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2화 : 사제 재회(4)
사제 재회(4)
“사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설우진이 주천기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에 주천기는 나 보란 듯이 설우진 쪽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를 감쌌다.
“팽가야, 얼마 전에 들인 내 제자다.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똘똘하고 야문 녀석이지. 너도 더 나이 먹기 전에 이런 제자 하나 들여라. 뭐, 그 지랄맞은 성격에 누가 제자가 될까 싶다마는.”
주천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팽천호 에게 설우진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우진이라………… 합니다.”
팽천호에게 인사를 건네던 설우진이 순간적 으로 움찔했다.
평생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그 얼굴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 사부……’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댔다.
전생의 기억 속에 그는 지독한 원망의 대상이 었다. 원치 않은 낭인의 길로 이끈 것도 모자라 매일같이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구타를 일삼았 다. 그때는 정말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과거로 회귀한 후.
그 원망의 감정들이 많이 희석됐다.
어느새 사부와 보낸 시간들을 하나의 추억이 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사부의 얼굴이 그리움이란 낯선 감정과 함께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쯧쯧, 어린놈이 참 보는 눈도 없다. 술에 미 친 귀신을 스승으로 삼다니.”
설우진이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팽천호는 혀를 차며 그 선택을 힐책했다.
‘저 거침없는 말투는 여전하시네. 예전에 저 말투에 상처도 많이 받았었는데.’
“올해 나이가 몇이냐?”
“열셋입니다.”
“무슨 보약이라도 주워 먹었냐? 열세 살 덩치가 아닌데.”
‘사부 덕분에 뇌정이라는 아주 맛난 보약을 먹 었습니다.”
“신소리 그만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아마 지금쯤 가려가 주안상을 거하게 차려 놓 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팽천호가 설우진에게 관심을 보이자 주천기가 억지로 그의 팔을 잡아끌고 안으로 데려갔
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팽천호는 설우진의 몸 을 면밀히 살폈다.
‘운 좋은 놈은 뒤로 넘어져도 금괴에 머리를 받는다고 하더니, 주천기 저놈이 딱 그 꼴이군. 대체 어디서 저런 인재를 제자로 들인 거야? 떡 벌어진 어깨 하며, 균형 잡힌 두 다리. 무공을 익히기엔 최적화된 몸이야.’
팽천호는 솔직한 말로 욕심이 났다.
주천기에게 놀림을 당할까 봐 따로 얘기는 안 했지만 그도 나름대로 세상을 떠돌며 자신의
칼을 전수할 제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눈에 차는 이가 없었다. 무재가 출중하다 싶으면 성정이 무르고, 독기 가 좀 있다 싶으면 재능이 떨어졌다.
“꼬마야, 남자는 모름지기 칼이 최고다. 천기 놈처럼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히는 것보단 나처 럼 한길만 묵묵히 추구하는 게 좋다. 언제라도 내 칼을 배우고 싶거든 말해라. 널 천하제일의 도객으로 만들어 주마.”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팽천호는 끈질기게 설우진과 눈을 맞췄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설우진은 오른쪽 손을 가볍게 펼쳤다 쥐었다. 도병을 쥐는 파지법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뒤, 한 번도 칼을 쥐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뇌리엔 감각도를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천기야, 네 제자 놈 나한테 넘겨라.”
“이놈아, 취하려면 곱게 취해라. 내 제자가 무 슨 물건이냐? 너한테 넘기고 말고 하게.”
거나하게 벌어진 술판.
그 한복판에 주천기와 팽천호가 서로를 노려 보며 맹렬하게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술자리 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술상 한구 석에 빈 술병들이 사이좋게 서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렇게 집 잃은 강아지처 럼 돌아다닐 셈이냐? 네 나이도 올해로 마흔이 다. 더 나이 먹기 전에 팽가의 대를 이어야지.” “아직 팽가도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럼 이대로 팽가의 대를 끊을 참이냐?”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본시 한 가문을 대표하는 절기란 세대를 이어 가면서 서 서히 완성되기 마련이다. 단적인 예로 남궁세 가의 제왕검형을 봐라. 제왕검형은 남궁세가의 초대 시조인 남궁천이 그 뼈대를 세우고, 오 대 에 걸쳐 살을 덧붙였다. 팽가도 역시 그런 식으 로 완성해 가면 되는 거다.”
“그건 남궁세가처럼 팔자 좋은 가문에나 해당 되는 얘기지. 그리고 냉정히 말해서 나 같은 늙 다리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냐.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와 칼 한자루가 전분데.”
“인마, 어째서 네가 가진 게 그것뿐이야. 여기 널 목숨처럼 생각하는 친구가 있잖느냐.”
“큭, 미친놈.”
팽천호는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속내는 눈물 나게 고마웠다.
십수년 전, 그의 가문은 정쟁에 휘말려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가문의 장자였던 그는
산해관 너머에서 장교로 군역을 치르고 있었다.
당연히 군으로도 소환령이 내려왔다. 졸지에 죄인의 신분이 된 그는 형부로 끌려왔다.
지인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모두가 차갑 게 돌아섰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 주천기만은 그의 편에 서서 끝까지 방면을 청했다. 덕분에 팽천호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주호장의 부엌에서는 설우진과 주가려 가 요리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술안주로 내갈 요리를 만드는 것인데, 칼을 잡은 이는 집주인인 주가려가 아닌 설우진이었다.
타다닥.
도마에서 칼날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길쭉하게 잘려 나간 고추들이 솥 안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넓적하게 썰어 낸 쇠고기가 도 마에 올라왔다. 붉은빛이 살아 있는 것이 꽤나 싱싱해 보였다.
이에 옆에서 보조를 하고 있던 주가려가 면이 넓적한 식칼을 내밀었다. 고기를 썰 때 사용하 는 전용 칼이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존에 사용하던 식칼을 고수했다.
“그 칼로는 썰기가 어려울 텐데?”
“진정한 고수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야. 두 눈 크게 뜨고 잘 봐 둬. 내가 이 무딘 칼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우진이 야채를 썰 때 사용했던 무딘 식칼을 쇠고기에 살짝 얹었다. 육고기의 특성상 날이 서 있지 않으면 썰기가 힘듦에도 그는 끝까지 무딘 식칼을 고집했다.
잠시 후, 설우진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무딘 칼날이 드디어 쇠고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뒤로 좀체 진전이 없었다.
‘역시, 안 되잖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주가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칼질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타다닥.
고추를 썰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균일한 크기와 매끄러운 단면.
무딘 칼날로 썰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지, 지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주가려가 도마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쇠 고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설우진은 가늘 게 썰린 쇠고기 조각 하나를 집어 그녀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네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모든 사물에 는 결이라는 게 있어. 이 결을 따라 칼날을 움직 이면 그게 뭐든 손쉽게 벨 수 있지. 도끼로 장작 을 팰 때, 결대로 찍어 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야.”
“그 결이라는 건 어떻게 찾는 건데?”
“음, 그건 많이 보고 경험하면 돼.”
‘그럼, 사람도 이 쇠고기처럼 깔끔하게 벨 수 있어.’
설우진은 뒷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