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4화
내가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기운 없이 웃어 보인 것을 자매들은 ‘다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자 우리.’라는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비틀, 옆으로 기울어지는 소교를 소령이가 부축해 안았다.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소교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니?”
“소, 소녀… 괜찮……”
제대로 대답할 정신은커녕 소교는 소령이가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상태였다. 자매들 중 가장 가냘픈, 미염당의 고리라 당주 못지 않은 남자의 보호본능 자극 촉발 자태의 소교가 충격을 받아 반쯤 기절한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내가 죽일 놈이지-‘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소령이가 소교를 처소에 데려다 줘.”
“아, 아닙니……”
“아무 말하지 말고 가서 쉬고있어. 소령이 넌 오늘 계속 소교 옆에 있고.”
서있기도 힘들어하는 소교를 내보내고 난 후, 나는 대청각에서 심란한 마음으로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으- 제기, 하필 왜 거기냐 그래.
이 역사 깊은 비화곡 내에는 그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아무도, 심지어 현 비화곡주조차 모르는 정체불명의 장소가 몇 군데 생겼다고 한다. 대교가 있었던 지하 성지의 비밀 통로가 유일하게 거길 알고 있었던 전 비화곡주가 후계자에게 위치를 전수하지 못하고 죽어 실전된 것처럼 절혼무저갱도 몇 가지 사연에 의해 내부구조를 아는 자가 곡 내에 없었다.
절혼무저갱이 만들어진 것은 약 500년 정도 전.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은 인재 양성…이랄까? 수많은 살인 함정을 돌파하는 훈련으로 무공 증진은 물론이고 정신력을 강화하는, 비화곡의 ‘유격 훈련장’ 정도의 개념으로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그런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버린 건 순전히 당시 공사를 담당했던 자의 성향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 절혼무저갱 설계자이며 준공 공사 책임자였던 자는 ‘마병신(魔兵神) 이소모’란 작자였는데 다음은 내가 상상해본, 당시의 비화곡주와 마병신 이소모의 대화 내용이다. 때는 절혼무저갱 완성 후 7일이 지난 시점……
비화곡주 : (거대한 동굴 앞에 서서 대견하다는 듯) 음 – 이 것이 바로 그 지옥의 출구인가? 절혼무저갱이란……?
이소모 : 그러합니다, 곡주님. 저 위의 입구로 7일 전 1차로 선발된 마도의 젊은 기재들 총 300명이 입갱하였고 다시 3일 후에는 2차 선발진 600명이 투입되었으니, 빠른 자라면 오늘쯤 저 입구로부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비화곡주 : 흠~! 최근 정파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정파 놈들이 이번 황제의 원정에 참가하여 살아 돌아온… 실력과 정신력이 강한 전사들을 주축으로 비약적으로 세력을 늘리고 있는 지금. 우리 마도는 너무 오래 평화를 누려왔어. 젊은 마도인들의 정신력이 너무 약해졌단 말일세.
이소모 : 그렇습니다, 곡주님. 제가 젊었을 때 비하면 요즘 젊은것들은 지 밖에 모르니… 지들이 편히 먹고 사는 것이 다 우리 구세대 마도인들이 이룬 ‘양자강의 기적’이거늘……
비화곡주 : 험, 이럴 때일수록 자네와 나 같은 지도자들이 더욱 모범을 보이고 지도해야 할 것이네.
이소모 :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비록 요즘의 젊은 신세대 사마외도인들이 이기적이고 나약하다고 하나, 이 절혼무저갱에서 극기의 훈련을 쌓고 나면 틀림없이 강인한 정신력과 곡과 곡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진 최강의 병사들이 될 것입니다.
비화곡주 : 허허~! 빨리 보고 싶구먼. 재탄생된 우리의 젊은 용사들을……
이소모 : 천천히 기다리시지요. 저기- 저 그늘의 좌자에서 한잔하시면서.
비화곡주 : 아닐세. 우리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데 서서 기다리는 것쯤이야, 별거 아닐세.
이소모 : 오오- 역시 곡주님은 위대한 이 비화곡의 주인이시며……
비화곡주 : 되었네. 그보다… 입구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네. 약 50여장 정도 거리로군.
이소모 : 음, 전 곡주님의 공력을 따르지 못하여 잘 모르겠지만 드디어 역전의 용사로 재탄생된 기재들이 도착할 모양이군요.
비화곡주 : …근데, 비명소리가 난무하더니 인기척이 사라졌네.
이소모 : 저런-! 마지막 함정을 피하지 못했나 보군요. 끝까지 방심하지 말라고 가볍게 설치한 살무진(殺霧陳)이었거늘……
비화곡주 : …지금 뭐라고 했나? 살무진?
이소모 : 그러합니다, 곡주님.
비화곡주 : 칠보단혼사(七步斷魂蛇)의 독으로 독연(毒煙)을 만들어내는 그 살무진……?
이소모 :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 곡주님은 식견이 높으시군요.
비화곡주 : 그건 지난 번 보고서에는 없었지 않나? 아니 그보다 그 살무진을 가볍게 설치……?
이소모 : 곡주께서 소신껏 진행하라고 하셔서, 제가 임의로 몇 가지 더 보강했습니다. 일단 함정의 배치를 더 엄밀히 하고, 추가로 살무진과 귀절진, 홍수진, 마음뢰파진 그리고……
비화곡주 : 훈련 중지.
이소모 : 예……?
비화곡주 : 애들 다 잡을 일 있냐~? 그게 훈련코스냐, 사형 코스지?
이소모 : 중지… 안되는 데요?
비화곡주 : 뭐?
이소모 : 그게… 각각의 기관들 간의 연계 설계가 힘들어 그건 다음으로 미루어… 지금은 전부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비화곡주 : 이 병신 같으니!
이소모 : 저… 전 마병신인데……!
비화곡주 : 죽엇~!!
퍼버버벅~!!!
설마 진짜 위와 같은 대사가 오고갔겠는가 마는…
그 마병신 이소모란 자는 당시의 비화곡주가 한 말,
‘지옥도를 헤치고 살아 남는 최고의 전사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자기 식으로 과다 해석, 정말 지옥을 설계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 때 절혼무저갱에 들어 간 젊은 마도인들이 총 900명인데, 생존자 없음. 즉, 전멸이었다고 한다.
그 후 마병신 이소모는 처형까지 거론되었으나 그 때까지의 다른 실적을 감안하여 지위 박탈로 끝났다고 한다.
그 때부터가 또 문제인데, 이소모는 그래도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여 ‘폐기판정’이 난 절혼무저갱에 스스로 들어가 지금까지(500년 후) 나오지 않고 있단다.
이소모는 당근 그 안에서 이미 죽었겠지만 그 전에 기관 장치를 어떻게 변경하고 손을 봐 놓았는지, 호기심으로 곡에 남아있던 그의 설계도를 들고 들어가 봤던 몇몇 고수들도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나마 그 설계도조차 유실된 지금… 결론은 대책 없음, 이었다.
“역시… 사영을 말리는 수밖에 없나?”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으로써는 절혼무저갱을 무사히 들어갔다 나오는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곡주님께는 송구스런 말씀입니다만… 소교 언니 말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결정한 일을 누가 하지 말란다하여 그만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혼자 남은 미령이가 약간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래……?”
“고집불통에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예요.”
“…넌 어째 아버지하고 별로 안 친한 것 같구나.”
“아버지가……”
미령이 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여서 슬쩍 눈치를 보니 미령이는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절 싫어하니까요.”
자신의 아랫입술을 꼬옥 깨문 미령이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영이 널 왜 싫어해?”
“그건… 그건 제가… 어머……”
“허헛! 곡주께서 아직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으윽! 갑자기 야후 장로 특유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오는 바람에 뒷 얘기를 못 들었다. 이런 제기! 아까도 고춧가루 뿌리더니 또……!
“대청각주와 술 한잔하려고 하는데 같이 자리하시겠습니까?”
“됐소. 이만 돌아갈 참이었소.”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갑자기 머리 속으로 이상한 음성이 울려왔다.
< 껄껄-! 곡주의 걱정거리는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니…… >
뭐, 뭐야 이거? 야후 장로 음성인데 왜 이렇게 들리는 거지? 마치 몽몽이 말하는 것처럼 머리 속에 직접……
당황한 내 눈앞에 몽몽이 제공하는 영상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화살표 하나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야후 장로의 머리 위로 이동했고 화면(내 시각 범위) 아래쪽에 문자 메시지가 새겨진다.
[ 이 시대 특수 의사전달 수법. 전음밀법(傳音密法), 전음입밀(傳音入密), 천리전음(千里傳音) 등 다양한 명칭이 존재 함. ]
…그렇군. 야후 장로가 내게 몰래 전음을 보낸 거구나. 그런 수법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동안 내게 직접 쓴 사람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무지 놀랬다.
< 이제까지 절혼무저갱에 들어 살아 온 자가 없으니 제아무리 혈의문 출신의 특급 살수라 한들…… >
이어지는 야후 장로의 전음을 나는 걸어나가려던 애매한 자세로 들어야했다. 미령이는 옆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야후 장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 헌데, 그 사영이란 자… 꽤나 주제를 모르는 자인 모양이오. 아무리 자신의 딸들이 곡주께 총애를 받는다 하여 곡주를 귀찮게 하다니…… >
나는 전음밀법인지 전음입밀인지를 쓸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직접 대고 물었다.
“무슨, 소리요. 그게……?”
< 헛헛~! 미령이는 아직 공력이 낮아 제 전음을 알 수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곡주께서 사영을 없애고자 하는 뜻에 장로들도 모두 동참하였으니…… >
이게 정말 뭔 소리여? 내가 사영을 뭐 어째?
< …이제 곡주께서 그런 자를 상대하며 언성을 높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
“어제… 들립니까? 야후 장로 계신 곳까지?”
< 어제 전 마침 창천각 앞을 지나고 있었지요. 뭐, 사영에게 말씀하시는 내용까지는 잘 못 들었지만……>
….이런 제기, 그게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서로도 마음 안 맞고 곡주인 내 의견도 무조건 수용하지 않던 장로들이 새삼 만장일치로 오늘 결정을 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저 야후 장로가 다른 장로들에게 ‘곡주가 어제 총애하는 자매들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는 것 같더라. 핑계를 대서 사영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다.’식으로 얘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장로들이 ‘까짓 거, 우리와 관계도 없는 사적인 일인데 밀어 줍시다.’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던 모양이다.
나는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야후 장로에게 물었다.
“혹시… 염장 지른다는 말, 아쇼?”
“예? 염장…? 그게 무슨……”
“됐소. 난 이만 가보겠소.”
미치겠네, 정말-! 저 노인네 왜 시키지도 않은 과잉 충성을 하고 난리야. 가뜩이나 심란한데 진짜 염장 지르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