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5화 : 전생 인연(3)

랜덤 이미지

낭왕전생 1권 – 15화 : 전생 인연(3)


전생 인연(3)

“어머니, 저도 보내 주세요.”

“결아, 넌 아직 어려서 안 돼.”

“형하고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그래요! 그리고 정 불안하면 어머니가 함께 가면 되잖아요.”

설우결은 설우진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온 뒤, 매일같이 어머니 주변을 맴 돌며 외가에 보내 달라 떼를 썼다. 몇 번이나 그 녀가 안 된다고 강조해 얘길 했지만 소용없었다.

“너 설마 형 때문에 이러는 거니?”

“……”

“결아, 형이 키가 큰 건 클 나이가 돼서 큰 거 지 무슨 대단한 약을 먹어서 큰 게 아니야. 너희 외조부님이 아무리 용한 의원이래도 그런 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

“거짓말! 외할아버지는 황궁에서 황족들의 건강을 책임졌던 의원이잖아요.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키 좀 키우는 건데 왜 못해요?”

설우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 낼 듯 씩씩댔다.

단순히 철없는 어리광이라 치부하기에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혹시, 학관에서 누가 괴롭히니?”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설우결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우, 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이 어미랑 함 께 가자꾸나. 아버지를 뵌 지 오래되기도 했고.”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단다. 외가에 도착 하거든 방금 전에 이 어미한테 하지 못한 말 속 시원히 털어놓는 거야. 할 수 있지?”

“응.”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주호장에서 양껏 술을 마신 설우진이 시전 골 목으로 들어섰다. 그 정도 마셨으면 걸음걸이 가 불안해야 정상인데 신기하게도 그의 발걸음 은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역시, 벽뢰진천의 효용은 대단해. 치사량에 근접하게 마셨는데도 단숨에 주정을 날려 버렸잖아.”

설우진은 주호장을 나서면서 한바탕 뜀박질을 했다.

벽뢰진천의 힘을 활용해 주정을 밖으로 뽑아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주정은 밖으로 빼내기 도 전에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벽뢰진천의 뇌기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주정을 태워 버린 것이다.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설우진은 기분 좋게 집 으로 향했다. 인적이 끊긴 시전 골목은 음산했 다. 귓가에 들려오는 건 그의 발소리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서 귀신이, 아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누구한테 된통 얻어터졌는지 얼굴은 멍투성이에 입 주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뒤이어 한 떼의 무리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험상궂은 인상에 과하게 올라간 어깨.

풍야시전을 장악하고 있는 풍야패였다.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쫓기는 사람과 쫓는 이들의 사연을 모르기에,

그런데, 쫓기던 이의 등이 설우진의 눈에 꽂혔다.

불룩 솟아 있는 형태, 곱사등이었다.

‘막동이냐?’

설우진의 두 눈이 사납게 요동쳤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던 자신을 진짜 낭인으로 만들어 준 이가 막동이였다. 낭인이라는 놈이 착해 빠져서는 아무리 모진 말을 해도 바보처 럼 웃기만 했다.

그때는 데리고 다니기 귀찮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동이가 죽고 난 뒤 알게 됐다.

그에게 많은 걸 의지하고 있었단 사실을.


“부두목, 누가 길을 막고 있는데요.”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해. 길이 막혔으면 뚫으면 되잖아.”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 시간에 시전 골목에서 기웃거릴 놈이면 뻔하지. 그냥 치워 버려.”

민머리 사내 막철이 거칠게 명령했다.

그는 지금 단단히 뿔이 난 상태였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몰래 장사를 한 곱사등이가 그 원인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잡히면 그 곱사등을 분질러 평생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마.’

막철은 이를 갈며 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런데 상황은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길을 열겠다고 나섰던 부하들이 하 나같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막철이 옆에 서 있던 심복, 모개복의 어깨를 붙잡고 급하게 물었다.

“그, 그게 공격을 한 쪽은 우리 애들이었는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설마 독?”

막철이 굳은 표정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독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독의 징후는 보 이지 않았다.

‘저 애새끼 정체가 뭐지? 무기를 든 것도 아니 고, 적수공권으로 우리 애들을 쓰러뜨렸어. 저 만한 나이에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면 내가 모를 리 없는데…………’

막철은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비록 지금은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지만, 그도 한때는 정식으로 검을 수학했던 무인이었다.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 검술 실력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놈은 내가 맡는다. 넌 뒤에서 눈치를 보다 빈틈이 생기면 이걸 던져라.”

막철이 검붉은 빛이 감도는 수리표를 건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흑상에게 구매한 암기였다.

그 바닥에선 가장 저렴한 놈으로 통해도 뒷골 목에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놈, 죽었다고 복창해라. 우리 풍야패에 맞선 이상, 이 시전을 걸어서 나갈 수는 없다.”

막철이 검을 머리 위로 곧추세웠다.

그가 배운 검술은 패검관에서 비롯된 웅패검이다.

공격 일변도의 검으로 한번 상대를 정하면 쓰 러질 때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게 특징이었.

부웅.

막철의 검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일검에 설우진을 베어 버리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느껴졌다.

“양아치가 검을 든다고 검객이 되나. 그런 느려 빠진 검, 눈에 훤히 읽힌다고.”

설우진이 왼발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간발의 차이로 막철의 검이 옷깃을 스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동작이 컸던 탓에 옆구리가 자 연스럽게 열렸다.

설우진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이 막철의 옆구리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퍽.

막철의 몸이 속절없이 담벼락으로 날아갔다. 기세 좋게 덤빈 것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결과였다.

쨍그랑.

담벼락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검은 그림자가 설우진의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수리표를 들고 암습의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모개복이었다.

“양아치들 의리란 참……………”


숨이 턱턱 막혔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지도록 뛰 고 또 뛰었다. 다행히 따돌렸는지 더 이상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휴우, 그 돈으로 그냥 자릿세를 낼 걸 그랬나…….”

막동이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뜻하지 않게 재신을 만나 얻 게 된 은전 한 냥. 그는 고민 끝에 어머니 약을 구매하는 데 사용했다. 남은 거스름돈으로 자 릿세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약값이 너무 비싸게 나왔다. 은전 한 냥을 내고도 거슬러 받은 돈이 철전 닷문에 불과할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그 돈만 가지고 다시 시전으로 향했다. 풍야패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면서.

하지만 그 마음은 하늘에 닿지 않았다.

장사를 개시한 지 불과 일각여 만에 풍야패가 들이닥친 것이다.

“수레는 무사할까? 그게 있어야 다른 곳에서 라도 장사를 해 볼 텐데.”

막동이는 몸이 그 지경이 돼서도 내일의 장사를 걱정했다. 아픈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어린 가장의 남다른 책임감이었다.

“어이, 몸은 좀 괜찮아?”

몸을 추스르고 다시 수레를 찾아 움직이려 할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동이는 혹시나 풍야패가 아닐까 우려돼 담벼락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겁먹을 거 없어. 나 아까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야.”

달빛 아래 설우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제야 막동이는 담벼락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저, 저기, 아까 그자들은 어떻게 됐나요?”

막동이가 조심스럽게 풍야패의 행방을 물었다.

“한 놈 빼고 다들 푹 잠들었어.”

‘설마, 저 사람이 풍야패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왜, 안 믿겨? 빡빡이 그 자식이라도 네 눈앞에 대령해 줄까?”

설우진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막철을 언급했다. 이에 막동이는 손사래를 치며 뒤늦게 감

사의 인사를 전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은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딱히 널 구해 주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질 것 없어.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설우진은 막동이의 성격을 아는지라 최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 애썼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 착한 막동이는 언제고 구명의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아까 그놈들한테 들으니까 시전에서 만두를 판다고 하던데. 장사는 좀 돼?”

“음………… 아무래도 어머니보단 손맛이 떨어져 서 그런지 손님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요즘 손님들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잖아요.” 

“그럼 까다로운 입맛을 잡을 수 있는 특별한 만두를 만들면 되잖아. 예를 들어 생선 살을 넣 은 어육 만두라든지.”

“어육 만두요?”

막동이의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만두였다.

“이쪽에선 동호가 가까워서 생선이 많이 잡히잖아. 그것들을 고기소 대신 삶아서 갈아 넣으면 꽤 맛있을 것 같은데………….”

‘자식, 그걸로 대박 한번 내라. 정확히 십 년 뒤에 중원에 만두 열풍을 불러일으킨 음식이니까?’

설우진은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미래에 유행 할 어육 만두를 알렸다.

어육 만두는 십 년 뒤, 광동에서 처음 그 존재 가 알려지게 된다. 해동선단의 단주가 해적들 의 습격으로 외딴섬에 표류했다가 그곳에서 원 주민들이 생선 살로 만두소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후일 상품화한 것이다.

그 이후로 어육 만두는 기존의 고기만두와 더 불어 만두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정말 맛있을까요?”

“맛있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배 터지도록 먹어 봤으니까.’

풍야시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풍 야패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밤, 부두목 막철과 행동대장 넷이 의문의 자객에게 습격을 당했다 토로한 것이다.

“놈의 인상착의는 기억나느냐?”

“그, 그게, 어둠 속에서 갑자기 공격을 당한지 라………….”

“다섯 놈 중에 하나도 얼굴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풍야패의 두목 호걸륜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맨주먹 하나로 풍야패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 이었다. 그만큼 자존심도 셌다.

“고간! 네 생각은 어떠냐?”

호걸륜이 자신의 오른팔 고간에게 자문을 구했다.

고간은 조직이 완성된 뒤에 그가 직접 데려온 인재였다. 흑도패답지 않게 두뇌 회전이 빨라 조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종종 의견을 묻곤 했 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간은 원하는 답을 내놨다.

“그간의 정황만 놓고 보면 진호패 쪽에서 움 직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번 상천로에 새롭게 들어선 십이월루의 운영권을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일을 벌인 것 같습니다.”

“으음, 진호 그놈이 속이 좁긴 해도 야습을 할 정도로 치졸하진 않은데.”

“사람 속은 배를 갈라놓고 봐도 알 수 없는 법 입니다. 이참에 아예 판을 크게 키우시지요.”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데.’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막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애새끼한테 당했다 고 하면 욕을 먹을까 봐 야습을 당했다고 거짓 말을 한 것인데, 그것이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튀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