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23화 : 진유준의 비행 소녀들. (2)
8. 진유준의 비행 소녀들. (2)
잠시 후.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빠이빠이~ 인사하는 카디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넌 하은이를 닮았으니, 일은 수하들에게만 시키고, 넌 침대로 직행하겠지? 잘 자라!”
“아하하! 유준 오빠도 굿나잇~!”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우리쪽 비행 소녀들의 하나인 요몽이 포르릉 날아올랐다.
-어, 왔냐?
「넵. 몽몽 오빠가 진하연님, 아니, 하은님이 오시지 않았다고 해서 천천히 왔는데, 카디만 봐도 반갑긴 하네요.」
-훗. 넌 정말 하은이가 좋은 모양이구나.
「그럼요! 이젠 하은님과도 직접 얘기해보고 싶은데………………
-그러든가.
「예? 진짜요?」
-그래. 아직은 ‘해커 소녀 요몽’ 신분을 유지해야겠지만, 그래도 언제고 기회가 되면 네가 직접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마.
「와앗! 만쇄이! 주인님 최고!」
신이 나서 정신없이 기쁨의 비행을 하는 요몽 때문에, 엘리베이터 안이 온통 요정의 빛방울로 가득해졌다. 나는 이제 하은이를 만나게 되면, 녀석이 모르고 있는 진실들을 전부 알려줄 생각이지만, 그 얘기까지 요몽에게 미리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참참!」
요몽이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내 눈앞으로 내려선 것은, 나와 은사마군이 1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나설 때였다.
「원판씨의 암호! 이번 암호를 대체 어떻게 풀어내신 거죠?」
-응? 그거, 몽몽에게 듣지 못했냐?
「예! 주인님께서 갑자기 CIA 시스템을 조사하라고 하셨던 것이, 원판씨 암호문 때문이었다면서요? 그 암호문에서 어떻게 CIA가 나오게 되는 거죠?」
요몽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문제의 암호문을 허공에 띄웠다.
‘날아간 새를 조심하십시오. 내 품에 둥지를 튼 작은 새, 그와 정반대의 하늘로 날아간 새’
「우~ 전 다시 봐도 모르겠어요. 진하연님의 이름에 ‘제비’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시 같은 암호문속의 ‘새’가 ‘제비’를
의미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더구나 암호문 속의 ‘새’는 하나도 아니고요.」
-그래. 이 새타령 암호문만 가지고는 그런 유추가 될 수가 없지. 원판 그 뺀질이 시키가 그래서 자기 비서이자 애인 ‘란’에게 암호문을 읽게 했던 거야.
「에? 그게 또 무슨 말씀이시죠?」
-란이 저걸 읽어줄 때, 그녀의 표정과 음성이 어땠지? 엄청 행복하고 황홀해 했잖냐.
「어? 그러고 보니… 아! 정말 그런 거 같네요?」
요몽 이 녀석, 지만 볼 수 있는 작은 영상창으로 그때 녹화 영상을 돌려보는군. 뭐, 그거야 어쨌든.
-그녀가 암호문 전달하면서 왜 그랬겠냐. 그녀는 암호문을 전달만한 것이 아니라, 숨은 내용도 알고 있었던 거야. 외부에서 영입되어 원판 곁에 머물고 있는 여자 란, 그녀가 ‘내 품에 둥지를 튼 작은 새였던 거야. 그런데 그녀와 반대로 원판 곁을 최근에 떠나간 존재는 누구지? 바로 하은이야. 「아, 알겠어욧! 이제 알겠다구욧! 원판씨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은님과 란씨, 둘 다 새로 비유했어요. 그러니까 란씨 입장에서는 졸지에 하은님과 같은 반열로 승격된 기분이 들었을 거고, 그래서 그렇게 헤롱대는 얼굴로 암호문을 읽었던 거군요! 이해가 되요! 저라도 그런 벼락출세를 하면 그랬을 거 같아요!」
-표현이 쫌 거시기하다만, 대충 그런 거긴 해. 그리고 어쨌든, 이렇게 기본 키워드가 밝혀졌으니, 다른 사항은 너도 알 수 있겠지?
「그러믄요! 란이 CIA에서 날아 왔으니까, 하은님이 란과 반대로 날아갔다는 하늘은 CIA가 되는 거죠! 그곳으로 가 버린 하은님을 조심하라고 했던 첫 번째 문구는, 하은님이 속하게 된 CIA를 조심하라는 뜻이었던 거였어요! 와하하! 이번엔 암호 풀이 안하신다더니, 결국 금방 뚝딱 풀어버리셨네요?
역시 주인님과 원판씨는 너무나 죽이 잘 맞는 거 같아요!」
-죽이 잘 맞기는 개뿔! ‘또 암호질하면 죽는다.’라는 메시지나 보내 둬!
「넹~ 그러겠사와용」
쯧. 요몽 이 녀석, 내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까부는군. 사실, 처음 새타령 암호문을 들었을 때는 꽤 짜증났었는데, 원판 녀석이 하필 하은이 소식을 끼워 넣어서 화내기 애매해졌어. 빌어먹을 원판 녀석, 언젠가 나도 녀석이 골치아플만한 암호를 만들어서
복수하던가, 그래야할 텐데, 내 두뇌 알피엠으로 잘 될까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 아래 상황은 어떠냐?
나는 어느 사이 도착한 징검다리 2호 뒤편의 맨홀 뚜껑을 열면서 물었다.
-대부분 튀었을 테지만, 피비는 확보했겠지?
「엡! 코드명 피비는, 몽몽 오빠의 예측대로, 조담씨가 접수한 웨인의 소굴안에서 가사 상태로 발견되었네요. 영력 회복을 위한 마법진 안에 있어서, 몽몽 오빠의 기본 계산보다는 빨리 깨어날 것 같아요.」
나는, 요몽의 보고를 들으며 맨홀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슈우욱~ 몇 초의 낙하 끝에 간단히 착지!
「그런데, 친위대들 중에서 뜻밖의 인물이랄지, 하여간 예상 못한 친위대가 투항을 해왔네요.」
-누군데?
내가 살짝 긴장(?)하여 물은 것은, 아무래도 쥐떼 두목, 호박귀신 프로스트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리치몬드, 골든 스켈레톤 마법사요.」
-에? 진짜? 그 난감한 불사의 마법사가 스스로 항복을 했다고?
「예. 웨인이 주인님, 아니, 조담씨를 피해서 달아나게 된 시점에서 살리나와 웨어울프들의 여자 보스, ‘지나’는 즉각 어딘가로 퇴각해 버렸는데,
리치몬드는 그냥 맥없이 항복을 선언해 버렸대요. 시그마씨가 다소 허무해하긴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되었네요.」
나도 왠지 허무해지는군. 그 황금 해골바가지를 사로잡아서 여러 가지로 ‘사망시키기 실험을 한다고 했던 건, 그냥 해본 소리였다.
무엇보다, 워낙 베일에 싸인 존재이다 보니, 당장 알 수 없는 마법을 써서 달아나도 잡을 방법도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제풀에 항복을 해버렸다고? 원 별.
-일단, 알았다. 그럼 쥐떼 두목, 프로스트는?
「그 사람은 쫌, 애매한 상태예요. 길모르씨한테 투항의 뜻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멀리 달아난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으음. 아무래도 그 쥐떼들은 이 지하 하수도가 본래 삶의 터전, 즉, 고향인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당장 항복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야.
「그리고, 거북 요괴말인데요. 거북 요괴들의 두목, 오겡키는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보고를 들으셔도 되겠네요.」 지하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내가 들어 온 지점은 본래 웨인 놈의 비밀 소굴과 가까운 곳이어서, 나는 아까 조담이 날려버린 소굴의 문 앞에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주! 성공적인 작전 완료를 보고하게 되어 기쁩니다!
자룡대주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포권해 왔고, 그 뒤에 선 페트라 부대주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들 고생했어. 그런데, 나만 작전을 완수하지 못해서 면목이 없군.
말만 면목이 없다할 뿐, 뻔뻔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래도 두 아가씨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그게, 웨인 놈을 완전히 끝장내지는 못했어. CIA가 끼어드는 바람에 말이지.
비로소 두 아가씨의 안색이 변하며 약간 굳어졌지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그런지, 곧 그마저도 풀어지고 있었다.
-뭐, 어차피 웨인 놈이 이제 당분간 허튼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그 얘긴 천천히 하도록 하지.
흠. 두 아가씨 모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페트라는 슬며시 자기 스마트폰을 꺼내드네. 저 아가씬, CIA쪽에도 연줄이 있어서, 나름 상황을 알아보려는 모양이군.
나는 자룡대주의 안내를 받으며, 역시 조담이 뚫어놓은 두 군데의 커다란 구멍을 통과해 들어갔다. 아까 요몽이 제공하는 영상으로 보았던 그대로의 거대한 지하 공간이고, 웨인 일당들이 설치해 놓은 횃불 조명이 매우 부실하긴 해도, 그럭저럭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뭐, 파악이고 뭐고, 축구장 정도 넓이의 황량한 동굴형 공간이고, 한쪽 벽면의 일부만 좀 다듬고 현대식 인테리어로 오픈형 거실 겸 침실을 꾸며놓은 식이로군. 그야말로 임시 대피소였을 뿐, 자주 이용하는 장소는 아니었나봐.
소위 오픈형 거실의 바로 앞에는 5, 6미터 정도 넓이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고, 거기에 문신 소녀 피디가 죽은 듯 누워있었다. 이번 싸움의 주요 변수라고 할 수 있는 피비의 상태가 궁금하긴 했지만, 오늘 매우 수고해준 나의 어벤져스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일 듯 싶었다. 녀석들은 내가 들어온 입구 부근에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고 있기도 했다.
“어이~ 조담! 고생했어. 그런데 벌써 원상복구(?) 한 거냐?”
조담에게 먼저 묻자, 녀석은 가짜 수염을 매만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자룡대주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오리지널, 너의 흉내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훗. 언젠가 나를 쓰러트리고 내가 되겠다고 하던 놈이, 이제는 정반대로 지롤이군. 얼굴의 X자 흉터는 분장을 지우는 식이니까 그렇다 쳐도, 굳이 수염을 다시 붙이는 건 좀 오버같은데, 이것도 자룡대주의 뜻이려나?
“어, 미령이! 넌 이제 좀 괜찮아?”
아까 거북 요괴 합체 괴물체를 겨우 물리친 직후에는 다소 힘들어했던 미령이였지만, 지금은 매우 당당한 표정과 태도로 웃고 있었다. 녀석은 내게 눈인사를 한 다음,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흐음. 이 자가 오늘 우리 미령이가 포획한, 적장이로군.”
나는 미령이에게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거북 요괴 두목인 ‘오겡키’에게 조금 다가섰다. 오겡키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고,
묶여있다거나 그렇지도 않았지만, 매우 침통한 분위기로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분위기는 그래도, 바윗덩어리 같은 위압감은 여전하군. 영상 중계를 보면서도 짐작은 했지만, 덩치 하나는 길모르보다도 거대해서, 앉은키가 나의 선키와 비슷할 정도야. 일본 요괴가 미국 물 좀 먹었다고 이렇게 덩치가 커질 수 있나? 혹시 이 녀석이 ‘스모 선수들의 원조?
내가 다소 엄한 분석 및 추리를 해보고 있자니까, 오겡키 뒤에 있던 토르가 특유의 건들거리는 몸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헤이~ 닌자 거북씨! 우리들의, 캡틴이야! 당신의 캡틴을~ 해치우고, 왔나 봐아~”
토르가 랩송처럼 가락을 붙여 지껄이자, 오겡키의 몸이 움찔했다. 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신성파괴자 진유준인가?”
“그래. 너와 네 부하들까지 날려버린 불꽃 공주의 ‘형부’가 될 사람이기도 하지.”
나와 미령이는 흐뭇한 미소를 교환했고, 오겡키 놈은 미령이쪽을 힐끔 보고는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사실인가? 웨인님이 당신에게 패하여 쓰러졌는가?”
“그래.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나 마찬가지야.”
오겡키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며 거짓이 아닌지 가늠해보는 눈치였지만, 결국 무겁게 눈을 깔았다. 분명 침울한 분위기이긴 한데, 어쩐지 웨인 놈의 반죽음(?) 상태를 알게 되어서 이러는 거 같지는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봐, 오겡키. 넌 일본 요괴아냐?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웨인 같은 자의 수하가 되어있는 거지?”
“유준 오빠! 그건 제가 얘기해 드릴게요.”
“응? 미령이, 네가?”
“예. 제가 먼저 과거 사연을 들었는데, 같은 얘기를 반복하게 하는 건 미안해서요.”
흠. 이것 봐라? 미령이가 우째, 오겡키를 챙겨주는 모양새 일세?
“오겡키는 본래・・・・・….”
미령이는 나와 오겡키 사이에 서서, 오겡키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놈의 과거 사연을 늘어놓았다.
으으음. 그러니까, 핵심 내용을 요약하자면, ‘일본 요괴가 맞고, 오래전에 돈으로 고용되어 미국으로 왔다’ 이거지? 오겡키는 본래 인간으로
태어났었는데, 강물에 던져진 어린 아이의 영혼이 요괴화된 것이라던가, 부하 거북 요괴들도 보스턴의 익사체로 오겡키가 요괴로 만든 존재였다던가, 그런 전후사연들은 일단, 둘째치고!
““돈으로 고용되었다고? 요괴가?”
“후후. 저도 그게 가장 이상했는데, 요괴들 중에는 인간의 돈을 좋아하는 요괴가 꽤 많다네요. 아, 물론, ‘카드’는 안 받겠지만요. 그렇죠, 오겡키?” 미령이가 오겡키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오겡키는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카드라는 것이 무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돈에 담긴 마음까지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허? 이것 보게? 요괴면서 돈을 탐하는 것뿐 아니라, 나름의 돈에 대한 철학도 있다는 건가?
나보다 미령이가 더 놀라는 눈치인거 보니, 녀석도 아직 오겡키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모양이군. 하긴, 아직 그럴 시간도 없었지? “뭐,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들을 상황은 아니니까, 이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을 확실히 해야겠군.”
미령이는 눈치 빠르게 옆으로 빠졌고, 오겡키도 다시 나를 마주보았다.
“오겡키. 이제 너의 고용주 웨인, 그 놈은 부활할 가능성이 없어. 넌 이제 어쩔거냐.”
“어쩔거냐고? 나와 내 부하들을 패퇴시킨 것은 저 불꽃 공주이고, 당신은 그녀의 두목이다. 당신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훗. 내가 뭐 하러 귀찮게 너의 운명까지 결정해. 나와 내 수하들의 기본 모토는 ‘우릴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도 건드리지 않는다.’야. 뭐, 간혹 웨인처럼 지나치게 재수 없는 놈을 만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너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그러니까, 넌 네 맘대로 하란 말이야.”
오겡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천천히 생각해. 나는 좀 바빠서.”
바쁘긴 하지. 이번에는 다국적(?) 요괴 오겡키보다도 정체성이 의문인 포로, 황금 해골바가지 차례인가?
시그마와 뱀프 타운의 뱀프들은 한쪽에 어느 정도 대열을 갖추고 대기 중이었다가, 내가 다가가자 일제히 정중하게 몸을 숙여 인사를 해왔다.
무서운 뱀파이어 부대라는 실체에도 불구하고, 다들 비주얼이 좋아서 그런지, 조폭 두목이나 군대 지휘관 보다는, 기업의 회장님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그마 부장, 아니, 그냥 시그마. 크흠. 다른 스켈레톤들이 하나도 안보이네? 전부 당신들이 해치운 건가?’
시그마와 조금 떨어진 곳의 바닥에 혼자 앉아있는 리치몬드를 보며 묻자, 시그마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드, 모두, 이 리치몬드가 ‘회수’한 것입니다.”
‘회수?’
‘예, 로드. 본래 리치몬드는 자신의 망토 안에 미지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불사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스켈레톤들이 저 리치몬드의 망토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사실 저도 오늘 처음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거 참. 안 그래도 한숨나게 황당한 존재들이 자꾸 꼬여드는 내 팔자에, 이제 별 놈이 다 등장하네. 다른 상황처리가 더 급해서 이놈에게는 크게 주목하지 못했었지만, 최근 등장한 캐릭터 중에서 이놈이 은근, 가장 판타스틱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어.
나는 문제의 리치몬드에게 다가갔고, 계속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있던 리치몬드도 조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깊숙이 쓴 후드 때문에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골바가지를 본다고 해도 용모를 알 수는 없을 테고, 해골 얼굴이라는 표현도 뭔가 좀 이상하긴 하고, 무엇보다, 뼈다귀밖에 없어서 말도 못하는 거 아닌가?
‘난, 웨인의 부하가 아니야.’
‘응? 당신도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건가?
‘그래. 그리고 난 웨인의 부하가 아니라고 했다. 난 그의 손님이야.’
‘흠. 그런가? 그래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우지도 않다가, 냉큼 항복하기도 한 거 였군.’
‘그래, 내가 진심으로 나의 군대를 내보냈다면, 너의 뱀파이어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시건방진 황금 해골바가지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고, 후드 안쪽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지만 신비로운 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