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화
미래의 ‘통일 한국 로봇 제작 규칙’인가 뭔가에 의해 몽몽은 인간처럼 자연스러운 말투는 쓰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용자(나)의 신변에 중대한 위협이 닥쳐왔을 때는 더욱 딱딱한 기계음을 울린다고 했었다.
하긴… 노골적인(?) 기계음이 들려오면 좀 더 긴장이 되는 것 같긴 하다.
문을 통과한 다음 약 2미터 정도 앞의 왼쪽 벽면에는 아주 조그맣게 돌출된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서 한 곳을 지긋이 누르며 왼쪽으로 살짝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이 지하로 곳곳에 장치된 ‘죽음의 함정’, 군대식으로는 부비츄렙이 일제히 작동되어 지금부터 마지막 문까지 약 50여 미터 정도 걸어가는 동안의 공간이 그야말로 지옥의 입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몽몽이 보낸 ‘경고’의 의미였다.
역시 일반적인 무협지의 설정과 유사한 상황이지만… 실제로 눈앞에 이런 길이 놓여있으면 그 기분은 상상이상으로 더럽다.
안전장치를 걸어 놓은 상태라도, 만약 어디 한 군데 고장이라도 나서 오동작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군대에서의 안전사고… 그 처참한 사고들도 대부분 안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후….
드디어 마지막 문이다.
정면 바위 사이에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이 있는데, 이게 가장 쉽다.
문 옆의 구멍에 내가 목에 걸고 있던 군번줄… 아니, 극악서생의 명패를 밀어 넣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건 손으로 밀어 열어야 한다.
처음에 왔을 때는, 한참 서서 기다렸었다. -_-;;
이 문과 함정들의 장치도 무척 궁금하긴 한데, 몽몽의 스캔 기능으로도 전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귀찮아서 관뒀었다.
자아… 드디어 원판의 비밀서고에 도착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잡고 있던 대교의 손을 놓고 슬쩍 대교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예상대로 대교는 처음 보는 이 지하 공간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잠시 넋을 잃은 듯했다.
“흠, 흠..! 여기, 꽤 괜찮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좀 무서웠겠지만…”
“고, 곡주께서 인도해 주셔서 소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대교가 쑥스러운 기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럼 그래야지…’ 하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내가 되려 긴장해서 얼결에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눈치 챘으려나…?
나는 잠시 서서, ‘아까 두 번째 문에서 떠는 거 보니, 재도 무서워서 내가 겁을 먹었는지 어쩐지 눈치 깔 정신이 없었을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안한 다음, 이미 경험한 자의 여유를 보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곳의 구조를 대충 묘사하자면… 음, 아주 화려한 백화점이나 호텔의 로비 같다고 해야 할까?
당연히, 안 어울리는 비교일지도 모르지만, 이 지하 공간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입구에서 처음 전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그렇게 첫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음… 중앙의 작은 연못과 그 주변에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호텔 로비의 중앙 분수대와 매치되고, 지하 공간 여기저기에 살짝 솟은 장소들은 윗부분이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거기다가 테이블하고 의자를 세트한 다음 약간의 장식만 가하면 멋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의 분위기가 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대교가 넋을 잃은 원인인 천장을 올려다보면, 무지하게 높고 불규칙적인 표면 위에 무수한 야광 보석…?
하여간 놀라울 정도로 밝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무수히 박혀 이 넓은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신비로운 색채와 빛… 천장 전체가 환상적인 샹드리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정면과 좌측 벽면이 모두 10미터도 넘는 높이의 책꽂이로 이루어져, 본래의 ‘도서관’이라는 분위기도 빠지지 않긴 하지만…
음…
그리고 내가 그 살벌하고 짜증나는 과정을 밟아 이곳까지 온 가장 큰 이유는 여기가 이렇게 멋진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만의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몽몽의 최대 출력으로 이곳 여기저기를 스캔해 봤지만 정말 없었다.
밖에서는 내가 어딜 가든 그 주위의 어둠 속에 숨어있는 살수도, 그 밖의 어떤 자도 이곳에 만큼은 없는 것이다.
쭈뼛거리고 뒤를 따라온 대교를 연못 옆의 의자에 앉게 하고 나는 근처의 평평한 돌 위에 길게 누웠다.
으흐… 진짜 자유다…
………
해야 할 일을 조금 더 미루고 나는 그렇게 느긋하게 눈감고, 싱글거리며 얼마간을 그렇게 돌 위에 누워 뒹굴거렸다.
딱딱하고 서늘한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고 좋았다.
그러다가 문득, 대교에게 시선을 주니 그녀는 처음과 같은 자세로 내게 뒷모습을 보인 채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봐! 대교, 난 여기서 꽤 오래 있을 거니까, 심심하면 아무 책이나 꺼내서 봐. 음… 재미로 치면 저쪽의 ‘강호비사’ 같은 게 볼만 할 거야.”
응…? 대꾸가 없다…?
저 애가 왜 저래?
모야, 쟤가 내 말을 씹을 때가 다 있네?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던 그녀가 내가 다가서는 기척에 흠칫 놀라며 재빨리 소매로 눈가를 문지른다.
나는 장난치듯 고개를 불쑥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뭐야, 울었구나 너…”
대교는 그저 고개만을 정신없이 저었다.
아직 눈가에 흔적이 뚜렷한데도 발뺌을 하다니… 흠, 근데 왜지?
나는 공연히 멋적어서 뒷머리를 극적이며 말했다.
“대교야, 난 말야 오늘 조용히 혼자 생각할 것이 많아서 여길 온 거야. 널 데려온 건 음…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야후 장로가 일으킨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어쩌면 네가 필요할지도 몰라서… 그래서 데려온 거야. 여기까지의 얘기 중에서 네가 그렇게 슬퍼할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말하고 나서 멀뚱히 내려다보는 나를 대교는 정말 몰라서 그러냐는 듯한 표정에 애절한 눈빛을 합성하여 올려다본다.
촉촉이 젖은 눈으로 애절하게…
우씨..! 심란하게 왜 이러는 거야?
“소, 소녀는 최근 곡주를 모셨던 시간을 떠올렸을 뿐입니다. 소녀는 그 소중한 시간을 영원히… 설령 이 생명이 꺼진다 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봐, 이봐… 또 뭔 소리여.
“다만 곡주님이 강호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이대로 가는 것이…”
“정말, 미치겠군!”
내가 불쑥 짜증스런 소리를 내자 대교는 흠칫 몸을 굳혔다.
“야, 너 정말 이럴래? 내가 뭘…? 뭘 어쨌다고 뻑하면 찔찔 짜는 거냐? 응? 지겹게 얘기했잖아, 안 죽인다니까-!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마구 퍼부어 대는 나를 대교는 피하지 않고 올려다 보았다.
그런 대교의 얼굴에 그녀에게서 처음 보게 된 표정, 원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곳에 들어온 이상, 소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곡주께서는 이 곡에서 십 칠 년을 살아온 소녀가 그 것도 모르는 천치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어랏? 얘가 큰소리로 게기기까지…?
난 대교의 확신에 찬 음성에 조금 질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이지 말라고 해도?”
“…이 곳은 오직 비화곡주만의 공간입니다. 다른 누구도 이 곳에 들어오면 주살 하는 것이 곡의 철칙입니다. 누구도… 현 곡주님도 어길 수 없는…”
이 비화곡의 현재 짱, 왕땅(군대 은어 –;;)도 안 된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나… 아니, 원판의 명령으로도 안 되는 게 있었다고…?
톡! 톡! 톡!
“이봐 몽몽, 이 동굴 안에 그럴 정도의 비밀이 있어?”
길어봐야 1-2초 정도일 몽몽의 데이터 검색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단, 주인님 소속 단체의 인간 생명 존중도의 낮은 수치를 기준으로 보면, 이 여성의 죽음으로 기밀을 요할 만한 정보는 적어도 3248종으로 여겨집니다.]
“……..이 곳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내 명령도 통하지 않는 이유는?”
[이 단체에서 주인님 명령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전대로부터 내려오는 철칙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현 시대의 왕조 즉, ‘정부’와의 교류 금지. 두 번째, 현 장소의 출입자를 현 곡주와 후계자로 한정하는 것. 기록된 전례를 보면, 150년 전, 당시의 곡주는 그의 부인을 이 곳에 데려왔고 그 후, 그 부인은 살해되었습니다.]
뭐야,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새꺄! 너 한테 한 말 아냐!”
톡! 톡! 톡!
다시 통역하라고는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문에서 대교자매가 망설인 이유, 이 애가 두 번째 문에서 그렇게 공포에 떨었던 이유…
난 한 번도 그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쓰벌!”
욕밖에 안 나온다.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또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곤 해도… 병신같이,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따라온 계집애라니… 몇 마디만 했으면 됐잖아.
들어가면 죽는다고… 당신과 달라 난 죽으니까 따라 올 수 없다고…..
톡!.. 톡!.. 톡!
난 결국 다시 통역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교를 뒤로하고 달렸다. 그리고 공터 중앙의 작은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푸-하-!
엄청나게 차다. 온몸이 시릴 정도의 얼음 같은 물… 몸을 일으켜 보니 수면은 내 허리 정도의 높이였다.
그 상태로 나는 천장을 향해 두 손을 벌려 뻗으며 포효(?)했다.
“으아-아아-! 씨~팔-!”
본래 내 몸이 아니라, 목소리가 군대 시절만큼 안 나오니까 괜히 더 열 받는다.
“썅-! 뭐 저딴 게 다 있냐! 야! 대교, 너 미쳤냐? 내가 니 서방이라도 돼?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거야? 앙? 으이! 쓰벌! 충성을 해도 정도껏, 눈치껏 해야 할 것 아냐! 이 등신 같은 것아!”
난 대교가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말로 한참을 물속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발악했다.
풍덩!
뒤쪽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대교가 불쑥 눈앞의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대교 주위의 허공에 물방울이 환상적인 빛을 뿌리며 날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만 말문이 막혀서… 나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름다움을 나는 전에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진 상황은 그다지 환상적이지 못했다.
정신 못 차리는 내게 다가온 그녀는 한 손을 내 허리에 두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뛰어올랐다.
계집애가 힘도 좋지, 날 안고… 아니, 납짝 들고 수면 위로 날아오르다니…
우씨….
아무리 한 무술 하는 애라지만, 여자애한테 들려 물속을 빠져오는 기분은 그 물속보다 더 썰렁했다.
나는 날 내려놓고 내 앞에 엎드린 대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소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조금의 여한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뭐, 이딴 계집애가 있나 싶다.
이젠 울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제기… 어쨌든 한바탕 발광을 했더니 조금 마음은 가라앉은 것 같다.
좋아… 좋다구.
생각을 해보자. 이 애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그렇게 서서 잠시 머리를 굴렸지만…
쓰벌… 우선, 추웠다.
“우씨… 알아서 어련히 나올 텐데 뭐 하러 너까지 물에 뛰어든 거야?”
나는 투덜대며 지난번 왔을 때 알아둔 곳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대피소’로 쓰일 목적도 겸한 것인지, 한 구석에 비상 식량과 옷가지 등을 보관하는 장소도 있었다.
나는 그중 옷가지를 챙겨 대교에게 던져 주었다.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어떻게 하면 대교를 살릴 것인지를 고민했다.
모든 이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어도 그것만은 안 된다니…
쓰벌… 확, 다 죽여버려?
…
순간적으로 내가 원판보다 더한 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식한 게 더 무섭다더니…
으… 그나저나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
원래 여기 온 목적은 이게 아닌데… 저 야후 노인네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러 와서 이게 무슨…
…가만?
내가 본래 여기 온 목적은 대교 자매 중의 한 명을 골라서… 뭐 결국 대교 하나만 데려오긴 했지만, 하여간 대교 자매로 하여금 저 ‘냉화절소 장청란’을 상대시키기 위해서였었다.
그렇다면… 본래의 목적을 더욱 확대시킨다면…?
톡! 톡! 톡!
나는 비로소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 허리끈을 질끈 당겨 묶으며 몸을 돌렸다.
“대교,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널 살릴…”
으윽!
저 웬수, 먼저 날 심장 마비로 죽일 일 있냐?
젖은 옷은 어디 바위 뒤에라도 숨어서 갈아입을 것이지,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내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