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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91화


76.4 %라는 승률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드디어 결전의 날이 가까웠음을 새삼 실감한 대교와 나는 꽤나 비장한 심정으로 본단에 돌아왔다. 그리고… 우린 그 다음날 바로 강호에 나갔다.

전 강호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냉화절소 장청란과 마봉낭자 대유화의 비무. 그 화제의 날에 앞서 강호인들이 극도의 긴장과 함께 주목하고 있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비화곡주 ‘진하운의 강호출도’였다. 비화곡주가 직접 비무에 참관한다는 것은 발표한 적이 없었고 우리 측에서는 해남파에게도 발표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나 물론(?) 그 소식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공공연히 강호에 좌악 퍼져 있었다. 보나 마나 해남파에서 ‘우린 극악서생이 모월모일 쯤 강호에 나올 것임을 전혀~ 모르걸랑요?’ 식으로 속보이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녀서 그랬겠지만… 뭐, 그 정도야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본래 명호인 ‘독각와룡’보다는 ‘극악서생’이라는 호칭이 더 일반적인 비화곡주 진하운. 그의 강호출도는 지금까지 총 12번이었다고 한다. 비화곡의 공식적인 볼일로 나간 것이 5번이고 나머지는 그냥 지 볼일로 나간 건데… 한 번도 강호에 원판이 나간다는 것이 미리 알려진 일은 없었다고 한다. 강호인들이 ‘어, 그 인간이 비화곡 바깥으로 나왔단 말야?’라고 놀랐을 때는 이미 사고 칠 거 다치고, 죽일 사람 다 죽인 후 곡에 복귀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신출귀몰’한 비화곡주가 다들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시기에 어슬렁어슬렁(?) 나온다고 하니 꽤나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숫적으로는 “사부님의 피맺힌 원한을 이번엔 기필코 갚자!”, “멸문(滅門)의 한을 기어이 풀어야 하리!”… 식의 공적인 원한으로 출동한 명문 정파의 고수들이 태반이었지만, “나의 불쌍한 딸 세 명의 원한을 갚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라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나선 이름난 고수도 꽤 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내 애첩 10명을 돌리도!”라고 외치며 용병들을 몰고 온 자도 있다고 하는데… 뭐, 하여간 그냥 구경 온 자들까지 해서 엄청난 인파가 비화곡 주변으로 모여든 상황이었다. 그들은 비화곡에서 강호로 나가는 길목이 되는 마을들의 객잔과 기타 유흥가(?)에 때아닌 호황을 불러와 그 마을들의 재정에 크나큰 보탬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자신들의 본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비화곡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혈무검대와 마극파천대였다. 이 두 부대는 강호 상에서 ‘악귀(惡鬼)들의 군대’라고 악명이 드높은 비화곡 정예 부대였는데… 문제는 그들이 전원 동시에 출동하였다는 점이었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 행사 때처럼 길을 꽉 매운 행진으로 사람들의 기를 죽여 놓더니만, 역시 만만치 않은 악명의 혈랑대 역시 전 병력 총 출동한 듯 떼거지로 등장했다.

이 정도 만해도 웬만한 이들은 기가 죽어 복수고 뭐고 때려 치고 고향 앞으로 가야 할 분위기였지만, 비화곡 아니 ‘극악서생’의 물량공세(?)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아 글쎄, 세외(世外) 세력과의 싸움으로 괴멸되었다고 소문이 났던 폭풍당까지 나타났다는 구먼. 예전의 그 무시무시한 위세 그대로……!”

객잔 한 구석의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목청을 높이자 그 앞의 다른 사내들도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 뿐인 줄 아는가. 어렵게 먼발치로 비화곡주가 탄 가마를 목격한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외쳤다고 하네. ‘독수라. 독수라 마상민이 나타났다’…라고 말일세. 그 희대의 독인이 비화곡주 옆에 있다면 누구도 비화곡주가 가는 앞길의 우물물을 마시기는 고사하고 마음 놓고 물건 하나 만질 수 없다는 얘기 아닌가.”

“아무렴.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비화곡주의 가마가 지나는 길 곳곳에서 흑의의 복면 사내들이 목격되었는데… 그들의 복면 위에는 작고 붉은 반달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네. 이는 비화곡이 키워낸 공포의 살수집단 잔월단(殘月團)까지 등장했다는 말이 아닌가.”

“난 마치 시체처럼 안색이 창백한 자들이 마을 집들의 처마 밑이나 숲 속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는 말이 더 소름 끼쳤다네. 다들 그 괴인들이 5년 전 관서의 백호산장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몰살시켰던 백골단(白骨團)일 거라고 한다네.”

“내가 듣기로는 비화곡주의 가마 주변에 말을 타고 따르는 자들 한 명 한 명도 모두 오래 전 은거한 마도의 전설적인 고수라던 걸? 사람들이 알아본 인물만 해도 당대의 사마제일검이라는 혈마검호 지천공, 천살막의 전대 막주인 야황살후 소진광도 있었고… 아, 화약을 악마처럼 다룬다는 ‘벽력마(霹靂魔) 고석산’도 목격되었다는 군.”

“이거야, 비화곡주는 비무참관이 아니라 아예 목야 평을 제 2의 비화곡으로 만들려는 거 아닌가.”

내가 앉아 있는 탁자까지 확실히 들리는 건 저 사내들의 대화뿐이었지만, 대충 눈치를 봐도 이 넓은 객잔을 메운 사람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비화곡주의 화려한(?) 출도를 화재 삼고 있는 것 같았다. 듣고 있자니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긴 했던 것 같다. 아무리 짱이라고 해도 그렇지 한 사람 나가는데 비화곡 특수부대의 태반을 동원한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애매한 호위병력보다는 아예 화끈한 떼거지 출동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고 지금까지는 내 의도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듣자니… 아직 아무도 비화곡주 일행에 손을 쓰지 못했다면서?”

“이 사람아. 자네라면 어쩌겠는가. 이건 뭐 비벼볼 여지가 있어야 시도라도 해볼 거 아닌가.”

지금 들려온 대화 내용대로 인 것이다. 내가 곡을 떠난 지 오늘이 삼일째… 이제 이틀 만 더 내 계획대로 진행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과연, 아가씨의 책략에 다들 눈뜬 봉사가 된 꼴이로군요.”

사내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사영이 피식거리면서 꺼낸 말이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뭐, 다들 그랬으면 좋겠지만 세상엔 눈치 빠른 자들도 많은 법이니 안심할 수는 없겠지요. 뭐… 그래서 내가 이 꼴을 하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흠…! 그 꼴이라니. 별말씀을 다하시오. 지금까지 들은 곳의 모든 사내들이 아가씨의 선녀처럼 아리따운 자태에 넋을 잃었거늘……”

으으- 사영 이 웬수. 안 그래도 그 동안 수많은 놈 팽이들의 야시시한 시선에 속이 느끼해 죽겠는데, 이 인간까지 느물거리다니…!

제기, 일단은 지금 내가 이렇게 여장(女裝)을 하고 사영과 단 둘이 이름 모를 객잔에 앉아 있는 경위를 설명해야겠다.

뭐… 말하자면 그 동안 간부들이 낸 아이디어들의 수정보완책이었다고 할까? 현재 날 습격할 예정자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대규모의 호위병력을 거느린 비화곡주는 당근, 가짜다. 같은 날, 난 양동작전으로 사영만 덜렁… 아니 흑주도 따라왔군. 하여간 보이는 인원은 사영 한 명만 대동하고 비화곡 식구들도 모르고 비화곡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탈출 루트는 예전에 대교가 나왔던… 한룡소에서 출발하여 죽음의 진을 가로지르는 그 루트였다.

현재 대교와 가짜 비화곡주를 호위하고 있는 규모의 병력을 비무장소까지 몰고 갈 수 있다면야 양동작전을 쓸 것도 없었겠지만, 그 인원이 정말로 비무장소까지 가려면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뭐, 소모되는 식량 및 기타 비용 같은 사소한(?) 문제도 문제지만 결정적으로 그 정도 병력이 동시에 움직일 경우 정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생각도 그랬고, 간부들도 정파에서 ‘그게 호위병력이냐? 침략군이지?’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아직 움직이고 있지 않은 여러 대규모 문파들이 나서고… 그리고 결국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가짜 일행의 유효기간을(?) 5일째인 내일 모레정도로 결정한 것이다. 그 안에 나와 사영은 신수성녀의 배에 타기만 하면 되는데… 그 여자, 신수성녀 조예린은 정파이나 마파인들에 차별을 두지 않는 데다 인명을 엄청 아끼는 성격이라니 ‘내가 이 배를 타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 이 죽는다’라는 식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내 완벽한(?) 계획에 흠이 있다면, 그건 지금 내가 하필 여자로 변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굴을 아예 바꾸는 데는 통째로 뒤집어쓰는 인피면구가 최고지만, 아무리 정교한 인피면구라도 실제 피부와는 다르기 때문에 안목 높은 강호인들에게는 들킬 염려가 있다고 한다. 본래 움직임이 적은 수염을 얼굴에 붙인다거나 하는 정도가 변장자체는 좀처럼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변장 전문가 외당 고시리 당주의 말이었다. 헌데 이 원판의 용모는 콧수염 같은 걸 붙이는 정도로는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본래 얼굴에 특별한 변형이 필요 없으면서도 화장발 조금 세우는 정도로 확 달라 보이는… 여장이 최고라는 결론이었다. 물론 나는 여장자체가 내키지 않아 계속 다른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에 관한 비취각 주의 말이 치명적이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곡주의 미모(?)는 좀처럼 가려지지 않으니 남색(男色) 취향의 사내들이 혹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허걱-! 이 무슨 끔직한…! 닭으로의 변신 충동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여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호모들 시선을 받느니 그냥 정상적인 남자 시선을 받는 게 차라리 낮겠다 싶었던 것이다. 제기랄!

“이거… 오늘도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모양이외다.”

사영의 말에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건장한 젊은 무사 한 놈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이론 제기, 그냥 방안에서 식사할 것을 공연히 객잔에 나왔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한숨이 먼저 포옥 나온다. 인간들아, 니들은 보는 눈도 없니? 여자 옷 입고 화장만 하고 있으면 다 여자냐?

“돌아가시게 젊은이. 우리 아가씨께선 아무하고나 말씀하시는 분이 아닐세.”

“훗-! 너무 그러지 마시구려, 대협. 난 금검호(金劍護) 여관고라는 자로써 결코 수상한 인물이 아니올시다. 저쪽에 계신 우리 공자님께서 잠시 아가씨께 잠시 인사를……”

아가씨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심정으로 슬쩍 녀석이 온 테이블 쪽을 보니 전형적으로 뺀질하게 생긴… 고시리 당주 닮은 젊은 놈이 내게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으… 밥맛!

“난 올라가 쉴래요.”

사영에게 말하고 일어서는 내 앞을 금검호인지 뭔지 하는 놈이 슬며시 가로막았다.

“아가씨! 제 체면을 봐서라도 잠시… 헉!”

금검호는 말하다 말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물러선다.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사영의 검이 언제 뽑혔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내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 개쯤 밟았을 때 놈의 동료로 보이는 사내들이 몇 명 더 달려왔고, 계단 대 여섯 개 올랐을 때는 겁 먹은 신음소리만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 사영이 그 눈부신 솜씨를 약간만 선보여도 대부분의 하수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구… 그건 그렇다 치고, 다들 눈이 삐었나 지금도 넋을 잃고 날 바라보는 저 놈들은 도대체 뭐야?

“그 놈 눈치는 어때요?”

오늘 밤 묵을 방으로 들어와서 물으니 사영이 공연히 피식거리고 웃으며 대답한다.

“그 젊은 공자가 아가씨의 미색에 홀렸으니 어찌 이대로 포기하겠소. 오늘밤에도 다소 시끄러울지 모르겠소.”

으… 나름대로 각오를 하긴 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삼일 동안 내가 들른 객점에서 나, 아니 나들이 나선 젊은 아가씨 ‘진하연’을 무심히 보아 넘기는 사내가 없었고 어찌 꼬셔보겠다고 접근해 오는 얼간이들이 꼭 몇 명은 있었다. 첫 날에는 오밤중에 내가 자는 방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 놈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좀 전의 그 공자인지 뭔지 재수 없게 생긴 놈도 그럴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본래 미모도 미모지만… 아가씨의 언행은 참으로 여성스러워 나도 혹할 정도이니 다른 사내들 심정이야 오죽 하겠소.”

“거 자꾸 놀릴 거요? 남은 짜증나 죽겠구만.”

내가 신경질을 부리자 사영은 껄껄 웃더니만 밖의 동정을 살피겠다며 나갔다. 우쒸…! 동행을 잘 못 택했나? 저 인간 절혼무저갱에서 한 번 죽었다 살아나더니 어떻게 된 게 더 능글맞아 진 것 같다.

그나저나… 걷는 동작 하나까지 여성스럽게 하는 내 연기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은가 본데,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원. 뭐… 연극부였을 때도 연기 연습할 때 남녀 부원들끼리 성을 바꾸어 연기한 일이 자주 있긴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남자 부원들이 번갈아 가며 ‘탄광촌 작부’ 역을 연기하는 건데… 무지 섹시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몸을 더듬는 남자들의 손길을 뿌리치는 ‘상황극’이었고 그걸 가장 잘해냈다고 평가를 받은 것이 나와 연극부장이었다.

그 땐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지만… 제기, 지금 정말 여장을 하고 뭍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처지가 될 줄이야. 에구 내 팔자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울 보면서 화장을 손보고 있는데 별안간 밖에서 와장창! 쿠당!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응? 뭐야? 밖에 쌈났나?

우지끈! 콰쾅~! 하는 소음은 계속 이어진다. 설마… 그 공자 놈이 벌써 부하들을 더 데려와서 사영과 싸우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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