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6화 : 두 번째이자 첫 번째 만남.
6. 두 번째이자 첫 번째 만남.
사실 잘 쓰던 칼이 울지를 않나, 주인을 지 꿈에 끌어들이지를 않나… 어느 모로 보나 비현실적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본 래 사물의 의인화를 즐기는 성격인대다 정글도는 내가 너무나 무지하게 아끼는 녀석이다보니, 그 어떤 감정보다 우선적으로 반가움이 앞섰다. “내~참! 네가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던 거였어? 하핫~! 짜쉭! 무슨 일인지 이 형님(?)한테 얘길 하면 되지, 뭐 하러 혼자 청승맞게………….”
[주인님!]
응?
“오라버니?”
어, 대교?
“유준이, 너어!”
윽! 어머니까지? 잠든 사이 방문이 열렸었던 건가? 에고, 이거 상황이 좀…………
다시 정글도를 숨기는 건 애 저녁에 늦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든 채 엉거주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열려진 방문 앞에는 과일 접시를 든 대 교와 어머니께서 나란히 서 있었다.
“아… 저기, 엄니. 이건 그냥, 별거 아닌……………”
“대, 대교야. 그게에~ 우리 유준이가 본래 저런 건 아니란다. 어머, 제가 왜 오늘 안 하던 짓을………….”
으음. 역시 대단한 울 어마마마.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들래미가 자기 방에 큼지막한 칼을 숨겨둔 것도 모자라 그 칼에 말을 걸고 있는 모습까지 목격하셨으니, 보통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선은 며느리 감에게 아들의 추태(?)를 변명해주시려는 걸 보면… 참 위대할사 모정이여~ 랄까? 하지만…………
“아니에요, 어머님. 오라버닌 본래 종종 저런 놀이를 즐기는 걸요.”
한술 더 뜨는 대교.
“뭐? 그… 그럼 쟤가 네 앞에서. 게다가 종종? 진짜니?”
“그럼요, 어머님. 후훗~ 천진한 어린아이 같고 귀엽…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어머님.”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어머니께선 이제 다른 의미로 기막혀 하시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신다.
“…니가 아주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콩깍지요? 눈에요?”
진짜 모르는 건지, 짐짓 한국어에 서툰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하여간 그런 대교의 반문 때문에 어머니께서도 결국 풀썩 웃고 마셨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 방을 나가신 후, 난 안도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에혀~ 이번에도 대교, 네 덕분에 살았다.”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조금 뜻밖이네요.”
“아, 방금 그건…….”
“어머님께선 당연히 오라버니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놀라셔서 저도 좀 당황했지 뭐예요. 아, 물론 저 때문에 더 그 러셨겠지만요.”
“그거야.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새삼 정글도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실은, 난 방금 장난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어.”
“예?”
대교는 비로소 웃음기를 거두며 정글도에 시선을 주었다.
“그럼 혹시………….”
“이 녀석, 지금 정말 울고 있어.”
“아..! 지난 번 비행기 안에서 하신 말씀이 그럼.
“그래. 환청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거야.”
“명검에는 영혼이 깃드는 수가 있다고 하더니, 그 정글도 역시 그랬군요!”
훗. 소위 무협의 세계에서 온 소녀답게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지극히 개방적(?)이군.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대뜸 기뻐하는 표정이 되는 건 또 무슨……
“그럴 줄 알았어요. 오라버니의 애병기가 평범한 칼일 리가 없지요.”
어, 얘기가 또 그리되나? 대교도 참… 흠. 암튼.
“그게, 사실 나도 확실한 건 아직 잘 몰라. 이럴 때는 당연히………….”
“후후~ 몽몽!”
대교의 호출에 몽몽이 샤릉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대교님. 저 역시 아직 명확한 보고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괜찮아, 몽몽. 어서 아는 대로 말해주렴.”
[예. 그럼…….]
몽몽은 먼저 한 손을 들어 허공에 하나의 입체 영상을 띄웠다. 나의 정글도를 두 세배 확대해서 보여주는 영상이었고, 우리가 보는 정글도와 달리 신비로운 느낌의 빛에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저의 스캔 필터를 거친 영상입니다. 해당 병기, 코드명 정글도는… 보시다시피 고위 생명체의 강한 정신 에너지… 비공식 용어로 ‘염’에 동화되어 있습니다. 염의 고착화 현상 자체는 인간과 같은 고위 정신 에너지 방사원에 노출된 사물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나, 보통의 경우에는 가까운 거 리의 인간에게 ‘왠지 마음에 든다. 수준의 낮은 영향을 미칠 정도에서 그칩니다. 이는 정신 에너지의 일반적 휘발성과 관련이 있는…………….]
쯧. 몽몽 녀석, 또 시작이군.
[…그러므로 코드명 정글도의 현재 상태와 같은 고밀도 고착화 현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이는 해당 병기의 제작자와 역대 사용자들 의 강한 정신 에너지와 해당 병기에 대한 집중 방사・・・ 즉, 애착에 의한・・・・・・]
아까보단 쉬운 편에 속한 얘기라서, ‘간단히’를 요구하고도 싶지만… 대교에게 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눈치니 그냥 참아줘야겠군.
난 결국 침대에 누워서 편한 자세를 잡았고, 대교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 계속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도 물론 몽몽의 얘기를 듣고는 있는 거지만 왠지 몽몽의 학술적인(?) 설명보다, 이렇게… 늘 그랬듯 정글도 녀석을 내 손으로 쥐고 있는 게… 더 이 녀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 뭐, 그렇다고 당장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 >
흐으음.. 웬일인지 이제는 울음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데… 그래도 뭔가 정글도의 감정이 전해오는 듯한… 그야말로 소통이 되는 느낌…? 훗. 그 냥 기분 탓인지도…………
..
[・・・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해당 병기의 염을 인간의 영혼에 비유하자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영혼과 같은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현 재 상태로는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후의 자아 성장 속도도 계산이 어렵습니다. 좀더 명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음・・・ 아니야, 몽몽. 정말 잘 들었어. 너처럼 영특한 아이가 오라버니 곁에 있어서 난 항상 마음이 든든하단다.”
대교의 칭찬 겸 다독거림에 몽몽은 얼굴을 붉히고 쑥쓰러워 하기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뭐시냐, 대충 정리하자면 이 정글도에는 누군지 모를 제작자와 최초 사용자인 패도광협霸刀狂俠) 선배하고, 지금의 나 진유준의 염이 합 쳐져서 일종의 영혼이 생긴 건 틀림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하지만 아직 극히 원시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가 보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굳이 보고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약간의 의심이 가긴 해서 아까 그랬던 거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불쾌하셨다면 죄송…………….]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 오히려 잘한 거지 뭐.”
아까 내가 라후의 혈족을 의심하는 소리를 했을 때, 몽몽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는 내가 자연스럽게 ‘염의 소통에 적합한 상 태’가 되도록… 즉, 잠이 들도록 기다렸던 것이다.
“어쨌든… 몽몽 너의 분석으로는, 지금의 정글도 상태가… ‘감정’을 가질 정도도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도 나에게 전해질 정도의 감정이 생겨버렸 다는 건…….”
[진화를 촉진, 혹은 촉발할 정도의 ‘특별한 자극’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이제 전체적으로 뭔 얘기인지는 알겠어. 그럼 이제 문제는 대체 그 자극이 뭐냐는 거로군. 물론 그 자극으로 깨어난 녀석이 지금 슬퍼하 고 있는 이유가 더 궁금하지만…….”
[주인님께서 처음 정글도의 감정을 느끼신 시간대에서 가까운 사건을 검색해 보시길 권장합니다.]
“그야. 계속 그러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최근 겪은 일이야 너도 다 아는 거고… 글쎄? 난 최근에 이 녀석으로 딱히 특별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 걸? 쌈질이야 늘 있는 일이고 말야.”
“저어…………….”
“음? 왜, 대교.”
“제 생각에는… 꼭 최근뿐 아니라, 오라버니께서 정글도를 취하신 이후의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
“모든・・・ 일들?”
“예. 제 생각일 뿐이지만… 전대 주인이었던 패도광협님은 평생 정글도와 함께 지냈어요. 그만큼 정글도도 그 분에게 익숙해져 있었겠지요.” “흐음~ 전혀 다른 타입인 나와 지낸 시간 자체가 자극이었을 거라 이거지?”
나름 일리 있는 추리야. 하지만 패도광협 선배와 내가 얼마나 다른 성격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고, 전해오는 전설로 보자면 오히려 나와 비슷 한 구석이 많은 것 같았지…? 게다가 정글도를 가지게 된 후로 모든 일이라고 하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잖아, 이거.
“…패도광협님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그런 행동을 하신 기억이 없으신가요?”
“글쎄…? 그 선배나 나나 정글도 갖고 하는 일이란 건 뻔한 거 아냐. …뭐, 물론 내가 좀더 융통성 있게 썼는지도 모르지만………….”
에…? 그리 생각하니까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나기 시작하네?
“면도…….”
“예?”
“연옥도(煉獄島)에서 지낼 때 말야. 다른 도구도 없고 해서 그냥 얘로 면도도 하고, 이발도 하고 그랬지. 그때 습관이 돼서 지금도 가끔 그러고 말 “야.”
“아…! 그건 분명 아무리 패도광협님이라도 안 하셨을 행동이네요. 무사에게 칼이란 자신의 분신이며 예를 갖추어야 할 동반자이니……….” 으으음. 이거 어째 얘기가 좀……………
“…어머? 죄송해요. 오라버니를 비하하려던 뜻이 아니었어요. 전 오히려 그렇게 세속에 매이지 않는 오라버니가 좋은 걸요.”
“…저기. 요리…에도 가끔………….”
“예?”
“모닥불로 고기 궈먹을 때… 얘 위에 몇 점씩 놓고…….”
“그, 그것도 그럴 수도 있죠. 연옥도엔 다른 도구가 없었을 테니……”
“석쇠대신으로 그만이더라구. 무지 맛있었어.”
“아, 예에.”
“워낙 튼튼해서 땅 팔 때 삽 대신으로도 쓸 만했고, 돌도 쩍쩍 잘 깨지더라구. 내공 안 써도.”
“…예. 튼튼… 그렇죠.”
“그래도 날 하나 안 나가던 녀석인데… 여기, 옆면의 요 부분… 조금 패였지?”
“예? 대체 어쩌다가!”
“어, 원판의 아파트에 쳐들어갔을 땐데, 그때 얠 던져서 말하자면, 내공이 제대로 실려 있지 못한 상태에서 총알에 맞는 바람에…”
무조건 내 편이던 대교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나 스스로도 새삼 정글도에 대한 미안함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천하제일인과 함께 강호를 호령했던 풍운진패도(風雲震霸刀), 현재 정글도의 비애(悲哀).! 그 원인은 혹시… 바로 나…?
이틀 후.
자룡대주의 도움으로 여행에 필요한 수속이 순식간에 끝났기에, 우리 부모님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홍콩을 시작으로 중국 각지의 유명 관광지를 상당수 섭렵하는… 열흘이 넘는 일정…! 그리고… 3층의 하숙청년, 원판은 나름 바쁘다고 아직 안 돌 아오고 있어. 조담놈도 열심히 바다를 헤엄쳐서 오는 건지 어쩐지 아직 출몰 기미가 없고… 흐으으음~ 이거, 이거… 음핫!
나는 아버지 대신 오후 내내 카운터를 지켰던 가게의 셔터를 내리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 웃음은 2층집으로 올라가면서도 계속 멈춰지지가 않 았다.
“아~ 어서 오세요!”
혼자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대교의 인사 소리가 너무나 낭랑하고 싱그러웠다.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준비를 거의 마쳐가는 분위기의 그녀는, 아 니 집안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어째… 시, 신혼집 같은데?”
“아이 차암. 공연한 말씀을……………”
“크흠! 공연한 말이라니…! 기왕에 이리 된 거………….”
난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미리 연습하자. 새신랑인 내가 하루 종일 힘들게 쌈박질 근무를 끝내고 퇴근하면, 당연히 새신부는……………”
“피이~ 그런 거에 연습이 어딨어요?”
“아, 암튼! 안 해줄 거야?”
내가 더욱 노골적으로 입술을 들이대자, 대교는 난처해하며 몇 번 더 ‘아이 참, 아이 참.’ 하더니 결국 재빨리 살짝 입술만 대고는 후다닥~ 부엌으 로 튀어버렸다.
…훗. 대교도 참. 이미 우린 범세계적(?)이자 시대초월로 소문난 커플이거늘, 우째 매번 저리도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네. 뭐… 그래서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하지만… 음? 이… 이 심하게 맛난 냄새는…? 오~ 이런 진수성찬이긴 한데… 하핫! 이거, 이거・・・ 좀 심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천년 전의 비화곡에서도 나와 대교는 단둘이 ‘장청란과 비무’대비 합숙 훈련을 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본단으로부터 미리 요리 된 음식이 공 수되었었다. 대교가 우리 집에 들어 온 후로도 식사준비는 어머니를 거드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대교가 직접 나만을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차린 식탁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지? 그걸 대교도 의식한 건지. 이건 뭐. 어머니께서 아시면 몇 달치 식비를 한 끼에 날렸다고 소박맞을 수준이랄까?
“…설마. 만한전석(滿漢全席)?”
난 사실 만한전석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냥 그게 2박 3일 정도에 걸쳐 먹어야 할 정도의 대규모 코스요리라는 얘기를 주워 들었을 뿐이다. “설마요…! 그냥 제 나름대로… 조금 신경을 써본 것에 불과하답니다.”
조금..? 이게 조금이면, 왕창 신경 쓸 경우에는 우리 집 기둥뿌리 뽑히는 것도 한 순간… 으음. 안 돼지, 안 돼 진유준! 대교가 애써 준비한 걸 자꾸 좀스런 생각으로 초치면 곤란하쥐!
“우음. 하지만, 저의 음식 공부가 너무 부족하여, 과연 맛있게 드실 수 있는 음식이 되었을지………….”
“하핫! 맛있지! 당연히 맛있을 거야! 맛있을 수밖에 없지! 암!”
난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 앉아서 가장 가까운 요리부터 덥석 집어먹어 보았다.
“움~ 취고! 최고! 맛있어! 대교 만세!”
약간(?) 오버로 보일지 몰라도, 맛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다소 조마조마한 표정이던 대교가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아~ 다행이에요! 전 정말 걱정했는데. 아, 그럼 이번엔 이것부터… 앙~”
“앙~”
나는 대교가 집어 주는 대로 입을 벌려 받아먹으며 무한한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식탁 위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싱크대 선반 여기저기에까지 늘어선 요리접시들을 보면서 속으로 외쳤다.
‘먹고죽자!’
얼마 후.
난 거실 소파에 길게 죽어(?)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쓸어안고 씩씩대는 내 옆에서 대교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계속 즐겁게 드시는 것 같아서… 설마 이 지경이(?) 되실 줄은…..”
“하, 하~ 괘안아, 괘안아. 대교, 너의 잘못이라면… 너무나 맛있는… 천상의 요리를 만들었다는 것뿐! 후후~ 난 이 정도야 뭐, 금방 소화시킬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 이제 차를 올릴까요?”
“좋지!”
대교는 곧 주방으로 가더니 쇼핑용 종이백과 주방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차 봉투며 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제가 홍콩에서 즐기던 차를 몇 가지 가져온 건 아시죠? 그리고 동생들이 하나 둘 선물해 준 차가 21종에, 자룡대주가 어제 32종의……….” “대교! 그냥… 커피 한 잔. 플리즈~!”
“훗. 알겠어요. 이것들은 앞으로 천천히 하나 씩 맛보도록 해요.”
대교는 입을 가리고 곱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우린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시 잠시 후.
나와 대교는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습관적으로 켜 놓은 TV를 건성으로 보면서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도 너무나 평화롭고 아늑한 시간이었다. 대교는 문득 내게 기대왔고 난 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냥 그것뿐, 이렇게 서로의 따스한 체 온을 나누며 내 심장 소리를 대교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했다.
난 솔직히 말해서, 대교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의… 일정 선을 넘는 육체적 욕망이 없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막상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되니 까. 그 어떤 방해를 받지 않는 정말이지 힘들게 얻은 이 시간이 ・・・ 그냥, 그저 좋을 뿐… 다른 생각이 나질 않아. …훗. 모르겠다. 이런 생각도 또 한 의미가 없지. 지금은 이대로… 그냥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고만 싶을 뿐이니 말야. 으음. 게다가 뭐랄까,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행복한 시간 을 가지고 있는 거 자체가 그 누군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오라버니.”
“음? 왜?”
“이러면 안 되는데.
천천히 고개를 든 대교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눈물 방울이 어려 있었다.
“이래선 안 되는 건데…….”
대교는 눈물을 감추듯 다시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대오며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제가 벌써… 이렇게 행복하면… 이러면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데…
대교가 누구에게 이렇게 미안해하는 건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에 대교가 처음 ‘주가혜의 육체’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죄책감을 얘기했을 때, 난 그걸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사실, 나도 좀… 그래.”
대교가 선뜻 고개를 들었지만, 난 고개를 저어야 했다.
“아니, 난・・・ 나도 미안한 녀석이 있다는 얘기였어. 지금도 내 침대 밑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를 녀석 말야.”
“아… 정글도!”
“게다가 그 녀석이 그러는 게 내 탓일지도 모르니……….”
나와 대교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난 결국 고개를 뒤로 젖히며 탄식했다.
“아아~ 대교야. 우린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인 것 같아. 사실 우리도 고생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했잖아? 그러니 이제 좀 암 생각 없이 맘 편히 지낼 때도 있고 그래야 하는데………….”
음? 말하다보니, 우리도 나름 할 말이 많은 커플이란 게 상기되는군, 그래.
“에이~ 모르겠다! 까짓 거, 우리 그냥 행복하자! OK?”
“아.. 아하! 그럴까요, 우리?”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인님!]
“왜, 인마!”
[・・・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알려 드려야 할 사항이………….]
“쯧. 거봐, 대교. 우린 역시 남 생각해줄 틈이 없는 커플이었어. 앞으로는 틈날 때마다 가차 없이 우리 생각만 하자구.”
“훗~ 정말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몽몽. 그래, 이번엔 또 뭐냐?”
[TV 화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에? 뜬금없이 웬 TV?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TV에서는 누군지 모를 낯선 인물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인… 무형 문화재…? 응? 대장…장이? 대장장이라고?
“몽몽?”
[예. 코드명 정글도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오호? 역시, 그렇단 말이지?
난 물론이고 대교까지 몸을 일으켜 앉아 TV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교양 프로가 아니라 특집으로 편성된 휴먼 다큐 프로인 모양이었고, 주제는 ‘장인(匠人)의 세계’였다.
3부작 중에서 오늘이 2부이고, 소제목이 대장간의 하루… 어? 근데 이거 뭐야..? 은장도…? 지금 나오고 있는 명인은 은장도 전문이라고? 아, 아 니지 저 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칼의 명인들도 나올 테니 그 중에…………
[…코드명 묵연(黙煉), ‘홍장훈’. 그가 주인님의 정글도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에? 저 은장도 전문이라는 분이?”
[그렇습니다.]
난 새삼 홍장훈이란 분을 주목해 보려 했지만, 화면은 이미 다음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방금 그 분이 대체 어떤 식으로 정글도와 관련이 있다는 거야? 전에 조사했을 때는 아예 이름도 안 나왔던 분인 것 같은데?”
[주인님의 기억은 틀리지 않습니다. 이전의 검색에서는 저도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전의 검색’이란 원판의 아파트에서 정글도가 손상을 입은 직후의 얘기다. 아무리 나라도 아끼는 정글도 얼굴에(?) 흠집이 생겼는데 무심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몽몽에게 ‘정글도를 손볼 수 있을 만한 인물’을 검색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결론은 ‘국내외를 통틀어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발견할 수 없음.’이었다.
[그것은 해당 인물이 정글도와 직접 관련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글도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홍장훈의 부친으로 서, 현재 노환으로 위독한 상태입니다.]
에…? 명인의 아버지? 근데 노환으로 오늘 낼, 오늘 낼 하신다고? 그럼 혹시…………
[입원 중인 병원의 데이터를 확인한 결과, 해당 환자가 일시적으로 사망 판정에 준 하는 상태에 빠졌었던 시간대는 주인님과 정글도의 ‘염의 소 통이 이루어진 시간대와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위독해서 정글도가 그렇게 슬피 울었다…? 그 분은 그럼… 아, 아니 잠깐. 그 전에…! 방금의 얘기도 물론 놀랍지만, 그것만으 로는 드문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어.
“저기. 넌 처음에 어떻게 그 분을 알고 현재 상태에 대해서까지 조사하게 된 거야?”
[조금 전 주인님께서 시청하지 못하신 앞부분의 방송 중, 홍장훈은 자신의 부친에 대해 언급하며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께서 작년에 갑자기 기적처럼 일어나서 자신의 옛 대장간을 보수하기 시작했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해당 ‘옛 대장간’은………….]
어? 저, 저건………!
몽몽이 허공에 띄워준 영상은 방송국에서 촬영한 영상이었고 무제의 대장간을 그리 세세하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에게도 꽤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연옥도의 그 대장간?”
어, 물론 내가 본 건 대장간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터를 몽몽이 가상으로 복원해 준 화면을 봤던 것뿐이고, 옛날 대장간이란 곳이 다 거기서 거 기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몽몽 선생이라면…………
[두 대장간의 구조 형태 및 규모 수치의 일치도는 92.6%였습니다.]
‘같다’는 말과 다름이 없군.
[또한, 해당 인물의 대장간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시기도 주인님께서 현 시대로 복귀한 시기와 일치했습니다.]
…하, 핫! 이거, 이거야 원! 정글도가 이 시대에 나타나자마자, 이 시대의 어떤 분이 그걸 감 잡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분은… 과거, 천 몇 백 년 전・・・ 연옥도에서 정글도를 만들어냈던 그 명인의 환생・・・・・・?
정글도에 대한 강호의 전설에는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다’라는 부분이 없다. 물론 별의별 소문은 많았지만 거의 다 근거가 미약했다고 했다. 심 지어 최초 발견자라는 연옥서생 사부와 최초 사용자인 패도광협 선배도 ‘운 좋게 얻게 되었다’는 기록과 발언만을 남겼을 정도였다.
천하의 몽몽도 연옥도의 유적을 조사한 것만으로는 그 명인이 왜 어떻게 연옥도에까지 와서 개인 대장간을 세우고 정글도 같은 칼을 만들어냈는지 를 알아낼 수가 없었지. 당연히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도 불명인 거고. 으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정글도 녀석이 그렇게 찔찔 짜고 있던 게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거…! 녀석은 자신의 부모 격인 존재의 영혼과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는 걸 느꼈던 거야…! …아, 하지만… 제기, 이건 알게 되었다고 해도 난처하구나. 아무리 나나 몽몽이라도 정상적으로 늙어서 생이 다하게 된 분을 살려낼 순 없는 거니. 으으음~ 모르겠다. 일단은……………
“몽몽. 어디냐? 그 대장간.”
두 시간 후.
나와 대교는 내 차, 아니 이제 우리 차인 ‘키트 1.5호’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정글도를 만든 장인의 환생자로 추정되는 노인의 병세가 상당히 심각하다고 해서,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출발했던 것이다.
…으음. 그나저나 이 차, 이거・・・ ‘엄청난 튜닝’ 이후 오늘 처음 운전하는 건데 정말 무지 좋아진 것 같구먼. 순간 가속 능력하며 고속 주행시에 도 이 놀라운 실내 정숙성…! 스포츠카와 최고급 세단의 조화라고 할까…………?
키트 1.5호의 낡고 허름한 겉모습은 전과 거의 달라 보이지 않지만, 실상은 그동안 지하무림의 기술진에 의해 엄청난 개조가 이루어졌다. 다른 차 를 원하지 않는다는 나의 뜻에 따라 최대한 본래 부품을 남겨두었다고 하는데도, 결국 성능은 진짜 키트에 상당히 가까워진 슈퍼 카가 된 상태인 것 이다.
물론, 내가 맘만 먹었으면 진짜 키트의 모든 기능을 넣는 것도 가능했겠지. 하지만 지금 굳이 미래의 기술까지 유출해 가면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음? 우움~ 대교 이 녀석, 전생에 나에게 직접 뭘 먹여주지 못해서 한이 맺히기라도 했었나………
난 옆에서 대교가 살뜰히 챙겨주는 맥반석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손을 들어 V자를 그려보았다. 다음 순간, 과속 단속 카메라의 플래시가 반짝였다. […현재까지 총 일곱 차례의 촬영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번 사진이 가장 잘 나온 것 같습니다.]
몽몽이 내가 찍힌 사진을 차의 네비게이션 화면으로 보여주자 대교가 쿡쿡대고 웃었다.
“오늘만이야, 오늘만. 난 항상 규정을 잘 지키는 모범 시민이잖아. 오늘은 좀 급한 관계로…………….”
오, 벌써 여기부터 충청도’라는 표지판이 보이는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충북 음성군 감곡면・・・ 흠. 주소가 어째 약간 낯익다 했더니, 내 대학 후배 의 고향이었어. 인용이… 김인용…! 그 녀석의 복숭아 농장 이름이… 청… 아, 그래. ‘청풍 농원’이었지?
지금은 좀 연락이 뜸해졌지만, 한 때 좀 친하게 다닐 무렵에 그 후배는 나에게 고향의 자기네 농장에서 자란 복숭아를 한 박스 선물해 주기도 했었 다.
으음~ 그 대화백도 복숭아・・・ 정말 맛있었어. 오늘은 안 되겠지만, 봉숭아 철에 꼭 한 번 들러봐야지. 지금은… 음?
<오~>
정글이(?) 소리…………?
〈오오~오~ >
뭐라 표현하긴 힘들지만… 우는 소리는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기뻐한다고 하기도 애매한 쯧. 일단 기뻐하는 축에 들어가는 소리 같기는 해. 점 점 가까워지는 걸 느낀 건가?
난 뒷좌석에 놓여 있는 정글도를 흘끔 돌아본 다음 물었다.
“몽몽! 병원은 계속 체크 중이지?”
[・・・ 조금 전, 해당 인물이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뭐?”
[현재 병원의 CCTV에는 갑자기 일어나서 가족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모습이 병원을 ‘탈출’하려는 의도로 추정됩니다.]
거의 반 혼수상태였다는 노인이, 뜬금없이 벌떡 일어난 것도 모자라 가족들 몰래 병원을 나가려고 한다고……………?
[병원 장비 체크 결과, 침대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뇌파가 갑자기 안정을 되찾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신 거라면 다행이지만 그 뭐시냐, 회광반조(廻光反照)…던가? 그런 거라면……………
[해당 인물은 지금 막 병원 앞에서 택시를 탔으며, 패티의 위성이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정황상, 자기 대장간으로 가시려는 거 아닌가 싶지? 암튼, 나도 좀 더 서둘러야겠군.
“대교! 조심해.”
난 키트 1.5호의 엑셀을 깊이 쿠욱 밟았다. 키트 1.5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숨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난 평소 안 하던(진짜, 진짜임!) 과속에 신호 위반까지 남발하며 나름 터프하게 차를 몰았기에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하핫! 이런 카 액션 놀이도 나름 재밌는 걸?
고속도로에서 200KM 넘게 밟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좁고 구불구불한 국도에서 커브마다 스키드 마크를 남길 만큼 달려댄 건 더더욱 처음이었으 며, 기차가 달려오는 건널목을 부딪치기 직전에 가로지른 경험도 처음이었다. 물론, 몽몽의 보조가 없었으면 하루 밤에 수십 건의 대형 사고를 일으 켰을 미친 짓이었다.
어… 일탈의 즐거움(?)도 이 정도까지…인가?
몽몽이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음을 알려주어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대교, 괜찮아?”
“예. 그럼요. 저도 즐거웠는걸요.”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나의 대교, 사마외도 최강의 소녀께서는 자신이 탄 차가 별 생쇼를 다하고 곡예를 하던지 말던지 눈 하나 깜 박하지 않고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계속 태연하고 안정적으로 내 입에 넣어 주는 바람에… 결국 맥반석 오징어 한 마리를 다 먹었네. 음… 담에 또 둘이 드라이 브(?) 할 때는 좀 넉넉하게 사야겠어.
차의 속도를 줄여서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으니 주변의 풍경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병원이 있다는 시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위치임에도 길 주변으로 보이는 건 온통 산뿐이었다.
“몽몽.”
[예, 주인님. 문제의 인물은 7분 20초 전, 예상대로 대장간에 도착했습니다. 그 이후 실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흐음. 그 분도 정글이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오랜 세월 고생께나 한 정글이를 말끔하게 보수해주고 싶어서…?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정글이는 물론이고 나 역시 엄청 감사할 노릇이지만… 그 분의 현재 상태로 과연 가능한 일일지…………
대장간이 있다는 이름 모를 산에 도착했을 때, 난 새삼 기대와 착잡함이 뒤섞인 기분으로 정글도를 잡았다.
음..? 이 녀석, 이거… 이젠 염의 소통뿐 아니라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을 통해서도 직접 감정이 느껴지는 걸…? 마치… 멀리서 주인이 오는 것을 발견한 진돗개가 기뻐서 짖어대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나는 언젠가 잠시 우리 집에서 맡은 적이 있던 아버지 친구 분의 진돗개를 떠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우리 차는 아스팔트 옆으로 난 비포장 공터에 멈춘 것이었으며, 동네 놀이터 크기 공터의 반대편에 산길의 입구가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인마. 이제 금방 달려가줄……….”
[주인님! 기다려 주십시오!]
응?
[수상한 에너지 왜곡 공간이 감지되었습니다. 분석에는 좀더 시간이 걸릴 듯하나, ‘적대적 존재’의 출현 가능성이 50% 이상입니다.] 뭐야? 여기서 갑자기 무슨……………
나와 대교는 함께 공공보법(
펼치기 위해 막 손을 잡은 참이었다. 그러나 대교의 내공으로 이목의 기능을 끌어 올려도 곧바로 뭔가를 감 法)을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 차의 헤드라이트는 아직 꺼지지 않고 산길 입구와 어느 정도 위까지 비추고 있었는데, 그 불빛 안 쪽은 물론이고 주변 어디
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난 아직 잘… 대교, 넌? 〉
〈…저도 아직은 특별한 느낌은.. 아, 하지만… >
대교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불빛 바깥의 산길 위쪽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저 숲의 그림자… 어딘지 변한 것 같기는 해요. …예. 차에서 내리기 전과 아주 약간 달라진 것 같아요. >
나로선 대교가 말하는 ‘변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교는 자신의 청명검(淸明劍)을 챙기면서도 주변을 잘 살폈던 모양이지만, 난 정글도의 반응을 살피는데 바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대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저 산길에 매복이 있다는 얘기..? 이런 뜬금없는 상황과 장소에서?
<몽몽.>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 감지 된 에너지 왜곡 패턴이 저의 스캔 기능 교란을 목적으로 제작 된 ‘프리메이슨의 스텔스 장비’의 구동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60%이상 높아졌습니다. 확실하게 확인된 기체는 대교님께서 주목한 방향의 2기입니다.]
오~ 몽몽이 드디어 자신을 물 먹이던 놈들의 최신예 장비를 따라 잡은 모양이구나! 과연 우리의 몽몽 선생! 내가 중요한 일 맡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바빴을 텐데 말야. …어, 근데 그럼 그 놈들이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놈들의 대빵인 12인의 사도가 ‘화해’를 요청하며 나에게 잘 보 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큼.”
난 더 따질 것 없이, 몽몽과 대교가 알려준 방향으로 정글도를 들어 보였다.
“어이~ 거기! 그냥 얌전히 나올래? 아니면 내가 나오게 해줄까?”
내공과 살기를 담아 외친 후, 천천히 정글도를 위로 치켜들며 한 칼 날릴 것 같은 태도를 취한 순간이었다.
“자, 잠깐!”
에? 이, 이 음성은……?
내가 흠칫 놀란 건 낯익은 음성이라던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성별 판별이 어려울 정도로 가는 음색의 ‘어린아이’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려요! 우린 당신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같은 음성이 그렇게 말하더니, 곧 산길 위쪽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몽몽. 조명 풀가동.>
우리 차는 라이트 부분도 전부 개조되어 있어서 몽몽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전자 시스템에 의해 숨겨진 라이트까지 전부 켜면 보통 승용차의 서너 배 거리와 넓이를 밝힐 수가 있었다.
역시 한 명은 어린아이…! 그리고 또 한 명은… 금발의 백인. 하여간 어른 남자…? 음.. 아직 거리가 멀어서 더 자세히는 알기 어렵지만, 일단 외 견상 둘 다 ‘전투원’ 느낌은 아닌 것 같군.
남자와 어린아이는 라이트가 갑자기 밝아지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눈이 부시다는 몸짓을 하더니, 곧 다시 걸음을 옮겨 우리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 했다. 나와 대교도 마주 걸음을 떼기 시작하며 거리는 두 배로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짧고 짙은 흑발이지만 분명 백인 소년인데, 얼굴이 길고 왠지 암울한 느낌의… 다소 특이한 인상의 소년이군. 남자 쪽은… 금발의 백 인이며 의외로 부드러운 눈웃음이 잘 어울리는 중후한 신사 풍의 중년・・・ 어? 자, 잠깐? 저 남자 손가락의 저건 설마………
짝! 짝! 짝!
외견상 사람 좋은 백인 신사 풍의 남자가 걸어오며 뜬금없이 박수를 쳤다.
“역시~ 훌륭해! 몽몽이라고 하던가? 자네가 그 미래의 놀랍고도 위대한 피조물에게 붙여준 이름이 말이야.”
역시 이 남자, 몽몽을 잘 안다. 게다가 나에게 대뜸 하대를 하는군 그래. 아주 자연스럽게.
“역시 그 몽몽이 우리의 가장 최신 버전 장비까지 간파한 거겠지? 아~ 미안, 미안! 자네들, 미래의 로봇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능력의 초인 커플 을 무시하는 건 아니라네.”
쳇! 내 쪽에서 찾아낼 일이 걱정이던 인물이 이렇게 스스로 나타나 준 건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말이지. 이거… 참. 오늘은 너무 예 상 밖이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헷갈리네, 그려.
어느 덧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몇 미터 정도로 가까워졌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양측 다 걸음을 멈추고 마주선 상태였다.
“…놀랐는가?”
그동안 ‘찾아낼 일이 걱정이던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뭐・・・ 전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난 남자의 왼 쪽 손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제3의 눈’을 보며 새삼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무리 나라도 설마 이런 곳, 이런 타이밍에서… ’12인의 사도’ 중 한 명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 어쩐…다? 일단 치고 봐?
비교적 평화적인 모양새로 만난 셈인데도 그런 충동이 먼저 생길 만큼, 12인의 사도는 나에게 열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후 상황 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행동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난 이 사도를 제대로 만난 건 처음인 건데…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왠지 아주 낯설지만은 않아. 뭐… 지난번에 내가 천지파멸식(天地破 滅式)으로 날뛸 때・・・ 그때 12인의 사도 모두에게 칼질하면서 ・・・ 막연하게라도 이 자도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해도… 음? 뭐지? 이 이상한 기분 ……?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첫 번째이자 두 번째 만남…! 혹은 두 번째이자 첫 번째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