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1화 : 학관 풍운(3)
학관 풍운(3)
“다들 반갑다, 앞으로 일 년간 너희들의 교육 을 책임지게 될 심학규다. 오늘은 첫날이니 방 학 숙제만 검사토록 하겠다. 안 해 온 놈들은 자 진해서 뒤로 나가고, 숙제를 열심히 해 온 관도 들은 내 앞으로 나오도록.”
몇몇 관도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뒤로 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심학규의 왼손에 들 려 있는 사애를 향해 있었다.
뒤이어 앞줄부터 필사본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필사 분량이 다섯 권이나 되다 보니 그 두께가 상당했다.
필사본을 받아 든 심학규는 매의 눈으로 미리 입수해 둔 관도들의 필체와 필사본에 적혀 있 는 필체를 하나씩 비교했다. 대리 필사 여부를 가려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자식, 단단히 겁먹은 얼굴이네. 하긴 다른 사 람도 아니고 적포사신이니까. 근데 꿈에나 알 까, 저 양반이 보기와 달리 덜렁댄다는 걸.’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무는 초무석을 보며 설우 진은 속으로 웃었다.
그는 진즉부터 청월반의 학사가 심학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필사 숙제를 할 때에도 그에 걸맞은 꼼수를 부렸다.
그리고 그 꼼수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확인 할 시간이 됐다. 심학규가 그가 낸 필사본을 손 에 쥔 것이다.
“괘, 괜찮을까?”
옆에 앉아 있던 마도요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걱정 마, 절대 눈치 못 챌 테니까.”
설우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잠시 후, 심학규가 필사본을 책상에 내려놨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설우진이 누구지?”
마도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락없이 들켰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설우진은 태연하게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호오, 네가 우진이로구나. 한 획 한 획 정성 이 들어간 필사본 아주 인상 깊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기 바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설우진이 환한 미소로 답했다.
“휴우, 다행이다. 영락없이 들키는 줄 알았어.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뭐, 간단해. 학사님이 보실 부분만 이 몸이 직접 썼거든.”
설우진이 부린 꼼수는 사실 매우 간단했다.
필사본의 앞부분이 되는 첫 번째 책은 자신이 직접 필사를 하고, 나머지 네 권은 마도요를 비 롯한 아이들에게 맡긴 것이다.
“학사님이 그 부분만 보실 거란 건 어떻게 알 았어?”
“음, 그냥 촉이 왔어. 대저 소문이란 건 과장 되거나 왜곡되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소문과 반대로 학사님도 의외로 허점이 있지 않을까 미뤄 짐작한 거야.”
“이야,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마도요가 존경 어린 눈빛으로 설우진을 바라 봤다.
펑펑펑.
둔탁한 격타 소리가 청월반 너머로 울려 퍼졌 다.
숙제를 해 오지 않은 관도들과 대리 필사를 하다 걸린 관도들에게 내리는 심학규의 사랑의 매였다.
“너희들은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다. 학문을 배우겠다고 들어온 놈들이 숙제를 빼먹고, 심 지어 대리 필사까지 해? 오늘 네놈들의 그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바로잡아 주마.”
심학규의 팔이 힘차게 돌았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학창의 사이로 힘줄이 사납게 도드라졌다.
두툼한 살점 위로 사애가 용맹을 떨쳤다.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초무석은 사애 의 끝자락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의 전율에 두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설우진,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절대 가만 안둬’
초무석은 원망의 화살을 엉뚱한 데 돌렸다.
한가로운 오후.
수업을 마친 관도들이 하나둘 연무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자 관도들은 쪼그려 앉아 열 심히 공깃돌을 굴렸고, 남자 관도들은 연무장 외곽에 장대를 세우고 그 사이에 구멍이 나있는 그물을 설치했다.
‘축국이라도 한판 하려는 모양이네.’
설우진의 시선이 그물에 꽂혔다.
축국은 낭인 시절 무료함을 달래 주던 최고의 놀이였다. 공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탓이었다.
“우진아.”
갑자기 향기로운 향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누구지?’
뒤를 돌아보니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분을 칠한 듯 뽀얀 피부에 얼굴의 반을 차지 할 만큼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흐릿했던 기억 속의 얼굴과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민예상.’
가슴 한구석이 잘게 요동쳤다.
철없던 시절, 남몰래 사모의 감정을 품었던 이가 눈앞의 소녀였다.
“너무해, 아까부터 계속 이름을 불렀었는데.”
“아,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고.”
“방학은 잘 보냈어? 난 아버지 따라 호북성 전역을 누비고 다녔는데, 볼거리가 많아서 하 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니까. 특히 노을 진동호의 야경이 정말 예뻤어.”
민예상이 두 손을 맞잡고 소녀 감성을 폭발시켰다.
‘계집애라 그런지 되게 말 많네.’
그녀의 조잘거림이 쉼 없이 이어지자, 설우진 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첫사랑의 기억은 이 미 삼십 년의 간극으로 희석된 지 오래였다. 그에게 지금의 민예상은 설렘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어린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우진아, 바로 집에 갈 거 아니면 우리 애들이 랑 같이 놀자. 오랜만에 손 좀 풀어야지.”
어째 등골이 싸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말하는 손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애들이 다 너 기다리고 있어.”
민예상이 설우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데려간 곳은 연무장 구석 자리였다. 신기하게도 그곳은 땅이 반질반질했다. 일부러 돌을 골라낸 건지 바닥에는 고운 흙모래만 깔 려 있었다.
“어서 와, 우진아.”
민예상 또래의 소녀들이 짜기라도 한 듯 그에 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엄지손톱 크기만 한 동그란 돌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마지막 선수 입장했으니까 바로 시작하자.”
민예상이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다.
이에 다섯 소녀들도 저마다 자리를 잡고 빙둘러앉았다.
“우진아, 뭐 해. 빨리 와서 앉아.”
멀뚱히 서 있던 설우진을 소녀들이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설우진은 애써 그 부름을 외면했다.
‘니미, 천하의 낭왕이 공기놀이라니, 그게 말 이 돼? 우진아, 넌 어쩌자고 이 나이에 계집애 들하고 어울렸냐. 사내라면 모름지기 축국 같 은 놀이를 즐겼어야지.’
설우진은 전생의 자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천하를 위진시켰던 낭왕의 어린 시절 취미가 공기놀이였다니. 다시 생각해도 낯 뜨거운 과거였다. 당장의 마음 같아선 경공이라도 써서 이 자릴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야, 설계집! 다 큰 사내놈이 왜 계집들 노는데 기웃거리냐? 사내 망신 그만 시키고 이쪽으로 건너와라. 축국으로 제대로 사내다움을 겨루자.”
연무장 한복판에서 초무석이 설우진을 도발했다.
평소 같으면 그 소리에 발끈했을 텐데, 오히 려 지금은 그의 도발이 고맙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