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7화 : 서안 출행(2)
서안 출행(2)
“어머니, 저 물, 아니 저 사람은 뭐예요?”
주호장에서 돌아온 설우진이 가게 입구에서 험악한 인상으로 손님을 마주하는 호걸륜을 가 리키며 물었다. 이에 여소교는 오전에 일어났 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겉모습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 얘기해 줬다.
‘이것들이 지금 무슨 장난질이야?’
설우진의 두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간 정신이 없어서 풍야패에 대한 처리를 미 뤄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풍야패가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
하고서 배짱 좋게 먼저 선수를 쳤다.
“잠시 밖에 다녀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 니 걱정하지 마세요.”
설우진은 그길로 곧장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이런 식의 잔머리를 부릴 놈은 풍야패에서 그 자식뿐이야. 그럼 분명 이 근처에서 동태를 지 켜보고 있을 터.’
설우진의 시선이 맞은편 주루로 향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곳에서 설가 포목점을 살 피던 눈길과 마주친 것이다.
“크, 큰일 났어. 나 방금 그 꼬마 놈하고 눈이 마주쳤다고.”
“호들갑 떨지 말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었네.”
“그러다 맞아 죽으면?”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자네도 보지 않았 나, 그 가공할 무력을.”
고간은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참 주먹패답지 않은 특이한 종자였다.
쾅!
막철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무렵 문이 거칠 게 열렸다. 막철은 반사적으로 양팔을 교차시 키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그게 독이 됐을까. 설우진이 표적이 된 그의 가슴팍 으로 매섭게 오른발을 꽂아 넣었다. 양팔로 충 격을 어느 정도 상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벽 쪽으로 속절없이 날아갔다.
“방금 전에 우리 가게에서 이상한 물건을 봤는데, 혹시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벽에 부딪혀 기절한 막철을 뒤로한 채, 설우 진이 고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칼 을 들지도 않았는데 무시무시한 살기가 고간에 게 집중됐다.
고간의 입술 새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살기에 정신을 놓지 않으려 스스로 혀를 깨문 것 이다.
그 모습에 설우진의 눈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놈이라 여기긴 했지만, 설마 내 살기에 정면으로 맞설 줄이야. 이거 물건인데, 물건’
설우진은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찾아낸 기분 이었다.
무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놈이 그 독기가 남달 랐다. 게다가 이 바닥에선 찾아보기 힘든 의리 까지 갖추고 있었다.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 었다.
낭왕 시절에 그의 곁에는 똑똑한 놈들이 없었다.
싸움은 잘했지만 생각이 단순해 머리 좋은 놈들에게 쉽게 휘둘리곤 했다. 그 한계를 느끼고 책사로 쓸 만한 인재들을 찾으러 중원 곳곳을 누볐지만 그 누구도 낭인의 지낭이 되기를 원 치 않았다.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네 머리 정도면 이 녀석들과 함께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충 분히 알았을 텐데.”
“소, 소협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간이 힘겹게 말을 뱉어 냈다.
그 모습에 설우진은 슬쩍 살기를 풀었다.
“그 이유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이제 겨 우 열세 살에 불과한 어린애야. 내 사람이 돼서 너한테 무슨 득이 될 게 있지?”
·희망입니다. 어쩌면 이 손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고간의 얼굴에 전에 없던 분노와 살기가 어렸다.
이에 설우진은 그에게 쉬이 말할 수 없는 애 통한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다.
“이봐, 복수라는 거창한 목적이면 나 말고 차라리 이름난 세력을 찾아가야지. 가까운 곳에 제갈세가도 있잖아.”
“커다란 세가일수록 개인의 사연에는 무심한 법입니다. 복수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분의 곁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후훗, 날 높게 평가해 줘서 기분이 좋긴 한데 너무 큰 도박 아니야? 내는 네가 기대한 만큼 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나중에 너와 의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잖아.”
“그때는 사람을 잘못 본 제 눈을 탓해야겠지 요. 하지만 제 눈에 비친 소협은 절대 그런 소인 배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고간의 눈빛엔 확고한 신념이 묻어났다.
그 눈을 보면서 설우진은 묘한 흥분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하후휘를 만났을때처럼.
“좋아, 네가 그토록 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면 조건부로 이를 수락하지.”
“조건부라 하시면?”
“간단해, 내가 공부를 하러 떠나 있는 동안 우 리가족 곁에 머물면서 그들을 지켜 주면 돼. 그 것만 잘 수행해 내면 네가 원하는 복수, 화끈하 게 도와주지.”
설우진은 서안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 뒤로 자 꾸 잠을 설쳤다. 자신이 떠난 뒤로 혹시나 가족 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뒤로, 그에겐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났다. 전생에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겹겹이 쌓여 심중의 병이 된 것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협께 약점이 잡혀 있는 풍야패를 활용해 가 족분들을 든든하게 지켜 내겠습니다.”
두 사람은 뜨겁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런 걸 보면 인연이란 게 참 묘했다.
삼 년의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설우 진은 청운 학관과 주호장을 바쁘게 오가며 열 심히 수업을 받았다.
물론 더 심력을 기울이는 건 청운 학관 쪽이었다.
낭인이 된 이후로 그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덕분에 회귀를 한 뒤에도 그의 머리는 겨우 학문의 기초를 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천재들이 득실거린다는 황룡 학관에서 살아남 으려고 그는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에 반해, 주호장에서의 수업은 적당히 눈치 를 봐 가며 배움을 청했다. 한 번 지나쳤던 길이 라 그 뒤를 따라가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덕 분에 애꿎은 막동이만 피를 봤다. 팽천호가 알 아서 잘하는 설우진 대신 여러모로 부족한 막 동이를 붙잡고 극한무도를 수련케 한 것이다. 연무장에서는 매일같이 막동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훈련이 힘들었으면 그 순해 빠 진 막동이가 잠꼬대로 입에 담기 어려운 쌍욕 을 해 댈 정도였다.
설우진이 수업에 전념하는 동안 설가 포목점 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가게 이름이 일 품점으로 바뀌었다.
일품점에서는 포목은 일절 취급하지 않고 완 성된 옷가지와 노리개 등을 전문적으로 판매했 다. 그리고 그 일품점에 ‘총관’이라는 새로운 직 책이 생겨났다. 그 자리에는 설우진의 적극적 인 추천으로 고간이 들어앉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얼굴이 일품점 안자수 공방에 들어왔다. 설우진이 애타게 원했 던 형주단가의 단예였다.
“정말 혼자서 잘 지낼 수 있겠니? 그 먼 타향 에서.”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곳에 도착할 때쯤이 면 제 나이도 열일곱이에요. 그 나이면 제 앞가 림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야죠.”
“그래도 이 어미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혹시라도 그곳에 가서 무시는 당하지 않을지…”
설우진이 서안으로 떠나는 아침.
설가장의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안에 는 새로이 식구가 된 고간과 단예도 있었다.
“황룡학관이 뭐 별건가요. 거기도 똑같이 사 람 사는 곳인데.”
설우진이 슬쩍 고간을 쳐다봤다. 이에 고간이 능청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사모님. 황룡 학관이 대외적으로 는 뛰어난 인재 양성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분명 대단 한 인재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큰도련님이 그 안에 끼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고간은 황룡 학관의 명성을 일부러 깎아내렸 다. 여소교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 말이 먹혔는지 그녀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 이번에 가면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부쩍 키가 자란 설우결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삼 년 뒤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나 오래?”
“따지고 보면 오래도 아니야. 다른 유명 학관 들은 최소 삼 년에서 길게는 육 년까지 붙잡아 두는 경우도 있거든.”
설우진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소위 상급 교육기관이라 불리는 명문 학관들 은 입학보다 졸업이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였다
특히 한림원 산하에서 운영되는 한림 부속 학 관의 경우 기본 교육 삼 년에 심화 교육 이 년 그리고 실전 논검 일 년의 과정을 거쳐 졸업자 를 추려 냈다. 그 가운데 정상적으로 졸업을 하 는 비율은 일 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설우진이 입학하고자 하는 황룡 학관은 삼 년제로 비교적 교육 기간이 짧았다.
하지만 졸업이 어려운 건 그쪽도 매한가지였다.
황룡학관은 독특하게 연차제가 아닌 실력으로 등위를 매긴 성적제로 운영됐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한 해에 입학을 같이 했어 도 일 년마다 치러지는 승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과 다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솔직히 쪽팔릴 일이지만 워낙에 승급 시험이 어렵다 보니 하위 등급인 인 자 조로 졸업하는 숫자는 매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형,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면 안 될까? 이곳 에도 전국구 학관인 와룡이 있잖아.”
“이 녀석아, 언제까지 형 뒤에서 숨어 지낼 거 야? 네 나이도 이제 열셋이야. 스스로 싸워 나 “가야지.”
“그,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솔직히 자신 이 없어.”
‘으이구, 사내자식이 순해 빠져서는.’
“자신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릴 셈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예만큼 은 네가 지켜 줘야지.”
설우진이 옆에서 수줍은 얼굴로 서 있는 단예 를 가리켰다.
단예는 열한 살, 그러니까 이 년 전에 설가에 들어왔다. 그의 기억대로 그녀의 가문은 정쟁 에 휘말려 망했다. 홀로 남게 된 그녀는 탐욕스 러운 관리에 의해 관기로 팔려 가게 됐는데, 설 우진의 지시를 받은 고간이 뒷돈을 찔러주고 빼돌렸다.
단예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설무백과 여소교 는 그녀를 양녀로 삼았다. 설우진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짜 가족이 된 것이다.
이후, 설우진은 그녀에 대한 흑심을 접고 온 전히 여동생으로 대했다. 그렇게 단예가 설가 의 식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 갈 때쯤, 설우진 은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키로 마음먹었다. 물 론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중요한 계기가 있 었다.
첫 만남 이후, 딱 일 년 만에 천중 상단주 강 무호가 그를 찾아왔다. 강무호는 명품 사업이 라는 생소한 이름의 신사업을 제안했다. 사업 내용은 바로 품질이 특화된 명품, 그러니까 일 전에 설우진이 자신의 값어치를 증명하기 위해 보여 준 영웅건과 같은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 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설우진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 영웅건 은 단순히 손재주가 좋아서는 만들 수 없는 물 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고심 끝에 단예에게 낭인 시절에 익혔던 일회심공을 전수키로 마음먹었다.
일회심공은 속성으로 수련이 가능한 내공심 법이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이들도 일 년 정도 만 매진하면 어렵지 않게 내공을 쌓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일회심공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축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일회심공으로 쌓은 내공은 단 하루만 사용이 가능했다. 그 기한을 넘겨 버리면 자연스럽게 내공이 몸 안에서 흩어졌다.
그런 이유로 일회심공은 성승이라 불렸던 무 진대사가 만든 무공임에도 강호인들에게 신기루심법이라 불리며 철저히 외면당했다.
설우진은 단예에게 성심성의껏 일회심공을 전수했다. 검후의 자질을 지닌 인재답게 단예 는 심공을 배운 지 한 달 만에 내공을 만들어 내 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설우진은 내기발출의 수 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그것이 가능해야 자수에 내기를 담아 낼 수 있어서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단예는 수실에 내기를 담아 자수를 할 수 있 게 됐다. 자수를 놓는 실력 자체는 설우진보다 오히려 뛰어난 면이 있었기에 그녀가 만든 작 품들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알았어, 형. 단예 누이를 위해서라도 용기 내 볼게.”
“자식, 그럼 이 형은 너만 믿고 간다.”
설우진이 설우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길을 나섰다.
“이 녀석들이 올해 들어오는 신입인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 안.
일렁이는 등불 아래, 한 남자가 인명부를 읽고 있었다. 인명부에는 앳된 얼굴을 한 아이들의 용모파기와 개인 정보가 상세하게 수록돼 있었다.
사라락 사라락.
남자는 신중하게 책장을 넘겼다.
누구 한 명도 허투루 보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인명록에 빠져 있던 남자가 갑 자기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붓을 들었다.
그리고 시원한 붓놀림으로 용모파기에 대고 원을 그렸다.
하나, 둘, 셋.
얼굴에 원이 그려진 신입들의 숫자가 열을 훌 쩍 넘겼다. 한데 그들에게 뚜렷한 공통점이 하 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쌍룡맹과 얽혀 있지 않 다는 점이었다.
“문과 지원생이라…………. 데려다 놓으면 어딘가는 쓸모가 있겠지.”
인명록의 마지막 장.
남자가 붓을 들어 원을 그렸다.
원 안에는 낯익은 얼굴이 환하게 미소 짓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