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27화 : 전복위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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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1권 – 27화 : 전복위화(4)


전복위화(4)

“크큭, 고놈 발재간이 제법이구나. 요 근처에 서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온 게냐?”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거지 왕초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낭왕으로 강호에 한참 명성을 떨칠 무렵, 그는 천중 상단주의 백수연에 초대를 받았었다. 안 좋은 감정이 많은 터라 그냥 무시하려 했지 만 수하들이 하도 보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백 수연에 참석했다.

그런데, 백수연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무색 하게 잔치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진수성찬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손님을 초대해 놓고 개 고기가 웬 말이란 말인가.

한데, 더 기막힌 건 단주라는 자의 복색이었 다. 명색이 잔치의 주인공인데 누가 버린 걸 주 워 온 듯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딱 지금 눈앞의 노인처럼.

“상계에 명성이 자자한 강 단주님을 이렇게 뵙게 돼 영광이에요. 전 설가 포목점의 설우진 이라고 해요.”

‘호오, 어린놈이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군. 단 번에 날 알아보다니.’

노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스쳐 지나갔 다.

“흠, 설가 포목점에서 내게 무슨 볼일이지?”

“단주님의 돈을 불려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다 망해가는 포목점이 무슨 수로.”

노인, 아니 천중 상단주 강무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닌 척했지만 그는 이미 설가 포목점과 대원 포목점 간의 다툼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설우진은 냉담하게 반응하는 강무호 앞에 한 장의 영웅건을 내밀었다. 영웅건에는 입에 여 의주를 문 용이 구름 위를 자유롭게 노닐고 있 었다.

“이게 어떻다는 거냐?”

강무호는 영웅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꾸미는 데 돈 쓰는 걸 죽기보다 싫어 하는 양반이니 영웅건에 눈이 갈 리 없었다. “단주님이 포목점을 찾아온 손님이라면 이 영웅건을 얼마에 사시겠어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다 이유가 있어서 묻는 거예요. 단주님의 안목을 한번 확인시켜 주세요.”

설우진이 강경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에 강무호는 영웅건을 들고 요리조리 재질 과 그 안에 들어간 문양을 살폈다. 감정을 하는 자세는 꽤나 진지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이딴 건 줘도 안 갖겠지만 굳이 값어치를 매기라면, 철전 십 문 정도가 적당할 듯싶구나.” 

강무호의 평가는 정확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무명 영웅건은 평균적으 로 철전 십 문 내외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그럼, 이것도 값을 매겨 주세요.”

설우진이 새로운 영웅건을 꺼내 앞으로 내보 였다. 강무호는 귀찮은 듯 억지로 손을 뻗어 영 웅건을 쥐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 나왔다.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아이처럼 두 눈이 뜨겁게 빛났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지, 수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기백이 넘쳐 나잖아. 이런 괴이한 자수 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강무호는 한눈에 자수의 비범함을 읽어 냈다. 그는 따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눈썰미 가 무림의 원로 고수들만큼이나 대단했다. 이 는 오랜 상단 운영을 통해 축적된 경험의 자산 이었다.

“이 물건, 누구 작품이냐?”

강무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인의 촉이 이 물건, 돈이 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값을 매겨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고놈 참, 맹랑하구나. 그래, 아쉬운 건 내 쪽 이니. 만약 내가 이 영웅건을 산다면 은자 열 냥 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다.”

철전 십 문이 은자 열 냥으로 껑충 값어치가 뛰었다.

겉보기엔 크게 다를 게 없는 영웅건인데, 참 으로 신기할 노릇이었다.

“어르신이라면 두 영웅건의 차이를 아시겠지 요?”

“흠, 이놈아, 내가 단주 자리를 거저먹은 줄 아느냐. 앞서 보여 준 영웅건은 시전에서 굴러 다니는 싸구려고, 요 영웅건은 장인의 혼이 깃 든 명품이다.”

“역시 소문대로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그럼 이 명품, 누가 만들었을까요?”

설우진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노회한 대상인답게 강무호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서, 설마 네 작품이란 말이냐?”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이에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요 손재주 하나만큼은 타고났거든요”

설우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쪽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바늘을 쥐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 에 굳은살이 선명하게 박여 있었다.

‘설가 포목점이 무슨 수로 대원 포목점을 흔들 었나 했더니, 그 답이 눈앞에 있었군.’

강무호는 설가 포목점과 대원 포목점 간의 다 툼을 보고서로 접하면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들 었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설가 포목 점이 대원 포목점을 밀어내는 상황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들여오는 포목의 질이 비슷한 상태 에서 규모가 큰 대원 포목점이 설가 포목점에 비해 가격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공식이 깨져 버렸다. 열세 살 소년에 의해.

“단주님, 돈을 불려 드리겠단 약속,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에요. 저희 포목점에 투자해 주시면 그 투자금, 최소 두 배로 불려서 돌려 드릴게요.”

“난 입으로 하는 약속은 믿지 않는다. 네 의지 가 그리 확고하다면 서면으로 그 내용을 작성 토록 하자. 비월.”

강무호가 허공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놀랍게도 그의 등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힘든 은신의 경지였다. 그런데 의외로 설우진의 표 정은 담담했다. 마치 그가 나올 걸 예상했던 사 람처럼.

‘오랜만에 보는군, 암왕. 저 노인네 뒤치다꺼 리 하느라 고생이 많지?”

설우진은 회귀 전, 비월과 짧은 인연을 가지 고 있었다. 따로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고, 매 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십왕회에서 의례적인 인 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때도 꼭 필요한 경우 가 아니고선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쪽으로 등 좀 대 봐라.”

비월에게 문방사우를 건네받은 강무호가 계약서를 흔들며 설우진에게 몸을 숙이라 손짓했다.

설우진은 무릎을 꿇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를 구해야 했기에 두 눈 딱 감고 강무호의 발아래 몸을 숙였다.

슥슥 슥슥.

강무호는 그 위에서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추레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그의 필체는 상당 히 수려하고 깊이가 있었다.

빠르게 계약서 두 부가 완성됐다. 강무호는 똑같이 작성된 계약서 중 한 장을 설우진에게 내밀었다.


갑(천중 상단)은 사월 초하루를 기점으로, 을( 설가 포목점)에 황금 일천 냥을 투자한다.

을은 오 년의 기한 내에 투자 원금의 세 배를 갑에게 상환해야 한다. 만약 그 기한을 넘길 시 에는 상환금액이 배로 늘어난다.

…….중략…….

마지막으로 갑이 나서서 을과 대원 포목점의 분쟁을 중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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