묻는 내 말에 소령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야릇한 표정이 된다.

“..곡주께선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 몰라서 간혹 어렵지만, 그렇지만 너무 좋은 분이라 무섭지 않습니다.”

칭찬(?)은 고맙다만, 어쨌든 난 현재 ‘극악..’이어야 하는 데 약간 위기감(?)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군.

“그에 비해 사부는.. 저희들을 잘 대해주고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보살펴 주는데도 어쩐지 두렵습니다. 저희들이 뭔가 실수하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고지식하게 ‘마도’를 걷는 자라는 표현과 통하는 얘기인 것 같다. 고지식.. 고지식한 만큼 다른 여지가 없다는 것일까?

“자남초(紫藍草), 한잔 더!”

나는 소령이가 서둘러 가져온 ‘구기자’차를 한잔 더 마시고 난 후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쨌든 끝은 봐야겠지..?

톡!톡!톡!

“이봐, 몽몽. 처음엔 상당히 스피디하게 진행하더니 갈수록 왜 스토리가 늘어지는 거냐? 20세기의 액션 영화들 태반이 그렇긴 했다만… 무슨 말하는 건지 알지? 처음의 감각대로 가자고, 응?”

내 말을 몽몽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다만…

다시 시작된 장면은 어딘 가로 걸어 가고있는 청년 지천공의 모습이다. 다친 다리 때문에 여전히 절룩거리지만 멈추고 쉴 생각도 없이 끊임없이 걷고 있다. 주변 풍경이 계속해서 바뀌더니만 이윽고 어떤 높고 거칠어 보이는 산이 나타난다.

< 만정산(滿廷山) 장우봉(長 峯) >

음.. 그가 무공을 완성했다는 그 산이로군.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에 다른 장면, 지천공의 아버지가 소년 시절의 지천공과 함께 산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그 위로 이어지는 대사….

“공아- 이 만정산에는 저 무서운 비화곡의 곡주 ‘사천대령신군’과도 자웅을 겨루었다는 ‘마검인(魔劍印) 월문’이 은거하고 있다는 전설이 있단다.”

마냥 산길을 걷는 지천공.

계곡을 헤매는 등 산 속을 헤매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된다 싶더니 이윽고 까마득한 절벽 앞에 선다.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내려가던 지천공은 어느 순간 비명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거친 호흡과 함께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지천공.

그는 자신이 어둡고 습기찬 동굴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방을 휘둘러본다.

“흐흐흐- 깨어났느냐, 애송아?”

어둠 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

“내가 왜 널 구해 주었는지 아느냐? 그건 근 10년 동안 내가 너무나 심심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이 곳까지 기어 들어온 자는 모두 2128명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돌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최근엔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다만….”

“….노선배가 혹시 마검인 월문이시오?”

“호오-! 네가 날 아느냐? 아직 강호에 날 아는 자가 있더냐?”

음, 한소리 했더니 확실하게 스토리 진행이 빨라지는 구만.

“흐흐- 날 안다면.. 혹시 비화곡의 사천대령신군이 보낸 자이냐?”

“그렇지 않소. 난 다만 내 운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에 온 것이오.”

“운을 확인한다..?”

“만약 이 곳에서 노선배를 만나지 못한다면, 난 내 본신의 무공이나마 더욱 갈고 닦은 후 돌아가 내 원수의 목을 노릴 생각이었소.”

“..그렇다면 날 만났을 경우에는..?”

“만약 노선배를 만나 그 무공을 전수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원수 하나가 아니라 일에 관련된 모든 인간들.. 원수의 손길이 닿은 풀 한 포기까지 짓밟아 없애 버릴 생각이었소.”

“…..”

어둠 속의 마인, 마검인 월문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크학학!! 너 아주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이고, 합리적이면서 제멋대로이다. 크핫핫핫-! 맘에 든다. 아주 마음에 들어~!!”

음.. 뜻은 어쨌건, 지천공이 ‘기연’을 얻는다는 상황은 맞는 것 같다.

화면은 지천공이 거대한 폭포수 아래에서 결가부좌를 튼 채 수련하고 있는 모습과 검을 휘두르며 계곡 사이를 날아다니는 모습이 번갈아 보여지고 있다.

주변의 자연 경관,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얼음이 녹아 계곡 물 속으로 떨어져 내리며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처음 마검인 월문이 등장했던 어두운 동굴. 그는 지천공의 등에 자신의 두 손을 대고… 아무래도 내공을 전수하는 장면인 것 같다.

“크하하핫~!! 죽기 전에 너 같은 놈이 와서 다행이다.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나처럼 미친 마인은 지겹게 봐왔다. 네 놈처럼 성실하고 외골수인 마인을 강호인들이 어떻게 평가할 지 궁금하구나, 크왁핫핫~!!”

나처럼 미친..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마검인 월문은 진짜 미친놈처럼 웃어대며 내공을 몰아 주고는 결국 픽~! 쓰러져 죽어버린다. 참내…

조금 어이없어 하고 있자니, 드디어 ‘성실한 마인’ ‘혈마검호 지천공’이 만정산의 정상 장우봉에 서서 무지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산아래 강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평화롭게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지나는 커다란 건물에 현판이 걸려져 있다.

‘강사 표국’의 현판.

순간적으로 작살난다.

놀라며 긴장하는 표사들… 연이어 작살난다.

너무 순식간이라 뭐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사람과 건물과 구조물이 동시에 잘려지며 폭풍에 날리듯 흩뿌려진다.

작살나는 민용표국의 현판.. 사람들..

작살나는 금의표국의 현판.. 사람들..

작살나는 장전표국의 현판.. 사람들..

작살나는 정동표국의 현판.. 사람들..

“이럴 수가.. 자네가 정령.. 그 지천공이란 말인가..?”

시체들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정동표국의 국주는 눈물에 범벅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다.

“요, 용서하게.. 제발.. 제발 내 가족들만이라도..”

전에 상황을 생각해 봐도 이 정동표국의 국주는 지천공과 남다른 사이였었던 것 같았다. 그런 정동표국 주와 가족들을 지천공은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안됐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라 나로서는 번복할 수가 없군요.”

지천공은 아주 안타깝다는 음성으로 천천히 말하고는 번득! 일 검에 두 세 명 씩 잘라서 없애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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