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0화
어쨌든, 이윽고……
그 명성만큼이나 느닷없이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는 성승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내 감상(?)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되었다.
“거, 싱거운 양반이네.”
그래도, 최소한 성승이 엄청난 고수라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판단의 가장 큰 근거는 드러날 정도로 별다른 위협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흑주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흑주가 어떤 행동을 하건 그건 거의 99%(설마 지 볼 일이 1%도 없겠어..?)는 내 경호를 위한 것이다. 흑주가 내 눈앞에까지 왔었다는 건, 성승이 비록 겉으로는 비리비리한 체구의 늙은 스님인데다 무지 인자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만약… ‘내 개인의 명예보다 대악무도한 자를 없애는 것이 더 중하다.’ 어쩌고 하며 날 기습 공격했을 경우 흑주도 그 정도 가까이 있지 않고서는 막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무공만 봐도 참 대단한 분이긴 하다. 그 연세에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니……
난 총관에게 성승과 그 일행이 비화곡을 나가기 전까지 혹시라도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한 후 내 처소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대추차 한 잔 주문해 놓고는 좀 전의 일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두 번에 걸친 문답, 특히 두 번째의 의미는 나 자신도 전혀…라고 할 만큼 모르겠다. 그래도 성승과 주변 인물들은 알아서 좋게 해석해 버린 모양인데, 그건 날 골탕먹일 생각으로 성승을 데려온 것이 분명한 고화옥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로도 분명해진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근데 뭐…? 꽃이 피는 순간 다시 지는 곳을 알고 있냐고? 그리고 성승 자신은 하늘이 제자리에 섰을 때 그 곳에 갈 것이라고?
이건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난해하다. 뭐랄까 – 날 테스트 해 본 후, 그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말한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몽몽도 이런 거 해석은 쥐약인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해석 시켜 봤더니……
[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 불명. ]
이런 식이다. 제기-!.
그렇다고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딴 인간들은 모두 내가 이미 성승의 그 ‘오묘불가사의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그래서 더욱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곡주님!’ 이러는 상황이니……
에구- 관두자, 관둬. 아직 출발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남아있으니 그 안에 실마리를 잡으면 다행이고 아님 말고……
대교의 비화곡 복귀 예정일까지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다.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그 안에 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을 다시 따져 생각해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보니, 웬 낯선 여자들이 방안에 들어와 주욱 늘어서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랬나? 이 인원이 들어올 동안 몰랐다니.
“5일 간 곡주님을 모실 저 ‘양자경’ 이하 창천각(創天閣, 현재 내 거주지를 말함) 소속 시비들입니다. 성심을 다할 것이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귀엽게 봐주시길……”
양자경이라는 20대 여자가 가장 고참인 듯 대표로 인사하자, 나머지 소녀들이 깊게 상체를 숙인다.
음, 소교 이하 자매들 특별 휴가 기간 동안 대신할 시녀들인가 보다. 소교에게 대충 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하루에 한 명 꼴로 선발해 놓은 모양이다.
어-? 아니, 가만?
“한 명이 남잖아.”
“아, 전 이 아이들의 관리자로써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호오- 자넨 누구 시중들 군번이 아니… 하여간, 직책이 높은 모양이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전 이미 나이가 많아 귀한 분을 직접 모시기에 부적합하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소교 아가씨가 직접 선발하였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20대 초반 내지는 중반이 내 시중들기에 연령 과다라고? 그거야 이 동네에서 새삼스런 개념은 아니라지 만 그보다, 소교는 ‘질투’도 없는 아이인가? 자기들 없는 사이 이렇게 출중한 미모의 소녀들을 내 곁에 두도록 선정해 놓다니……
“뭐, 괜찮군. 다 맘에 들어. 하지만 며칠 동안 굳이 이 많은 인원 동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어때…? 자네가 혼자 5일 동안 내 시중을 들어주지 않을텐가?”
“그, 그런…!”
내 말에 처음엔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긴장하는 양자경.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도 좀 아깝긴 하다만… 기껏 익숙해 진 대교 자매들 말고 또 저런 소녀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며 옷 갈아입혀 주겠다는 둥 목욕 시중 들겠다는 둥 설치면(?) 강호 정세 공부하기, 비밀 여행 계획 짜기, 대교의 비무 전 최종 수련 준비 등의 일정을 진행하는 데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지금은 미소녀 군단 곁에 두고 기분 낼 상황이 아니다. 나 진유준,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안다.
“난 괜찮으니까, 다들 내 보내. 자네도 목밀차 한 잔 준비해 주고 자리를 피해 주겠나? 나 지금 생각할 것이 많… 아, 아니다. 자네는 잠시 머물러 줘.”
문득 생각 난 것이 있어서 자칭 노계(?) 양자경만 실내의 의자에 앉혀 놓았다.
어째 이름이 귀에 익다했더니, 이 여자 이름은 내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내 기억으로는 액션 영화 ‘예스 마담’ 시리즈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007 시리즈’에서 본드 걸로도 등장한 홍콩 액션 여배우 이름도 ‘양자경’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 양자경도 우리 시대의 예스 마담과 외모부터 닮은 구석이 있는 걸? 아름답지만 선이 뚜렷하고 남자 못지 않게 강인한 구석이 엿보이는 그런 분위기.
“이봐, 혹시 말이야. 내가 가까운 날에 강호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듣지 못했습니다. 곡주님의 행보는 저 같은 말단이 알 수 없는 사항이므로…”
“흠, 그래? 역시 한 번 깨지고 나니까 ‘보안’이 좀 되는구만.”
나는 지난번에 야후 장로, 총관, 월영당주 세 명에게 정보 유출에 대한 대가로 내린 금제를 떠올리고 혼자 비직 웃었다.
“…실은 난 말야, 이번 강호행 만큼은 그 어떤 사람이나 세력과도 말썽 없이 조용히 치르길 원해. 그 일 때문에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으고 있는 중이지.”
“서, 설마. 천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겁니까…?”
양자경에게 나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도록 노력하며 웃어 보였다.
“현재 지위는 중요치 않아. 난 누구의 생각이라도 괜찮으면 쓸 예정이고, 뭐… 때론 이런 방식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 말야.”
“그, 그렇지만, 제가, 천녀의 얕은… 그, 그게……”
무지 버벅대는 구만. 하긴, 나도 만약 한 일병이나 상병쯤 달고 있을 때 대대장님 집무실에 끌려가(?) ‘이번 공비 소탕 작전’은 어떻게 진행했으면 좋겠는가. 자네의 의견대로 작전 지역에 특공 요원들을 투입할 생각이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면 저렇게 황당하고 말도 잘 안 나오겠지……?
“그렇게 알고 생각나는 의견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아- 이거, 기밀이라는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양자경, 이 여자… 하도 당황해 하고 쫀 모습이라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만, 또 아나? 상위 간부들보다 이런 비화곡의 실무자들, 실질적인 행동대장(?) 격의 인물들에게서 뜻밖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나는 혼자 있고 싶다고 하여 양자경까지 내보내고 난 다음 혼자 대추차를 홀짝이며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너무 낮은 쫄다구들에게까지 물어 보면 소문 단속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양자경 전에는 혈랑대 백인장 황성과 십인장 백상에게만 말해 두고 기본적으로는 ‘강호 비밀 여행 아이디어 공모 자격’을 부당주급 고급 간부들로 제한해 둔 상태이다.
근데… 아직까지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 공모 시작한 것이 약 4개월 정도 전인데 첫 의견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저희 폭풍당에 맡겨 주십시오.”
단순무식초저돌터프가이집단의 짱, 일명 폭풍당의 당주 상관마가 제일 처음 나섰다는 거 자체를 신기해 하며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었다.
“6개월 전 저희 폭풍당 인원에 다소의 손실이 있어 최근까지 인원 보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알지.”
내가 오기 전 일이지만 나도 알고 있는 것이, 말이 다소의 손실이지 폭풍당은 그 때 거의 괴멸 직전이 될 만큼 큰 사고를 겪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비화곡처럼 정통(?) 마도가 아닌 세외(世外)의 조직 중 하나이며 대막(大漠)의 최고 세력과 대책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서 맞짱 뜨다가 당한 일이라고 했고… 뭐, 어쨌든 상관마의 얘기에서 중요한 건 그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최근 보충된 인원은 아직 폭풍당 고유의 무공과 전술이 몸에 배어 있지 않습니다. 즉, 비화곡 소속의 특성이 없다는 뜻이지요.”
자신에 찬 상관마의 설명을 여기까지 들었을 때부터 조금 불안하긴 했다.
“그러니, 이들로 하여금 곡주께서 강호에 나서기 직전에 큰 사고를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몇 군데 치고 씨를 말려서 정파 놈들의 혼을 빼놓으면, 곡주께서 소리 소문 없이 외출하시는데 큰 도움이……”
“…그만하고, 나가 줄래?”
상관마가 맥주로 라면 끓여 먹은 표정이 되어 물러간 다음 날, 폭풍당의 부당주가 자진해서 직위를 반납했다고 하고… 그 이후로는 그 부당주가 가경촌 술집을 여기저기 전전하는 주정뱅이가 되었다는 소식으로 보아, 아마 그가 본래 상관마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장본인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