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0화 : 사제 재회(2)
사제 재회(2)
“그나저나 내가 떠나고 난 뒤에 그 빈자리는 어떻게 채우지? 어머니 혼자선 버거울 텐데.”
늦은 오후, 설우진이 붉은색 수실 뭉치를 들고 바쁘게 집으로 향했다. 요 며칠 그는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생겨날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 민하고 있었다.
설가 포목점은 설우진과 여소교, 두 사람의 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데 우진은 학업을 위 해 삼 년 후에는 무한을 떠나야 했다. 핵심 인력 의 절반이 빠지는 셈인데, 이를 해결하지 않으 면 주문이 들어와도 물건이 없어 못 파는 난감 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날 대신할 사람이 필요해. 누구 마땅한 사람없나?”
설우진은 회귀 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후일 뛰어난 손재주로 명성을 떨칠 사 람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세 명이 유력한 후보 군으로 좁혀졌다. 한 사람은 무림인, 나머지 둘 은 일반인이었다. 셋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손재주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 의 마음은 이미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역시, 신수검희가 좋겠어.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집도 가깝고.”
‘가슴도 크고………..’
설우진의 얼굴에 음충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신수검희 단예는 보타암주의 막내 제자로 강 호를 종횡했던 유명한 여협이다. 본래는 무림 과연이 없었으나, 그녀의 가문인 형주단가가 정쟁에 휘말려 몰락하면서 여인지문인 보타문 과 연을 맺었다.
그녀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신 수검희는 그녀의 뛰어난 두 가지 재주를 이름 인데, 하나는 보타암의 검술이고 다른 하나는 자수였다.
그녀는 스스로 옷을 지어 입었다.
남이 만든 옷은 눈에 차지 않아서다. 이를 두 고 일부 여인들은 시기 어린 질투를 하기도 했 지만 대다수는 그녀와 친분을 맺고자 노력했다
“시기적으로 이맘때쯤 형주단가가 정쟁에 휘 말렸을 거야. 관기로 끌려갈 뻔했던 걸 보타암 주가 구했다고 했으니, 관인을 매수해서라도 미리 단예를 빼내 와야 해.”
설우진은 결심을 굳혔다.
단순히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여인이라서가 아 니었다. 단예는 무림인답지 않게 착했다.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함부로 그 힘을 과시하지 않았고,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상대 가 누구든 정중히 예를 갖췄다.
‘일개 낭인 신분에 불과했던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 그녀의 성품이라면, 내가 떠난 가 족의 빈자리를 훌륭히 메워 줄 수 있을 거야. 그 리고 잘하면 진짜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설우진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직 단예를 데려온 것도 아닌데, 혼자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그때 그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풍야패에 설우진의 처리를 부탁받은 공손월이었다.
‘백사문의 졸자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 쪽하고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데.’
설우진은 공손월을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공손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놈이 설우진이냐?”
“응.”
“어린놈이 말이 짧네.”
“흥, 너도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바쁘니까 용건 있으면 빨리 얘기해.”
설우진이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이에 공손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린놈이라 손에 사정을 두려고 했더니 도저 히 안 되겠구나. 내 손 속이 맵다 원망 마라.”
공손월이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정형화된 보법을 밟으며 설우진의 전 면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갔다. 풍야패와는 확실히 수준이 다른 움직임이었 다.
그런데, 설우진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였 다. 그는 감각도의 선행 무공인 야수안을 익혔 다. 일류에도 못 미치는 공손월의 움직임 따위 가볍게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공손월은 기세 좋게 주먹을 내뻗었다. 백사문의 절기 중 하나인 와 풍이었다. 와풍은 손목을 비틀어 회전력을 더 하는 권법으로 무리가 특출하진 않지만 실전에 서 꽤 위력이 대단했다.
쉬익.
공손월의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설 우진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일단 이 한 방으로 기세를 꺾어 놓은 뒤 파상공세를 취할 요량이 었다.
한데, 주먹이 복부에 닿으려는 찰나.
설우진의 몸이 팽이처럼 한 바퀴 돌았다. 야 수안으로 주먹의 궤적을 읽어 낸 뒤, 힘이 가해 지는 마지막 순간에 회피 동작을 펼친 것이다. 덕분에 공손월의 주먹은 맥없이 허공을 갈랐 다.
커다랗게 드러난 빈틈.
그런데 설우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뜻 반격을 해 오지 않았다.
‘왜 공격을 않는 거지?’
공손월은 의아한 얼굴로 설우진을 바라봤다.
이에 설우진이 환하게 웃으며 손끝을 내보였 다. 손끝에는 붉은 수실이 쥐여 있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불안감.
아니나 다를까, 목덜미에서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크윽.”
깜짝할 새, 붉은 수실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놀란 공손월은 다급히 손을 뻗어 수실을 붙잡 았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수실은 끊어질 기미 를 보이지 않았다. 천잠으로 만든 실도 아니고 그냥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실인데, 그 질기기가 마치 쇠심줄 같았다.
“무,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사술이라니, 너도 기공을 익혔다면 잘 알 거 아니야? 사물에 기를 불어넣으면 어떻게 되는 지.”
“서, 설마 내기 발출?”
“잘 아네. 그럼 이 상태에서 힘을 더 주면 어떻게 될까?”
설우진이 손끝에 힘을 더 실었다.
수실이 거칠게 살점을 파고들었다. 공손월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 했지만, 강철처럼 단단 해진 수실을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누가 이일을 사주했는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손월이 황급히 소리쳤다.
상관의 명령도, 풍야패의 돈도 죽음의 공포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설우진은 잠시 수실을 느슨하게 풀고 공손월 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손월은 필사적으로 이번 일이 진행된 과정을 상세히 풀어냈다.
‘하아, 이 새끼들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 찮을 판에 감히 나한테 자객을 보내? 어디 숨었 는지 잡히기만 해 봐라. 그때가 네놈들 제삿날 이 될 거다.’
설우진은 풍야패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아무리 원하는 물건이 안에 없었 다고 해도 약속한 돈은 줘야지. 뭐, 목숨을 살 려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고? 에이, 똥물 에 튀겨 죽일 놈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풍야시전 한복판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 기는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하게 밀어 버린 민머리와 양쪽 뺨에 사이 좋게 새겨진 흉터가 그간의 살아온 세월이 녹 록지 않다는 것을 짐작게 했다. 그 험악한 인상 탓인지 넉살 좋게 호객 행위를 하던 상인들도 그에게만은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듯 그가 지나는 방향에는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사내의 발걸음이 멈춰 선곳은 낯익은 대문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