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65화 : 위험한 남자, 유인호. (2)

극악서생 4부 – 165화 : 위험한 남자, 유인호. (2)


2. 위험한 남자, 유인호. (2)

‘그 여자, 예뻐?”

에고, 주혜의 환청까지 들리는 거 같네. 어쩐다? 이제라도 주혜를 어떻게든 따돌리고, 우리끼리 미국으로 토껴?

현실도피성 생각부터 떠올랐으나, 결국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실현 가능성도 적거니와, 당장 섣불리 그랬다가 더 무서운 후환이 닥쳐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소희님도 도착하셨네염.」

소희는 내 뜻에 따라 1호차에 남았었고, 그 1호차가 내가 짱박혀 있는 건물 앞의 도로에 정차하고 있었다.

-소희야. 내릴 거 없다. 내가 다시 가마.

나는 다시 1호차에 탑승했고, 소희는 날 맞으며 큭, 쿡, 웃기부터 했다.

“여기서도 다 봤어요. 세상에, 요즘 뜨는, ‘군복 바지 각시탈’이 바로 유준 오빠였던 거예요?”

“어, 너도 알고 있었어? 어쨌든 줄여서 ‘군시탈’이라고 불러다오.”

“아하하~ 알겠어요. 제가 SNS에서 그 별명을 밀어 볼게요.”

소희는 진심으로 재밌어 하면서, 내게 각시탈을 건네받아서는 각시탈을 만져보느라 잠시 현재의 상황을 잊는 것 같았다.

“사실 그건, 최근에 여벌로 더 만든 거고, 제일 처음 만들어서 한동안 쓰던 오리지널은 집에 있어.”

나는 각시탈 현황(?)을 설명해 주면서도, 다시 요몽의 영상창을 통해 인호쪽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호는 그 사이에 지연과 함께 대피에 성공한 상태였는데,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은 이쪽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뭐지? 지연이 왜 빈 철로 쪽을 저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 거지? 아, 가만? 그러고 보니, 전철이 멈춘 이유는 요몽도 아직 모른다고 했었지? 그럼 혹시?

나는 이마의 차크라에 집중하면서 다시 영상을 보았고, 그러자 지연의 시선이 향한 지점의 빈 공간에 뭔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할수록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졌으며, 그건 이십대가 될 듯 말듯하게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한 무언가였다.

「어, 주인님. 방금 차크라 개방하셨죠? 그럼 현재 영상속의 영혼은 잘 보이실 텐데, 이 영상과 비교해 보실래요?」

요몽이 새로 띄워 준 영상은 전철이 멈추기 전에 녹화된 영상인 모양이었고, 술 취한 멍멍이한테 떠밀린 안전 요원이 철로 위로 떨어지는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떨어진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안전요원 부근의 철로 위로 희뿌연 형체가 떠오르더니, 멀찍이서 달려오고 있는 전철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스톱! 최근에야 완성된 필터링 기법 들어갑니당!」

일시 정지된 화면 위로 몇 가지 다른 색과 무늬의 필터가 겹쳐지기 시작했고, 필터가 더해질수록 막연한 안개 덩어리로만 보이던 형체가 점점 더 확실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요몽의 필터링이 끝난 후의 영체는 분명, 달려오는 전철을 두 팔 벌려 막으려는 모습의 젊은 청년이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전철을 멈춘 유령이라! 이거 참. 최근에는 맨날 사람들을 해치는 오컬트 존재 스토리만 접해 와서 그런지, 뭔가 더 감동스럽다야.

요몽과의 대화여서 무심결에 가벼운 말투가 나오긴 했으나, 내심 상당히 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시 실시간 영상을 보니, 지연은 철로위의 ‘역무원 유령’을 향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착한 역무원 유령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고, 지연은 그제야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던 인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희야. 요몽이 전철이 멈춘 이유를 찾아낸 모양이다. 한번 봐라.”

내가 알려주자, 소희는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았고, 오래지 않아 촉촉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랬군요. 이 분이 이곳에도 나타나신 거였네요.”

“음? 이 역무원 유령, 이미 알고 있었니?”

“예. 전 다른 사원들의 얘기와 사진으로만 알고 있는 거지만, 이 분은 몇 년 전에 다른 역에서 사고를 당하셨던 분인데, 그 후로 계속 자신이 일했었던 역을 돌며 ‘지하철의 수호령’ 역할을 하고 계신데요. 그래서 당연히 재단에서도 정화 대상에서 제외했고요.”

으으음. 자신이 사고를 당한 원통함은 잊고 남들을 돕고 있는 거라니, 새삼 숙연해지는군. 그리고 이렇게 착한 인물은 유령이 되어서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오히려 살아있는 인간들 중에서 남들을 괴롭히는, 아까 그 술 취한 멍멍이나 성범죄자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지하철을 더럽히고 있다 이거지? 아까 요몽에게는 하기 싫다고 했었지만, 결국 조만간 ‘지하철 인간쓰레기 청소 이벤트’를 좀 해야쓰것꾸먼.

나는 결심을 굳히며 소희로부터 돌려받은 각시탈과 등 뒤의 정글도를 공연히 매만졌다. 그런 내 앞으로 나타난 요몽은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게요, 주인님. 저도 이런 사연은 간만이라. 쿨쩍~ 아, 잠시만요, 주인님.」

요몽은 피잉~ 나름 귀여운 소리와 함께 코까지 풀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움~ 근데요 주인님. 소희님은 그 착한 유령의 얼굴까지 알아보시고, 주인님은 ‘역무원 유령’이라고 부르기도 하셨죠? 복장까지 세세히 보이신

거예요?」

-어 그랬지. 음,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필터링한 영상은 얼굴이나 복장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던 거 같네? 설마, 그게 너, 혹은 너희들의 한계였던 거냐? 이거 이거, 조금 실망인걸?

「시, 실망이시라구요? 그게, 저희들의 영체 시각화 시스템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그게…

응? 이 녀석 분위기가 우째 쫌.

「우~ 그렇게 말하심, 너무 억울해요! 저희들한테 영체 데이터가 부족한 것은, 어디까지나 주인님 탓이란 말이에욧!」

-에? 웬 책임전가? 내가 뭘 어쨌다고?

「그게요, 주인님께선 기본적으로, 상당히 흉악한 영력 패턴을 가지고 계신데다 항상 ‘난 이상한 것들은 보고 싶지 않아’라는 정신 배리어를 치고 계셔서리, 몽몽 오빠의 스캔 범위 안까지 들어오는 영체가 거의 없단 말이에요! 영체 시각화 시스템이고 뭐고, 뭔가 하려고해도 쓸만한 데이터를 모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이번 필터링 알고리즘도 최근에야 겨우겨우 구성한건데! 그걸 실망이라고 구박을 하시면! 그러면 저는 진짜!」

이런, 이 녀석이 간만에 제대로 뿔따구난거 같네. 내 영력 패턴이 흉악 어쩌고 하는 건 괘씸하지만, 그걸 따지고 혼내기도 어려운 분위기일세. -야, 야! 진정해 진정! 그, 그건 내가 너희들 사정을 미처 몰라서, 아, 하여간, 인상 좀 그만 긁어라. 그러다가 ‘앵그리 버드’ 아니 ‘앵그리 요정’ 되겠다. 「흥! 몰라욧! 앞으로는 영체 분석이 엉망이어도 저희들 탓하기 없기예요!」

으으음. 이 녀석, 이거 아무래도, 너무 오버하는 거 같지?

-알긋다 알겠어. 앞으로는 너희들한테 영체 분석은 아예 시키지 않으마. 됐지?

「예, 예? 그, 그게, 그런 거 보단, 앞으로 주인님께서 영체들 접근을, 그러니까, 너그럽게 허용하시는, 그렇게 해주신다고, 그렇게 나와 주실 줄 알았는데…………

짜식, 빨리도 속내를 드러내 버리는군.

-내가 왜? 필요할 때만 차크라 개방하는 것에도 많이 익숙해졌는데, 뭐 하러 평상시에도 귀신바가지들을 가까이 하냐?

내가 태연하게 대꾸해주자, 요몽은 급격히 기가 죽어 ‘앵그리 요정’ 모드를 지우고 있었다.

「아이 차암. 왜 이러세염. 어차피 웬만한 귀신이나 유령 따위들 보다 무섭고 특이한 수하들이 잔뜩 생기신 참인데, 이제 그만 폐쇄성을

버리시고..

요몽-!

「넵.」

-너, 솔직히 말해봐라. 내 보좌를 더 잘하고 싶어서 영체 데이터 수집을 원하는 거냐? 아니면 재미 차원에서 이러는 거냐?

「솔직히, 둘 다요.」

-그래 뭐, 솔직해서 좋네. 알겠어. 나도 앞으로 신경 써서 노력해보마. 영체들이 지금보다는 내 가까이, 그러니까 너희들의 스캔 범위 안까지 다가올 수 있도록 말이지.

내가 이렇게 선선히 자기를 위한 결정을 해줄지는 몰랐는지, 요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만세 삼창(?)을 하고는 정신없이 기쁨의 비행을 했다. 나는 요몽이 뿌려대는 자축의 빛방울 속에서 쩝, 쓴 입맛을 다셨다.

기왕하는 거, 요몽의 간청(?)을 들어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이제 오컬트 방면의 폐쇄성을 버릴 때가 되긴 했지. 요몽 말처럼, 나는 이미 오컬트 계열의 수하들까지 잔뜩 거느리게 되어 버린데다, 오컬트 계의 뛰어난 후기지수인 인호 남매와는 아예 의남매까지 맺었으니 말이야. 「아, 주인님! 인호님이 드디어 나오고 계시네염!」

요몽의 알림을 듣고 차에서 내리니, 인호가 지연과 함께 지하도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도 느꼈지만, 지연의 실물은 더욱 소교의 성숙 버전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론 용모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애잔 청초 계열이라는 의미로써였다.

“지연 언니! 저, 기억하시겠어요?”

소희가 먼저 나서며 반기자, 지연도 반가운 표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소희. 이름이 소희였죠? 인호씨처럼 소희양도 꿈속의 소녀와 똑같은 모습이네요.”

응? 꿈, 이라고? 그렇다면 이 아가씨, 잃어버린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인거 같지만, 그거야 어쨌든! 이번에는 나? 나야 당근, 이 아가씨의 꿈에 출연했을 리가 없지.

나는, 나를 보면서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는 듯한 지연에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초면이니까 생각해볼 것도 없어요. 아, 혹시 내가, 지연양을 노리던 요괴들과는 조금 닮았으려나?”

흠. 썰렁한 농담에도 잘 웃어주시는구먼.

“자, 그럼 우선 차에 타고, 지연양 집으로 가면서 얘기합시다.”

나의 자랑스러운 이동형 윈드 게이트 1호는 외견상 택배 차량에 가까웠고, 짐칸(?)의 문을 열어주는 상황이었으나, 지연은 별 망설임 없이 차에 올랐다. 꿈속의 남자와 소녀를 현실에서 만나게 된 상황 때문에 살짝 들뜬 상태인 것 같았다.

꿈속의 남자라, 어쩌면 그냥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 애틋하게 인호를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자칭 사랑의 전도사로서, 이 보기 좋은 남녀의 재회에, 축하와 축복을 내려주고 싶은 마음도 샘솟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인호에게는 초울트라 강력한 고참(?)들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으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청초 미녀 아가씨도 나름 장난이 아닌 체질이라고 했지?

-이봐, 인호.

소희는, 지연과 지연의 꿈 얘기를 나누기 시작해서, 인호에게 묻기로 했다.

-이 아가씨 말인데, 재단에서도 특별하게 생각할 만큼 대단한 체질이긴 하다며? 하지만 영매라고 하는 건 본래, ‘남이 장군’을 받아들인 ‘남장군처럼 외부의 영과 하나가되어 그 영의 힘을 쓰는 거고, 본인이 강한 건 아닌 거지?

-강하다는 의미가 싸움으로 남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럴지 모르지만, 방어력이랄지, 그런 것도 자체적으로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예. 영매들의 ‘급’은 보통,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 그리고 ‘다스리는 힘’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지연씨 같은 경우는 둘 다 매우 크고 강합니다. 에그머니, 학술적인(?) 개념 설명을 할 분위기일세?

-마계의 악령, ‘파이몬’같은 고대의 강력한 악령까지 지연씨를 탐냈던 것은, 그만큼 지연씨의 그릇이 크다는 의미이며, 그 파이몬조차 쉽게 지연씨를 지배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지연씨를 괴롭혔던 것은, 지연씨에게 ‘다스리는 힘’ 또한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잠재되어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지연씨는………………

-오케이, 거기까지!

쯧. 무슨 얘긴지, 대충 알아는 먹겠는데, 인호의 ‘선생님 모드’는 쪼까 부담스럽군.

-지연양의 영매 체질에 대한 심층 설명은 나중에 다시 듣기로 하지. 여하간에 현재의 지연양은 그 어떤 영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냥 보이는 대로라는 거지?

-아, 예. 하지만 스승님의 불력이 지연씨와 함께하는 한, 악령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선사의 사리에 담긴 불력, 그걸 지연양이, 그러니까 꼭 싸움에 쓰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방어에 이용하게 할 수는 없는 걸까?

인호는 이제야 내 뜻을 이해하고 잠시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으나, 인호가 지연에게 돌린 시선에는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만 보일 뿐이었다. -아, 알겠어. 내가 뭐, 꼭 지연양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야. 나는 대빵으로서 우리측 전력을 좀 더 상세히 알아두려는 차원에서 물었을 뿐, 지연양 같은 비전투원은 우리 모두가 잘 지켜주면 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쳇!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저 아가씨는 ‘보호받기 전문 캐릭터였나? 물론 매퍼 형제들로부터는 당연히 지켜줘야겠지. 하지만 우리의 무션 주혜양, 그리고 연적앞에서는 ‘요괴 마스터’로서의 본성을 드러낼 것이 뻔한 ‘신디 매퍼, 이 살벌무쌍한 아가씨들로부터 지연을 지켜내는 것은 나도 자신이 없는데 말이쥐.

-유준 형님! 계속 여러모로 많은 신경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우리 사이에 뭐 그런 인사치례를 하고 그래.

말이 그렇지, 인사를 받긴 받아야해! 난 다른 건 몰라도, 여자들의 치열한 암투를 중재하는 일은 절대 사절하고 싶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노무 마신일, 그 인간 때문에 내가 이런 복마전속에… 아, 가만? 그러고 보니, 이건 마신일 탓만 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가 아니었어도 언제든 주혜가 4각 관계의 한축으로 떠올랐을 것이고, 애초의 원인은 누구보다, 그래, 바로 이 친구, 유인호로군.

나는 문득, 진실을(?)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마신일이나 여자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과묵하고 예의바른 아우님이, 공포의 4각관계가 형성된 원흉이며 핵심이지 싶었다. 특히, 인호 특유의 ‘무심한 다정함’이 문제일 것 같았다.

그래. 이 친구는 가만 보면, 자신과 인연이 닿은 여자들 모두에게 ‘진심’인 거 같아. 여자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각각의 세세한 사연은 둘째 치고, 모든 상황에서 인호는 여자들에게 진심으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꾸준히 성실하게(?) 그럴 거야. ‘무심하게’ 말이지. -소희야…

소희를 부른 것은, 마침 소희와 지연의 대화가 잠깐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이었고, 인호는 지연에게 그녀의 어머니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니 오빠 말인데, 소위 ‘연애’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조차 없다고,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는 상태, 맞지?

‘후후. 정말 정확하게 표현하시네요. 맞아요. 인호 오빠는 다 좋은데, 여자들에게 너무 무심해서 큰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선 분명히, 오빠가 스님이 될 상이 아니라고 하셨었는데도 말이에요.」

-끄으음. 역시 그랬군. 소희 너도, 그동안 중간에서 힘든 일이 많았겠다.

「’하하. 많은 건 아니었고요, 몇 번 주혜 언니 달래느라 힘들긴 했어요.’」

-역시 주혜양 때문에?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주혜 언니와 함께 있을 때, 인호 오빠에게 ‘정선아’라는 언니의 전화가 왔었어요. 전에 오빠가 파견 나갔던 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했던 언니인데, 피아노가 전공이어서 개인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고 알려 온 것이었어요.」

-으음. 인호는 주혜양이 옆에 있는 데도 다정한 축하의 말을,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그 콘서트에 가지고 갈 꽃을 주혜양에게 문의했다던가, 그런 거냐?

「’와우!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그냥 찍어 본거야. 근데 그래서, 그 피아니스트 아가씨는 지금 살아는 있냐?

「아이 참. 주혜 언니도 그렇게 무분별하지는 않아요.」

소희는 일단 주혜를 변호하는 얘기를 했으나, 슬며시 멋쩍어하는 표정과 함께 진상을 고백해 왔다.

「’실은, 주혜 언니가 선아 언니의 주소를 묻기는 했어요. 제가 어찌어찌 달래서, 그날 배정된 정화 업무에 나가도록 했어요. 사실은 제가 재단 언니들에게 부탁해서 ‘소멸’ 결정이 난 정화 대상으로 바꾼 거였고요.’」

-훗. 다른 대상에 화풀이해서 스트레스 풀라고 보낸 거였군.

「‘예. 그런 거였는데, 주혜 언니는, 정화 대상뿐 아니라 정화대상이 출몰했던 숲 자체를 소멸시켜 버렸어요. 제 입장이 참.’」

소희는 내게, ‘이제 유준 오빠 입장도 대략 난감해 질 예정’이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문득 차문을 열고 뛰어 내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무심한 운전자, 은사도객 8호가 차내 스피커로 비보(?)를 알려왔다.

“천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아, 집 앞에 서있는, 저 아가씨 앞에 세우면 되겠습니까?”

“하아~ 그러든가.”

나의 힘없는 대꾸에도, 8호는 착실하고 정확하게 차를 세워 주었다. 내가 하는 수없이 문을 열고 먼저 내려보니, 적어도 겉으로는 자룡대주 못지않게 세련된 도시 미녀 스타일의 주혜가, 붉은 롱코트 자락을 날리며 다가왔다.

“여어. 오랜만이네, 주혜양.”

“별로 오랜만은 아닌 거 같아요. 진유준,씨.”

“그, 그런가? 하하하. 하긴, 다 같이 신림동에서 순대 먹은 것이 얼마 안 되긴 했지, 아마?”

나는 짐짓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주혜의 눈초리는 벌써 사나워지고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우리의 무심 청년 인호는, 암 생각 없이 지연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치겠네. 만나자마자 시작인가? 윽! 예상대로 주혜의 무서운 ‘엄마, 아빠’부터 등장해 버렸네. 주혜의 뜻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해버리는 저 부부 영체가 등장과 동시에 화염까지 일으키고 있어!

“주, 주혜 언니?”

소희까지 당황한 목소리를 냈고,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주혜와 그녀의 엄마 아빠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나지막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혜양! 나는 주혜양 편이야!”

그래. 나도 살고 봐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