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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79화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만, 아무래도 내가 이 시대에 와서 대충(?) 지껄여도 다 먹히니까 나도 모르게 대담해진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그런 대답을…

에-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난 지금 술 마신 상태다.

대교 자매들의 아버지인 사영과 한 병(한 호리병?)씩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론~ 제기! 어쩐지 떠오르는 대로 지껄여지나 했더니만, 이거 정신 좀 차려야겠는걸?

“이봐, 여기 냉수..”

놀라서 어랏-? 소리를 낼 뻔했다.

자매들 대신 대청각 소속 시녀에게 냉수를 시키려고 고개를 돌리던 내 시선 앞에 웬 시커먼 그림자가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흑주..! 이 인간 언제 이렇게 내 옆에 가까이 와 있었던 거야? 거참, 누가 살수 아니랄까봐 소리도 기척도 없이…

“진시주, 빈승이 오늘 만나보고자 한 것은 이 것을 묻기 위함이었소.”

아차, 또 선수를 빼앗겼다.

아무래도 ‘선문답’이 되어서는 내가 금방 한계를 보일 것 같아서 냉수 한 잔 마시고 그냥 일상용어로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었는데 이미 늦었군.

쳇~! 할 수 없지 나도 몇 가지 선문답 사례 정도는 외우고 있는 몸.

한 번도 적당히.. 에..? 뭐야 이거.

성승은 한 손을 들어 먼 곳의 계곡, 아니 숲.. 혹은 산 자체인가..? 하여간 전에 내가 음식 장만하여 야후 장로를 만나기 위해 간 일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무엇이라고 여기시오.”

나는 대답하기 전에 일단 한 시녀가 내온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근데.. 웬일일까,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대처하자고 마신 냉수에 정신이 조금 들긴 했는데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먼저 살아난다.

우쒸~ 첨엔 공연히 쫄았었는데, 생각해 보니 웬지 억울하다. 성승..! 이 어른신네야. 댁은 그렇다 치고 내가 무신 도를 구하는 수행자도 아닌데 꼭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해야겠어?

한 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니 좀 전처럼 성승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의욕도 안 생기는 구만.

좋아, 좋다 구. 그 쪽이 뜬금 없으면 나도 뜬금 없이 하지 뭐..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영어로 이거 맞나..? 하여간 외우고 있던 중국 고승들 위주의 사례들 보다, 특별히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외워진 우리 대한 민국이 배출한 고승이 남기신 말씀을 쓰니까 일단 기분은 좋군.

질문의 요지는 고사하고 성승이 정확히 뭘 가리킨 지도 모르는 판국에 당연히 내 대꾸가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르신만 고승이오? 우리의 ‘성철 큰스님(1912년 출생, 1993년 입적. 대한 조계종 7,8대 종정.)’도 고승이시라오, 그러니까 원하는 대답이든 아니든 알아서 해석하시구려..라는 도전적인 마음으로 나는 성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승은 여전히 가타부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또 침묵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다시 여유를 가지고 주변의 상황을 슬며시 살펴보았다.

훗~! 난리도 아니군.

우리 쪽, 특히 총관과 대청각주 및 부각주 등의 간부들 반응은 웃기는 것이, 도대체 저 늙은 중과 우리 곡주가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건가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가 내 시선이 가거나 옆 사람이 쳐다보면 즉시, ‘음.. 심오한 말씀들을 나누고 계시군. 과연 대단한 분들이셔~’라는 표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 식구들이야 그렇다 치고, 고화옥은 빠질 수 없는 자리에 초대받아가서 맛있게 밥 먹는데 옆자리에서 ‘어랏-? 콩나물국에 파리가 빠져 있네..?’라는 말을 들은 사람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저 여자 아무래도 성승을 여기 데려온 건 내게 호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닌 것 같지?

“꽃이 피는 순간 다시 지는 곳을 알고 있소..? 빈승은 하늘이 제자리에 섰을 때 그 곳에 갈 것이오.”

뭐야, 또 이상한 문답의 연속인가..? 연세도 많은 분이 창의력도 좋으셔라.

훗-! 그렇다면 나 역시 더 이상하고 말도 황당무계 한 대답을 해 볼거나..? 나도 입 열면 매우 뜻깊은(?) 말하는 것으로 알려진 ‘극악서생’이라구, 까짓 거…

“진시주, 빈승은 이만 물러가겠소.”

그럼 안녕히 가시.. 응..? 어-?

어라랏~? 갑자기 성승이 내게 합장하며 인사하는 바람에 나도 반사적으로 합장하여 답례하고 말았잖아?

진짜로 몸을 돌리고 가려고..? 이게 아니잖아..?

“어, 저, 잠깐만요.”

성승이 고개만을 조금 돌려 날 바라보았다.

난 그제야 이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나 싶어 잠시 주저했지만 만약 진짜 가는 거면.. 이게 뭐야?

내 집에 찾아온 점잖은 손님, 게다가 자그마치 130이 넘는 연세의 노인을 마당에 그냥 세워 놓았다가 보낸다고..? 나 진유준, 대한 민국 모범 청년이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기요. 기껏 오셨는데, 대접도 못하고..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실래요?”

지금까지와 달리 어눌해진 내 말투를 자각하며 이건 아니지..싶었지만, 그냥 보내는 건 내 자신이 더 용납할 수가 없어서 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래, 무슨 차를 주시려오.”

현재 내 처지에서 보면 분명 ‘적’이련만, 이 성승의 미소는 공연히 친근하고 정이 가는.. 부처상 같은 느낌을 준다.

“목밀(木蜜, 대추)차가 좋습니다.”

나도 모르게 최근 아플 때 자주 마신 대추차를 말했더니 성승은 대꾸 없이 예의 부처상의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성승의 수행인 듯한 어린 동자승(童子僧) 두 명이 먼저 그 뒤를 따랐고, 해남파의 고화옥은 한 타임 늦게 허둥지둥 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다소 황망한 기분으로 더 이상 부르지도 못하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서있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내 말에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더니만 뚜렷한 대답도 없이 그냥 가버리다니, 이 것도 선문답의 일종이야..? 아님, 혹시 저 스님 노망..?

“곡주님…”

어느 사이 흑주는 사라지고, 옆에 다가온 것은 총관이었다.

“성승은 비록 강호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랜 전대의 인물이기는 하나, 당금에 버젓이 생존하는 정파의 정신적 기둥입니다.”

총관은 내 속마음도 모르고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거물과의 대담에서 우위를 점하셨으니, 곡주의 신기는 참으로….”

나는 한 손을 들고 저어 총관의 말을 끊었다. 이 비화곡의 짱에 취임한 이후 온갖 감언이설.. 음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하여간 별의별 기상천외한 아부성 발언들을 많이 들었고 쬐금 익숙해지려는 참이지 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최소한 상대가 뭔 소리 한 건지는 알아야 내가 잘 한 건지 현상 유지였는지, 아니면 반타작(?)이라도 했는지 판단할 거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총관 이하 모든 이곳 식구들은 무조건 내가 한 말을 ‘옳다’고 해석할 테니 그 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고…

흠, 가만..? 톡!톡!톡!

“몽몽, 저기.. 성승과 고화옥 일행 보이지? 그들 간의 대화를 지금 증폭시켜 들을 수는 없을까..?”

[ 현재 거리 상으로는 가능합니다. 잠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응..? 그러지 뭐.

[ …평균적인 인간들의 음성 대역폭은 현재 거리에서도 증폭하여 대화를 청취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음성 파장을 변조했거나, ESP로 추정되는 특수 능력을 기반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이걸 죽여 살려..?

이 시러배 자식아! 당장 쉬운 말로 하지 못해..? 라고 고함을 치고 심정이었지만 꾸욱 참느라 이를 악물고 조그맣게 말했다.

“일단 녹화나.. 떠놔.. 알 것냐..?”

[ …차후라도 대화 해석에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놓겠습니다. ]

흐음..! 설마 내 음성에 가득한 분노(?)를 눈치 깐 걸까? 직접적인 명령 이외에도 추가로 더 하겠다니..?

…그러고 보니 또 느끼는 건데 몽몽의 반응이 갈수록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저 기분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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