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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76화


아직 몸 아팠던 휴유증도 있고 대교의 행적에 관한 보고서도 읽고 하느라 술을 안 마셨더니만, 다음 날 아침엔 머리가 맑은 편이었다.
오전엔 그래서 비교적 침착하게 총관에게 구구절절이 변명 같은 상황 설명을 했다.
내 설명의 요점은 당연히, 예전에 어쨌든 지금은 ‘극악..’ 모드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납득한 건지 어쩐 건지 몰라도 비교적 안도한 표정으로 나가는 총관을 보니 그나마 나도 마음이 놓인다.
처음에 왔을 때처럼 손짓 한 번, 말 한 번 잘 못하다가 ‘학살극’을 벌이게 된다면 우선 나부터가 못 견딜 것 같았다.
그 다음 소교 이하 자매들에게는 내 뜻을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소교, 앞장서라.”

“존명!”

오후에는 혈랑대의 황성, 백상들과 자매들을 줄줄이 앞세우고 자매들의 ‘고향’으로 향했다.
말이 고향이지 사실, 거기도 비화곡 내에 있는 마을이다.
처음 가봤던 가경촌에서 다시 내 걸음으로 서너 시간은 강행군(?)을 해야 도착할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마을명은 ‘송현촌(訟玄村)’.
사실 부하들 휴가 보내 주면서 부대장이 그 뒤를 졸졸 따라 간다는 건 좀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원판 ‘극악..’ 특유의 학살극은 주로 자신은 안 시킨 것처럼 (그래봤자 다들 아는데도.) 시침 뚝 떼고 돌아서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어서 자매들은 내가 자신들과 함께 가는 것에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몇 달 동안 고생(?)해서 기껏 잘 보여 놨더니 ‘냉수욕’ 한 방에 그 ‘신용’이 날아가다니- 웬지 무지 억울하다. 대교.. 그녀도 설마 날 믿지 못했으려나..?
어쨌든 고향에 다가갈수록 소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소령이와 미령이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다.
가면서 들으니 그녀들의 아버지가 아내를 잃고 난 후, 대교 말처럼 조금 흐트러진 정도가 아니라 5년 전까지는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며 지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린 동생들 돌보는 일은 모두 대교 차지였고 헤어질 당시에 나이가 어린 동생들일수록 부녀지간의 정이 그리 깊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송현촌은 지금까지 가 본 마을 중에서 가장 시골티가 나는 허름한 마을이었지만, 주변 자연 경관은 어느 마을보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흠… 마을 입구의 오래 묵은 은행나무부터가 어쩐지 낯익고 정겨운 느낌을 준다.

“저기, 저기가 소녀들의 집이옵니다.”

소교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 외곽의, 마당의 나무 위에서 산새들이 노래할 것 같은 분위기의 고즈넉한 오두막이었다.
대교 말대로라면, 본단에서 새로 집을 지어 줬다고 했는데, 최소한 삐까번쩍한 기와집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다소 실망하면서 소교들을 따라 싸리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애매한 기분으로, 대교 자매들의 아버지 전설의 살수 ‘사영’과 첫 대면을 했다.
전설의 살수는 햇볕 좋은 마루에 혼자 걸터앉아 팔자 좋게 술병을 기울이고 있던 참이었다. 음… 첫 인상은 좀 뜻밖이다.
그는 무서운 전력과 달리 너무 곱상하고 매끈한 미남자였다. 만년 소년 배우 ‘장국영’처럼, 저 지저분한 턱수염만 아니었어도 고작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실제로는 50이 가까웠다고 들었건만….

“아버지-!”

소교가 부르며 다가가자, 그녀의 아버지는 마치 잠시 외출한 딸이 돌아오는 것을 보듯 태연하게 웃는다.

“왔느냐, 소교.”

“아버지, 어찌 또 이른 시간에 약주를….”

“괜찮다. 독한 술이 아니다.”

목소리는 그 누구냐~ 맞다. 영화 ‘스피드’와 ‘매트릭스’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처럼 걸쭉하다(?).
한마디로 아주 매력적인 남자였다. 자매들의 어머니는 또 어느 정도였는지 몰라도 둘 사이에 저런 ‘작품’들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명호 사영(죽음의 그림자..?). 본명도 명호와 비슷한 무영(無影)이라는 자매들의 아버지는 천천히 자리에 술병을 놓고 일어선다.
대교 자매들의 아버지에게 대뜸 반말하기도 그렇고 호칭도 애매해서 난 먼저 말 걸기를 주저했다.

“소인이 곡주께 미거한 자식들을 맡긴 사영이란 자입니다. 헌데….”

어-? 뭔가 이상한데?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려주러 오시었습니까..?”

“사영 선배, 멈추시오!”

깜짝이야! 별안간 혈랑들이 외치는 바람에 갑자기 사영과 우리 측 사이에 긴박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더 이상 다가오면 우리도 살수를 쓸 수밖에 없소.”

응..? 황성과 백상 둘 다 매우 비장한 표정이다.
이 친구들 왜 이래? 지난번 거두.. 뭐라는 말상 노인과 소살파파, ‘흑주’의 사부들을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긴장할 필요 없네, 후배들. 곡주께 인사 올리려는 걸세.”

잔잔히 웃으며 내게 포권하는 사영.
제기- 혈랑들이 지래 설쳐서 그런가? 웬지 미묘한 위압감과 위기감이 느껴지는 걸..?
지금 그의 표정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허공에 떠 있는 그의 내공 그래프, 살기 그래프도 별다른 변동이.. 에..? 어느 사이 ‘살기’ 그래프만 이렇게 엄청 올라가 있었지? 이거- 정말 살벌한 걸..?
우쒸~! 그러나 기세 싸움이라면 나도 질 수 없지. 최소한 눈싸움은 저 무지막지한 야후 장로에게도 이긴 나다.

“소교, 소령, 미령 모두 이리 와라.”

자매들은 신속하게 내가 가리키는 곳에 늘어섰다.

나는 자매들을 주욱 돌아보며 사영에게 말했다.

“어느 놈이 얘들을 마음에 안 들어 것 같수?”

사영은 내 태연한 말투에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겨 사영의 옆을 스치고 걸어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이 아이들은 그 동안 나 돌보느라 수고해서 ‘특별 휴가’ 내 준거고. 난 당신에게 딸 농사 참 잘 지었다고 해주고 싶어서 따라왔소. 같이 술이나 한잔합시다.”

“대교가 보이지 않는군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아인 특별 임무.”

“특별 임무…?”

“지금은 극비라 밝힐 수 없지만, 곧 당신도 알게 될 것이오.”

“곡주— 진정 나와 술을 나누기 위해 온 것이오?”

“그럼 뭐 하러 왔겠소?”

“………”

음.. 만의 하나라도 내가 이 세계에서 대교와 맺어지기라도 한다면 저 사영은 ‘장인 어른’이 되는 셈이다. 그런 개념이면 난 지금 참으로 싸가지 없는 말투를 쓰는 셈이지만… 뭐, 아직은(?) 대교와 그런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이 사영이란 남자는 지극히 위험해 보이면서도 웬지 끌리는 대가 있는 남자였다.

잠시 후 사영은 말없이 내 앞쪽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권커니 자커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교가 본단에서 준비해온 안주는 닭다리를 아주 맛나게 튀긴 천도즙계구라는 광동지방 요리인데, 아마도 이 사영도 나처럼 닭튀김을 좋아하나 보다.

사영은 ‘고수’답게 그 동안 자신의 딸들이 모두 상당한 무공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아보았는지, 약간 쓸쓸한 눈으로 그녀들을 보았다.

“저 아이들은 무공을, 강호를 모르고 자라길 바랬건만…”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보고 있으니 사영은 조용히 덧붙였다.

“..아내가 떠난 후 난 바라볼 곳을 잃었소. 생각해 보면 저 아이들을 보며 살았어야 했었소.”

“지금도 늦지 않았소. 당신이 본단에 놀러와 만나면 되지 않겠소.”

“…곡주는 듣던 것과 다르구려. 내 눈에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로 보이지 않소.”

“당신도 그렇소. ‘거절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전설의 살수로 보이지는 않는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는 간혹 한 마디씩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어느 사이 각각 한 병 정도의 술을 비웠다.

난 술 먹으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때때로 각각 서로의 생각을 하면서 침묵으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술친구가 있다. 지금 이 사람이 그렇다. 처음 만났는데도 낯설지 않고 웬지 고향 형님을 만나기라도 한 기분…

처음엔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자매들은 처음 만난 나와 자신들의 아버지가 엄청 사이좋게 술 마시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동네 자체가 군대 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시골 외가집과 비슷하기도 하고.. 왠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계신 툇마루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 나는 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하늘이 참 맑고 높고 푸르고.. 편안하다.

옆에서 소교가 미령이에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이 떨어져 간다. 막내가 다녀오련.”

“응, 지난번에 일도에게 넘긴 술값이 아직 남아 있으려는지 모르겠네..?”

알아서 척척 해주는 아이들이 고마워서 뭐라 칭찬의 말을 하려고 했는데, 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곡주.. 아무래도 방해꾼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사영이 빙긋이 웃으며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사영이 바라본 방향은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는데, 거기로 한 인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양촌리 촌장 같은 분위기의 노인이 들어서더니 내게 깊숙이 상체를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곡주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은 이 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구양공이라 하옵니다.”

“송현촌 촌장, 구씨 노인입니다.”

사영의 장난스러운 추가 소개에 구양공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방해하여 송구스럽습니다만, 본단으로부터 곡주님께 급한 연락이 와있습니다.”

“뭔지 말해 봐.”

“그 것이….”

촌장 구양공 노인은 슬며시 마당에 늘어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다 내 측근이고, 가족 같은 사람들이야. 그냥 보고해.”

“음.. 곡에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곡주께서 직접 만나 보셔야 할 인물인 듯 합니다.”

“내가 직접..? 누군데?”

증말 많이 컸다, 진유준.

“…소림 성승(少林 聖僧)이라고 합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안 놀란 것은 집안에서 나 하나뿐인 것 같다. 혈랑들과 소교 이하 자매들, 심지어 천하의 사영조차 순간적으로 안색이 굳어진다.

나야 뭐,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소림 어쩌고 했으니, 성승이 이 성승(性昇)은 아닐테고 이 성승(聖僧) 이겠지..? 정도만 생각했을 뿐이다.

띠리리~~~! 웬일로 알아서 데이터를 보여주는 몽몽.

[ 소림 성승(少林 聖僧). 출가 전 속명은 불명.
추정 연령 130여세. 현 강호 무공 서열 1위.
소림사(少林寺) 출신의 고승으로, 정사마 모든 세력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추정. ]

허걱-! 이번엔 나도 놀랐다.

술 취해서 깜박했는데, 나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당금 무공 서열 1위에, 신비로운 인물로도 1위. 강호 인기 순위 극악서생과 1, 2위를 다투는.. 아, 이건 아닌가..?

강호에서 공인 받은 굉장 존경, 무지막지 신비, 엄청 유명, 짱 존경.. 하여간 그런 어르신이다.

난 조금 기가 죽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양반이 날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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