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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87화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방법을 몽몽에게 제시했다.
몽몽은 로봇답지 않은 매우 비협조적인 태도로 거절했지만,
나는 몽몽을 한참 협박(?)하고 달래고 하여 결국 몽몽이 내 뜻을 따르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후우~ 이제 대교만 오면 된다. 대교만……

모든 준비를 마쳐 가는 중에 드디어 대교, 아니 첫 강호출도에서 수많은 정파의 고수들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마봉후의 후인 마봉낭자 대유화(대교가 스스로 지은 가명으로 청명신니의 출가 전 이름 유화를 인용한 것이다.)가 돌아왔다.
비취각주가 준비한 환영회 이전에 곡 전체가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보고를 받자마자 가경촌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가경촌이 본래 사람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오늘은 다른 마을에서도 모조리 구경을 온 모양이다.
큰 길 중앙은 마을 관리 무사들이 통제해 비워 놓았으나 길 양쪽에는 올림픽 대표 환영 인파를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몰려있다.

자세한 일정은 극비로 분류되어 있지만 기본적인 사항, 즉 화천루의 주인인 장청란과 우리 측 마봉낭자의 비무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공식적으로도 발표된 상태이다.
그런 중에 우리 측 대표선수인 마봉낭자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니 군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얼핏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로 보아 지금 대교는 메이저리그에서 30승 정도 거둔 박찬호,
혹은 우승컵 10개 정도 들고 귀국하는 박세리 정도로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

후후- 그 매니저 격인 나도 공연히 으쓱해진다.
나중에 비무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날이면 거의 월드컵 우승팀 환영하는 분위기이겠는걸……?

“곡주님, 언니… 아니 마봉낭자께서 오십니다.”

소교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누구라도 알 수가 있다.
저 멀리에서 대교와 그 수행원들의 모습이 채 보이기도 전부터 환영인파의 고함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으므로.

“오오- 마봉낭자다!”

“과연 소문대로의 자태로다.”

“요 한달 동안 그녀의 발아래 쓰러진 정파 고수들의 수가 자그마치 100명이 넘는데.”

“얼굴,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가 저 것 좀 치워 줘.”

“마봉후의 후인, 아니 그 분의 부활이야.”

“아- 저 우아한 걸음걸이를 보라구.”

“꺄아-! 너무나 멋진 분이셔.”

훗-! 어느 시대나 인기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군.
근데 한 달 동안 100명을 쓰러뜨려? 누가 그런 과장된 소문을 퍼트린 거지?
내가 지정해 준 상대는 고작 26명인데 말야.
…그나저나 제기, 뭐라고 첫 마디를 할까.
며칠 전부터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멋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반갑다는 표현을 해야 할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기다렸는지 대교도 알고 있을까?

…온다, 차츰 내게로 다가온다.
기분 탓인가? 점점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고 내게 걸어오고 있는 대교만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한 발 한 발… 드디어 내 눈앞에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곡주님.”

얼굴을 가린 면포 위의 두 눈이 반달형으로 가늘어지며 대교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마치 친구 만나러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온 아이처럼……

막상 만나니까 머리 속을 오가던 별의별 말들은 한 순간에 포맷되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 것뿐이었다.

“…그래, 잘 돌아왔다.”

그렇게 달랑 한 마디씩 하고는 멍하니 서로를 마주 보고 선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도 못했고 듣고 싶었던 말 아직 듣지 못했는데 그런데 모두 주고받은 느낌……!

“와아아~!”

갑작스런 주위의 환호성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봉낭자와 그 매니저(?)인 나를 연호하는 소리들……!

“가자. 얘기는 천천히 듣기로 하지.”

우리는 무수한 군중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본단으로 돌아왔다.
환영회는 그 때부터 시작인 셈이어서, 대교는 비취각에서 간부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주고받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당주급 간부들도 곡주인 내가 직접 키웠다는 이 신진 여 고수를 높이 평가했는지 서로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술자리에서 왕따 당했다.

대교와 내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연회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내 처소에 들른(이제는 손님이니까.) 대교는 먼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곡주님. 전보다 신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소교에게 듣자니 많이 편찮으신 일이 있었다고……”

“지금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이제 얼굴 좀 보여줄래?”

면포를 치운 대교의 아름다운 얼굴을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교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갑자기 풀썩, 맥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곡주님……?”

“아냐… 그냥, 웬지 이상해서 그래.”

“그렇…습니까? 곡을 떠나있는 동안 전혀 가꾸지 못 해 그럴 것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니 얼굴 계속해서… 항상 생각해 왔는데 막상 지금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아서 그래. 지금도 뭐랄까… 웬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곡주님……”

특별히 분위기 잡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어째 대교는 상당히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 난 돌아 온 대교를 확인하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매만지며 물었다.

“정파의 고수들을 상대하고 다니느라 그 동안 힘들었겠구나. 다 내가 무능한 탓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곡주께선 제게 새 생명을 주신 데다 마봉낭자라는 분에 넘치는 신분까지 주셨는 걸요.”

대교는 잠시 기억을 되새겨 보는 표정이더니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곡을 떠나 곡주께서 지정해 주신 고수들을 상대한 일… 그리 힘들지 않았답니다. 저도 제 무공이 그 정도로 성장했는지 실감할 수가 없어서 처음엔 실수도 많았지만… 실은 그래서 그만 제일 처음 만난 황보세가(皇甫世家)의 고수를 상대할 때는 상대에게 지나친 모욕을 주고 말았답니다.”

“지나친 모욕……?”

“예, 그 사람은 이미 지닌 바 모든 재주를 펼쳤음에도 저는 자꾸 부탁했거든요. 제발 진짜 실력으로 절 상대해 달라고……”

“하하하-!”

광경이 눈에 뻔히 보인다. 상대 입장에서는 얼마나 썰렁했겠는가. 전력을 다해 싸웠는데 어린 소녀 하나 이길 수 없었다면 그 것만으로도 돌아버릴 기분이 들었을 텐데 그 어린 소녀가 ‘에이-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해봐요-!’라는 식으로 염장을 지른 셈이니 말이다. 대교는 생각나는 그런 식의 에피소드를 몇 가지 더 들려주며 즐거워했다.

[주인님, 말씀하신 한 식경이 되었습니다.]

응…? 벌써?

뭐야, 이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것 같은 데 벌써 시간이 되었나? 내가 아쉬운 표정으로 대교의 손을 놓자 대교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본다.

“곡주님? 제 이야기가 재미없으십니까?”

“아, 그게 아니고… 이 이상 내 처소에서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 아무래도 남들의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그래.”

“그, 그건……”

“지금의 넌 예전의 대교가 아니야. 비화곡을 대표하여 화천루의 루주와 자웅을 겨룰 마봉낭자가 곡주와 수상한 관계라고 하면, 그럼 네 전력에 흠집이 될 뿐이지.”

“그런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어찌 그런 일을 말씀 하십니까.”

“나도 너와 더 있고 싶어. 하지만… 이 건 나중에 네가 장로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때도 중요한 거야. 우리… 조금 더 참자.”

“곡주님……”

…썩을! 기집애! 자꾸 그런 눈으로 보지마. 맘 약해지게 스리!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대교를 내보내고 나서 나는 침상을 쥐어뜯으며(?) 한 동안을 괴로워했다. 아쉽다. 무지막지 아쉽다. 밤새워서라도 얘기하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는데… 으으~ 제기, 며칠 만 더 참자. 며칠 만……

대교 복귀 후 며칠이 지났다. 마봉낭자 대유화로 행세하느라 동생들과도 서로 모른 체해야 하는 것이 보기가 안쓰러웠지만 자매들은 생각보다 잘 적응하여 행동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동안 남몰래 연습이라도 한 거 아닌가 싶었다.

총관이 내 지시로 찾아 제시한 장소는 본단으로부터 약 10KM 정도 떨어진 숲이었는데, 거목들이 몇 KM에 걸쳐 우거져있고 또 숲의 북쪽 방면은 이 비화곡 내 안전지대의 끝이었다. 그 방향은 비화곡을 둘러싼 죽음의 진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나는 혈랑대와 마극파천대를 총동원하여 북쪽을 제외하고 숲으로 들어서는 다른 모든 루트를 막아 버렸다. 군대 연병장 몇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숲을 확보한 나는, 그 곳으로 우선 대교와 동생들을 대동하고 들어갔다.

“대교는 비무를 위한 최종 수련을 하기 위해 당분간 나와 이 곳에 있게 될 거야. 소교와 동생들은 앞으로 외부와의 연락, 그리고 식량 운반을 맡는데… 삼일 간격으로 오도록 해.”

내 지시를 받는 소교 이하 자매들의 표정은 다소 긴장이 되어있긴 했지만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 큰언니 대교의 무사한 모습과 엄청난 지위 격상을 직접 겪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친 김에 몇 시간 정도 자매들끼리 밀린 재회의 시간을 주고 나는 근처 나무위로 기어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음… 살펴본다고 했지만 내가 오를 수 있는 높이에서는 상세한 지형 파악이 안 되는 군. 오기 전에 지도로 살펴 본 것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막상 진행하다 보니 처음 총관에게 지시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반경 1KM에 가까운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 같다. 경치는 그저 그렇고 그냥 말 그대로 계속 나무들 밖에 안 보인다. 근처에 큰 산이 없어 내려다보일 리도 없고… 확실히 비밀스러운 일 꾸미기에는 괜찮은 장소인 듯싶다. 이 넓은 지역을 지키느라 동원된 혈랑대와 마극파천대는 당분간 뺑이 좀 치겠지만서도……

“곡주님, 그럼 사흘 후 다시 뵙겠습니다.”

오후가 되어 소교가 대표로 인사하고 자매들이 모두 떠난 후, 나는 대교를 앞에 앉혀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대교… 미리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착용시키는 건 널 최면상태로 빠져들게 할 거야. 넌 이제부터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에서 장청란을 만나게 될 거야. 모두 내가 만든 환상이니까 놀라지 말고… 정말 장청란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환상과 싸우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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