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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81화


상관마 다음으로 온 것은 뇌제(雷帝) 단목상이었다.
마극파천대… 폭풍당 만큼 단순무식은 아니더라도,
거의 항상 전투의 선두에 나서는 돌격대인 마극파천대의 주인이었다.

“곡주님을 가장한 가짜를 몇 명 내세우는 겁니다.”

아무래도 상관마보다는 좀 나은 듯 했지만 상관마처럼 단목상도 애초의 요점에서 핀트가 어긋나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조금 더 들어보았다.

“같은 날 같은 규모의 호위대도 배치해서 출발하면 적들도 혼란스러울 것이고 곡주께서는 그 사이 그들과는 다른 은밀한 경로로 움직이시는 겁니다.”

“난 몰래 가니까 그렇다 치고… 그럼, 드러내 놓고 가는 가짜들에게 적이 습격해 오면?”

“그야, 평소의 곡주님 호위 때처럼……”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단목상은 말끝을 흐렸다.

“나 하나 조용히 갔다오면 뭐해. 가짜들 쪽으로 오는 쪽은 다 죽인다는 거 아냐.”

“……………”

“…가서, 상관마 당주하고나 어울리게.”

상관마와 단목상의 실패를 거울 삼아 다른 간부들은 조심스러워진 듯, 다음 타자로 한 간부가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넘게 지난 후였다.
비화곡 최고의 섹시우먼 취음란 각주. 그녀는 언제나처럼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었다.

“여인이 되어 보시는 건 어떠 신지요.”

여장을 하고 나가라는 건가?
흠-! 별로 내키는 얘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내 말의 요점인 ‘되도록 몰래, 어쨌든 말썽 없이’ 개념에는 들어가는 얘기여서 일단 들어보았다.

“곡주께선 저희 같은 여인네들도 질투심이 느껴질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타고나신 데다 체형도 여장에 무리가 없으니 특별히 인피면구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불쾌하다는 거였지만, 그래도 더 들어보았는데 비취각주의 다음 말들이 썰렁했었다.

“후후- 실은 곡주께서 전에 진회루에서 주흥이 오르신 끝에 시중들던 아이의 옷을 걸치고 가무를 즐기셨던 일이 기억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곡주께서는 그 때 참으로 아름다우셨답니다. 절세가인이란 말이 부족하다 느낄 만큼…”

원판 놈. 술을 쳐 먹으려면 곱게 쳐 먹을 것이지. 여자의 옷을 뺏어 입고는 춤추고 난리였단 말인가… 하고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모르셨겠지만… 실은 그 당시에 진회루 부근을 지났던 간부들이 여럿 저를 찾아 왔었답니다. 진회루에서 춤추던 절세의 미녀를 다시 보고 싶다고… 어떤 이는 그녀(?)의 침실을 가르쳐 달라고 제게 뇌물을 주기까지 했었답니다. 호호홋-!”

이런, 썩을-!
지금도 여자도 아닌 남자들이 날 보며 침을 겔겔 흘리는 장면이 연상되면 닭살이 투두둑, 돋는다.
누굴 이상한 방법으로 잡을 일 있냐?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나보고 여장을 하고 밖에 나가라고…? 너 죽을래?

“그건… 다소의 문제가 있겠구먼. 다른 의견은 없나?”

에구- 역시 난 여자에게 너무 약하다.
결국 난 취음란 각주를 제대로 야단치지도 못하고 내보냈었다.
그 후로도 그다지 쓸만한 아이디어가 나오지는 않더니만 지난번에 나 좀 아프고 난 후로는 아예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극악..’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가혹행위(냉수욕)를 한 후에는 잘 못 걸리면 죽는다…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혈랑대의 황성과 백상… 이곳 창천각 시녀들의 중간보스 양자경… 이 중에서도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으면 천상 내가 직접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은데 골치 아프게 되었다.
후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벌써 해가 져 버렸군.
대교…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설마 어디서 처량 맞게 야전식량 먹으며 떨고 있거나 졸려 죽겠는데 억지로 야간 결투를 벌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대교에게, 날씨 험할 때는 나돌아다니지 말고 뜨듯한 방에서 책이나 보고, 해지면 업무(?) 끝내고 쉬어라…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너무 과보호가 되려나……?
에구… 무심한 달만 덩그라니 떠서 나와 눈싸움(?)하는 심란한 밤이로다.

—————————

늘 함께 하던 소교 이하 자매들이 주위에 없어 허전하긴 했지만, 고참답게 상당히 안정된 룸서비스(?)를 제공하는 양자경 덕분에 별 불편함이 없었던 며칠이 지났다.

“이제 곧 아가씨들이 돌아오시겠군요. 곡주께서 그토록 총애하셔서 그런지 아가씨들은 날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허구 헌 날 창가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 소교 자매들 보고싶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지 양자경이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험, 벌써 그 애들이 돌아 올 때가 되었나? 오랜만에 식구들끼리 잘 지냈나 모르겠군.”

사실 내가 멍해있던 시간은 대부분 앞으로의 일들 진행할 걱정하느라 그런 거지만, 달리 변명이든 설명이든 하기도 뭐해서 그런 정도로 대꾸해 주었다.

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자매들 중에 오랑이 띠가 있나? 창가에서 연초를 피우고 있던 내 눈에 소교와 두 동생들이 본단 입구 방향의 건물들 사이에 서 모습을 드러내 이 편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왼쪽부터 나란히 소교, 소령, 미령이 순으로 걷는 자매들은 거의 항상 복장 색깔 배열도 같다. 백의(白衣)의 소교, 청의(靑衣)의 소령, 홍의(紅衣)의 미령.

어랏-? 근데 소교 옆의 저 흑의(黑衣) 사내는……?

이런, 그냥 곡 내의 직원(?)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자매들의 아버지 사영 무영이 아닌가. 내가 언제고 놀러와서 술 한잔 하자 했더니 벌써 왔나?

얼마 후, 방안에 들어 선 사영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매우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해왔다.

“소인 무영이 곡주께 인사 올립니다.”

“후후- 사영 선배가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좋은 술을 준비시켰을 것을……”

내가 자신을 ‘선배’라고 칭하자 사영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곡주께서 이렇게 환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 며칠, 아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거한 아이들에게 잘 대해 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한 잔 대접할까 합니다.”

사영의 말이 끝나자, 소교가 두 개의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았고 소령이와 미령이는 안주 접시를 늘어놓았다. 아예 안주도 집에서 직접 해 온 모양인데, 척 보기에도 정갈하고 정성 들인 요리들이었다.

훗-! 역시 뭔가 통하는 술 친구로군.

난 며칠 만에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았고, 지난번처럼 우린 별다른 말 없이 권커니 자커니 몇 잔의 술을 나누었다. 술맛은 예상보다도 좋고 안주도 입에 맞는다.

근데, 기분 탓일까? 이 남자 사영… 어째 며칠 전에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진 기분이 드는 걸? 고승처럼 달관한 듯한 표정은 여전하지만 뭐랄까, 낯 술에 취해 살아가는 자의 느슨함이 사라져 있다고 할까……?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곡주께선 천하의 성승을 상대하셨지요?”

지나가는 말투로 사영은 그렇게 물었다.

“뭐, 몇 마디 나누기는 했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소.”

“재미가 없다,라… 후후- 그와의 만남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천하를 다 뒤져도 곡주뿐일 것이오. 음… 소문은 간혹 들었습니다만, 그 노 괴물은 여전히 공력이 높던가요?”

당대 최고 고승과의 만남을 재미가 없었다고 한 내 표현이 특이한 것처럼 말하면서 자기는 한술 더 뜨는 군. 그 성승에게 ‘노 괴물’이란 호칭을 쓰다니……

“예전에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우리 비화곡의 장로들 이상인 것 같았소. 노익장도 어느 정도지 원……”

몽몽으로 측정한 성승의 내공 수치를 떠올리며 말해 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영이 오늘 날 찾은 건 바로 성승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교, 제 딸아이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소교는 저에게 곡의 기밀을 누설했습니다. 곡주께서 곧 강호에 나가실 거라는 사실을.”

이런 제기,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구만.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갑작스런 부탁, 아니 요구를 들은 기분은 좀 황당했지만 그 ‘이유’가 더 큰 문제이다.

“…그거 혹시, 성승 때문에…? 설마 과거의 유일한 실패를 이제 와서 만회해 보겠다는 거요?”

사영은 대답을 미룬 채 천천히 술잔을 기울인다. 우쒸-! 이 아저씨 이거 오늘 왜 이래?

“당신은 이미 은퇴한 몸이오. 게다가 20년이 넘게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왜… 아니, 다른 건 다 젖혀 놓는 다 해도!”

나는 어영부영 반응하면 안 되겠다 싶어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17년 전 당신 스스로 이 비화곡에 들어 왔을 때, 최고 살수로써의 자부심, 일신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은원까지도 사라진 거요. 그걸 다시 찾고자 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기껏 심각하게 말하는 중에 말을 끊어? 우쒸-! 대교 자매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술 친구고 뭐고 확~!

“그냥, 말입니다. 그 잘난 성승의 턱수염이라도 싹둑 잘라 주고 오렵니다.”

농담하듯 싱글대고 웃으며 말하는 사영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영은 내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짧아진 곳과 맞추려면 다른 곳은 스스로 잘라내야 할 것이고… 그런 성승의 얼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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