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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70화


오상은 다시 처음의 혈기 있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모, 못 할 건 또 뭐가 있겠-!”

이번엔 구월화가 재빨리 나서더니 나와 오상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곡주님, 용서하소서! 상 오라버니는 아직 곡주님을 모릅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월화,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더 이상 네가 나 때문에 희생하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오라버니, 그게 아니어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 분은, 이 분은….”

구월화의 만류에 주춤하던 오상이었지만, 구월화가 ‘이 분은..’에서 더 이상 설명을 못하자 다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하긴 구월화가 나나 원판에 대해 아는 것이 뭐 있겠는가, 직접 만나 보니까 생각보다는 좀 낫지 않은가 정도…겠지? 것도 원판 말고 나니까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제기, 화 낼 기분도 안 나게 만드는 구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다 들으라고 일부러 조금 크게) 소령이에게 다시 검을 돌려주었다. 말을 그렇게 하며 표정도 피식거리고 웃는 정도로 구월화 이하 이 장소의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두 남녀의 ‘사랑 타령’이 어린 소교와 더 어린 자매들도 감동시켰을까? 그녀들도 웬지 내가 화 내지 않는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심술’이 나 있는 참이다. ‘극악..’ 생활 얼마 안됐지만, 그에 못지 않은 ‘말년 고참’ 생활 끝낸 지도 얼마 안된 나다. 그 기분의 연장으로, 쫄다구들 앞에서 딴 소속 부대(?) 녀석이 게기는 데 그냥 보아 넘길 내가 아니다. 게다가 이 곳의 주인인 ‘극악..’ 신분의 나도 지금 매일 매일 보고 싶은 사랑스런 소녀를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가끔 밖에 못 보는데, 내 앞에서 ‘닭살 커플’ 행동을 보여..?

“뭐, 좋아. 내가 직접, 친히, 친절하게.. 오상 자네와 가족들, 구월화의 처지와 상황을 설명해 주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오상은 내가 빙긋이 웃으며 너그럽게 말하자, 자신이 오버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아직 모르지..? 웃는 얼굴에 침 뱉기 어려우면 피하거나 튀어야 할 사람도 많다구, 특히 ‘원판’, 그리고 때로 나 진유준 같은 성격의 사람..!

“일단, 한 잔 하면서 얘기 하자구, 우리.”

난 당황한 눈치의 오상을 무시하고 사근사근한 태도로 명령을 내렸다.

“한 식경 정도 후에 비취각에 내가 간다고 해. 귀한 손님 한 명과 함께. 그리고 오늘부터.. 음, 구월화 자네 거처가 몇 호였지?”

“…이 곳, 봉황전(鳳凰殿)의 상아실(象牙室) 207호입니다.”

대답은 구월화가 한 것이 아니었다. 들러리, 내지는 ‘엑스트라’여서 아직 소개(?)안 했지만 구월화에게는 봉황전 소속의 얌전한 인상의 시녀 두 명이 항상 함께 한다.

“음, 그래. 봉황전주에게 207호실 가까운 곳에 거처 하나 더 마련하도록 하여 오늘 손님들을 모시고, 기존의 207호실 거주인과 새로운 거주인들의 등급을…”

[봉황전 손님 등급.
1급 – 강호 무공 서열 100위 권 이상의 고수 및 그에 준하는 신분의 인사. 통칭 청룡실(靑龍室).
2급 – 강호 무공 서열 500위 권 이상의 고수 및 그에 준하는 신분의 인사. 통칭 백호실(白虎室)
3급 – 강호 무공 서열에 관계없이 곡 내 일정에 준하여 접대 필요의 인사. 통칭 상아실(象牙室).
4급 – 기타 인사들. 통칭 무화실(舞華室).]

잘했다, 라이코… 아니 몽몽-!

“음, 한 단계 올리라고 해.”

“존명-!”

“글고, 구월화!”

“하명하십시오. 진곡주님.”

“하명은- 무슨, 자넨 내 수하도 아닌데 뭐. 그냥 오늘 부모님 잘 모시고 있으라고. 에- 이 친구는 잠시 빌렸다가 이따 저녁때 돌려줄게. 괜찮지? 응~?”

“뜨, 뜻대로 하시길. 부디…”

대답이 애매한 거 보니, 조금 불안한 모양이지?

“소교야, 오늘 주간 일정 모두 취소다. 비취각으로 가자.”

“존명-!”

기특한 소교, 애시당초 나에게 ‘일정’ 같은 거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 군말이 없다. 나는 그 전에 벌써 미령이가 비취각 쪽으로 내달리는 것을 보며 남모르게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음흉하게~

“흐음.. 커-험!”

결국 못 참겠는지 헛기침을 하며 내 쪽을 보는 오상에게 나는 낮술로 부시시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왜..?”

“어쨌든… 은공께 아까 제가 너무 무례한 태도를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도대체…”

짜슥이, 말하는 게 끝까지 삐딱하구만.

“왜, 좀 전까지의 내 설명이 충분치가 않아? 그럼 뭐든 더 물어봐.”

“….말씀하신 대로 장명의 이중성을 진곡주께서 천하에 폭로할 때 저희가 ‘증인’이 되라는 것은… 그것은 저나 부모님도 학수고대하던 일입니다.”

“근데?”

“…죄송하오나, 그런 정도로… 저희 가족을 이렇게 환대해 주시는 것은…”

“나 알긴 해..? 내가 어떤 인물인지.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사이 나와 몇 잔 마신 술(독한 술이다.)에 불콰해진 얼굴로 오상은 비로소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연다.

“..제가 비록 강호에 몸담지 않았으나, 이 곳이 천하 마- 아니 호걸들이 모인 곳이며… 곡주께서 그 호걸들의 주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게겼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고 말했다.

“자네와, 가족들을 구출한 사람 봤지? 그가 신분을 밝히지 않던가?”

“그 괴이한 노인장 말씀입니까? 스스로 ‘마노인’이라 부르라고는 했습니다만…”

“그 노인네가, 당금 강호의 십대악인(十代惡人) 중의 한 명이라는 ‘독수라’야. 강호에서 사천당문과 호각을 이룰 유일한 독인(毒人)이라 불리는….”

들어는 봤나- 독수라(毒修羅)-!

…들어 봤나 보다. 흠칫, 놀라는 기색의 오상.

“글고- 오면서 얼마나 봤어? 이 비화곡의 구성 인원을..?”

“……..”

“당장, 눈앞의 이 미녀들은 어때..?”

내 말에 오상은 기다란 술상 너머에 대기하고 있는 소녀들과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미소녀를 새삼 힐끔 보고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인세에 없을 것 같은 선녀의 용모이외다..!”

“그치, 그럼 내 뒤에 서있는 소녀들은..?”

소교, 소령, 미령 세 명은 아까 이미 봐서 그런지 망설이며 고개를 돌리지 못하더니 간신히 입을 연다.

“..표, 표현치 못하겠소.”

후후- 술 몇 잔 들어가니까, 솔직해지는 구만.

“그게 말이야, 이 아이들이나 이 곳의 인물들은 다들 정상(?)이 아니라구. 그야 뭐, 나도 그렇다지만… 하여간 자네와 가족들처럼 평-범-한, 그런 사람들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야. 그래서 좀 더 잘해 주고 싶어. 이해 안가..?”

“………??!!”

아주 빈말은 아니다. 군대 생활 해본 사람들, 특히 민간 지역과 먼 부대의 군대 연병장에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라. 군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이 젊은 여자라면 금상첨화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민간인’이라면 일단 신기(?)하고 왠지 대접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

“자네와 구월화를 포함한 가족들은 이 곳에 길어야 3-4개월 정도 있으면 돼. 자네 말대로 난 그리 정의로운 인물은 커녕… 아주 많이 나쁘지. 그래서 오히려 자네처럼 평범한 인물은 앞으로 만날 일도 없어. 그러니까 여기 있을 때 부담 없이 즐기라구, 그 동안 장명 따위에게 구속되어 있느라 못한 일들을…..”

나는 오상에게, ‘내 다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의 잔에 친히 술을 따라 주었다. 이제야 어색해하면서도 태도가 다소곳…해진 오상은 조심스럽게 내 술을 받는다. 술상 너머에 대기하고 있는 미녀들을 통솔(?)하느라 앉아 있던 비취각주가 다소 미심쩍은 표정이었다가 내 장난기 어린 눈빛(?)을 알아챘는지 남모르게 웃는다.

“곡주님, 오상을 비취각에서 접대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이날 늦은 오후, 내 처소에서 미령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당돌한 미령이는 현재 큰언니 소교가 눈치를 주어도 모르는 척 궁금한 것을 묻는다.

“비취각주에게 친히 그를 상대하라고 하신 것을 소녀는 도저히…”

“‘비교 체험 극과 극’이다.”

“예..?”

“그가 갇혀 있던 시기와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의 태도를 유지하면 내 그를 인정해 주지. 하지마안~! 만약 비취각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하면.. 비취각주가 아무리 매혹적인 여인이라지만.. 그러면……!!”

나는 일단 씨-이-익! 웃어 보이며 그 정도만 말해 주었다.

사실, 저 오상이란 녀석은 나처럼 젊은 나이에 몇 년 갇혀 살았다. 뭐, ‘뇌옥’에서 밥이야 줬어도 딴 거(?) 줬겠어? 흐흐~!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이곳에 있는 동안 그 녀석이 남자에 대한 초 전문가인 비취각주와 그녀의 정예 미녀 집단, 비취각의 공세(?)에 버티고 삼홍랑 구월화에 대한 정리를 지키면 내 인정해 주겠다. 그러나 놈이 애인의 그간 수고를 저버리고 비취각의 미녀들에게 딴 짓거리 하면 절~단(?) 낼껴~!

아니, 내가 어찌 안 하더라도, 열혈여인 구월화가 가만있지도 않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연인과 가족을 위해서 억지로 딴 남자들을 상대한 여자가 그리 호락호락하겠는가. 더구나 오상보다 해남파 총령 마누라 출신(?)의 구월화가 무공 면에서 ‘한 칼’한다.

앞으로의 사태(?)를 혼자 이리저리 연상하며 흐흐-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나는 문득 다시 자매들을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말 안 해줬는데도 오상에 대한 내 조치의 의미를 다 눈치 깐 모양이다.

소교 – 곡주, 이 인간이 드디어 ‘영웅본색’.. 아니 ‘곡주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라는 표정.

소령 – …암 생각 없는 것 같음.

미령 – 역시 ‘극악’한 곡주님이셔. ‘중화영웅’… 아니 ‘비화영웅’… 표정.

다소 찜찜한 면은 있지만, 그보다 말 나온 김에(?) 평소 궁금하던 걸 물어보고 싶어졌다.

“얘들아.”

“예, 곡주님.”

“너희들 말이야. 평소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남자상’을 한 번 말해 볼래?”

내 말에 잠시 멍-해 있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자매들…

“음- 나 이외의 남자를 생각하는 것이 ‘금기’라고 배워온 것은 알아.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어려, 현실이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생각 자체가 바뀔지 몰라도 지금 이런 저런 생각쯤은 할 수 있잖아? 응? 한 번 얘기해봐.”

말이 간단해서 ‘금기’이지, ‘세뇌 교육’이 그렇게 간단히 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교와 동생들은 흑주는 고사하고 혈랑들보다도 비화곡의 본단에 소속 된 기간이 짧으므로 아직 여지(?)가 있을지도…

“난 말야, 어렸을 때는 너희들처럼 예쁜 소녀가 최고라고 생각했어. 미령이처럼 깜찍하고 소령이처럼 귀엽고 소교처럼 사랑스럽고… 대교… 음, 하여간 그랬는데 조금 나이를 먹으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구. 날 이해해 주고 포근한 여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란 말야. 후후-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내 생각을 먼저 밝히고 바람(?)을 잡으니 소녀들도 비로소 뭔가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예상대로 미령이가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생글거리며 입을 연다.

“미령이의 정랑은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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