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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90화


  • 90 –

“물론, 곡주님께서 행하신 것이니 어찌 틀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장청란과의 비무는 아직 한 달이 넘게 남아있습니다.”

그걸 만든 사람은 2000년 전의 기인으로써, 기계신마(機械神魔)라 한다…는 무협지식의 설정까지 생각 중이었는데, 지금 대교의 질문 요점은 그게 아닌 것 같군.

“…소녀는 어쩐지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실제의 장청란, 한 달 후의 그녀가 과연 환상처럼 움직여 줄지……”

“…실은, 그 정도가 아니야.”

“예?”

“지금까지 네가 상대한 장청란은 비밀서고에 있는 월형신공 자료와 월영당과 천이단이 수집해 온 정보를 몽… 아니 내가 정리 분석하여 반영한 거지. 장청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패관수련에 들어가지 않았던 석 달 전까지 일 뿐이지.”

“그, 그런…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의 장청란의 이긴다 한들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인들은 하루를 보지 않아도 어제의 그가 아니라 하였거늘, 비무 때까지 그녀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나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여기서 나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 안 되겠지?

“너, 이번 수련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예?”

“내가 분명히 첫날 그랬지.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네가 유리할 거라고… 난 유리할 거라고 했지, 무조건 승리를 장담한 것이 아니었어.”

“……”

“네 말대로야. 네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환상과 실제 장청란은 분명 다를 거야. 하지만… 너도 이대로 멈춰 있을 것이 아니잖아. 안 그래?”

“그, 그건……”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의 대교, 얘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엄청 부담이 되긴 했던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공부 잘하는 고3도 대학입시 날짜 다가오면 공연히 불안하고 기분도 지랄 같아지고 그런 법이지. 나는 앉아 있는 대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섰다.

“좋아, 오늘 하루 쉬자.”

“예?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장청란은… 꺄악~!”

흐흐… 간만에 손바닥으로 등짝 치기 성공했다. 지하 성지에서처럼 어이없는 표정이 된 대교에게 나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거, 이거~ 문제는 문제일세. 내 손도 피하지 못할 정도면 우리 대교가 그동안 엄청 게으름을 피웠나 본데?”

“곡주니임~! 갑자기 그런 실없는 장난을……”

난 입술을 삐죽이며 볼멘 소리를 내는 대교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 내가 좋은 거 보여줄게.”

대교는 이어지는 내 태도에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내 통나무 집안으로 대교를 데려가서는 본래는 식량이 담겨져 있던 바구니 하나를 열어 보라고 했다. 며칠 전 여느 때처럼 혼자 오두막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

대교의 감탄성… 흠,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여자들은 귀여운 것에 약한 모양이다. 대교는 바구니 안의 하얀 토끼를 살며시 안아들었다.

“어쩜~! 곡주님께서 잡으셨어요?”

“음… 실은 그 녀석 다리를 다쳐서 날 보고도 도망을 못 가더라고, 약 바르고 붕대 감아줬는데 아직은 절뚝거려.”

대교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참… 맛있게 생겼네요.”

허걱-! 대교의 입에서 저런 엽기적인 대사가 나올 줄이야.

“소녀가 토끼 고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짐짓 입맛을 다시기까지 하던 대교는 내 질린 표정을 보더니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호~ 소녀도 농을 한 번 해봤답니다.”

크흠-! 이번엔 내가 당했군. 이거… 대교 녀석, 갈수록 대담해지는 걸?

오늘은 기왕에 쉬기로 했으므로 오후에 우린 함께 토끼 붕대 갈아주고 먹이 주고 그러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대교가 다시 불안한 기색이 보일 때면 분위기 바꾸기 위해서 아무 얘기나 꺼내다 보니, ‘코리아 교 전설’이라고 하며 별의별 얘기를 다한 것 같다. ‘흥부놀부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토끼와 거북이’… 이 중에서 대교는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 이야기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다음은 대교의 감상평이다.

“어쩜…! 재능이 뛰어난 무사보다 성실한 무인이 결국 경지에 오른다는 교훈을 내포한 뜻깊은 전설이로군요.”

…해석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백화주로 반주까지 하며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자 대교는 매우 정성 들여 차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영천(靈泉)을 사용한 죽각차(竹殼茶)를 마시니 심신이 절로 쾌청해지는 것 같습니다.”

“음, 그래? 근데 난 저기……”

대교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바람에 나도 미소와 함께 말을 받았지만, 내 미소는 상큼이 아니라 시큼이었는지 대교는 조금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차 맛이 신통치 않습니까? …소녀는 최근 내력과 함께 이목도 발달하여 그 전에는 부족했던 탕법(湯法, 물 끓이는 법.)에 있어서도 형변(形辨), 성변(聲辨), 기변(氣辨) 모두에서 잘 못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부족한 점을 알려 주시면 반드시 노력하여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얘가 또 사람 민망하게 하는 구만. 난 단지 이 죽간차인지 뭔지가 싱겁고 밍밍한 맛이라 설탕이나 좀 타달라고 할까 어쩔까 망설였던 건데, 갑자기 웬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이람?

[ 영천(靈泉). 하늘의 은택으로 내린 샘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이 시대 자연 환경 하에서도 매우 귀한 것으로 추정됨. 물이 끓는 형태를 보고서 물이 찻물에 적절하게 끓여진 상태인지 분별하는 방법이 형변(形辨), 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분별하는 방법 성변(聲辨), 물이 끓는 증기를 보고 분별하는 방법 기변(氣辨). ]

몽몽의 친절한 단어 해석 메시지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무공 수련도 아니고, 차 끓일 물 고르는 거 하고 끓는 온도 맞추는 정도에 그렇게 학구적(?)이라니… 거참-!

“네가 끓인 차가 뭔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야. 최근에 다른 차보다는 흑주차(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겨서 그래.”

“…그러고 보니 곡주님께서는 식후에 항상 서역의 흑주차를 즐기셨는데 제가 잊고 말았네요. 지금이라도 올리겠습니다, 곡주님.”

“아냐. 내 습관이 별로 좋지 않은 거야. 본래 흑주차를 밤에 마시는 사람은 드물어. 실은… 흑주차 안에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잠이 잘 오지 않게 하는 성분이 섞여 있거든. 에- 서역 용어로는 카페인…이라고 하지.”

“카빼인…? 처음 듣는 말입니다.”

“…암튼, 그런 거 있어. 그러니까 지금 준비할 내 올 필요 없어. 넌 그냥… 그냥 거기 앉아있어.”

“……”

“뭐… 오늘만이라도 골치 아픈 일들 잊고 지내자고, 우리.”

난 대교에게 공연히 한 번 씨익 웃어 준 다음 느긋한 태도로 탁자에 올려놓은 한 팔로 턱을 괴었다. 밤하늘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그냥 이런 저런 생각하다가 문득 탁자 건너편에 시선을 주면 대교가 변함없이 앉아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다가 다시 힐끗 눈을 돌려보면 대교도 내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의 이 나른한 행복감… 대교도 함께 느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시작된 특훈… 대교의 승률은 대뜸 40%대로 떨어져 내렸다. 원인은 가상의 장청란에게 새로운 패턴을 부여한 때문이었다. 장청란 본래의 행동 패턴이 아닌 돌발적인 행동을 하도록 했더니 그런 결과라… 알게 모르게 대교는 가상의 장청란에게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특훈 기간… 그러나 나는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승패와 관련 없이 대교가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루 제끼고 스트레스를 푼 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대교는 착실하게 수련을 계속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승률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훈 31일째, 마지막 날. 대교의 최종 종합 승률은 76.4%. 이제 대교와 내가 강호에 나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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