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4화 : 불운 회귀(4)
불운 회귀(4)
“부인, 이 대호 자수 장포를 내게 넘긴다면 제 갈세가와의 포목 거래를 주선해 주겠소.”
“그게 무슨…….”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오. 이 제갈윤, 본가에서 그 정도의 영향력은 충분히 행사할 수 있소.”
갑자기 판이 커졌다.
제갈세가는 호북 무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상계에서 제갈세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설가 포목점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다.
그런 제갈세가와 포목 거래를 튼다.
이건 그야말로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다는 격이 었다.
‘복색을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신분일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제갈가의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걸 어떡한다. 끝까지 거절했다간 분 명포목점에 악영향을 끼칠 텐데.’
여소교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만큼 무한 사람들에게 제갈세가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어머니.”
바로 그때.
이 사달을 만든 원흉이 등장했다.
대호 자수 장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그 소재를 찾기 위해 달려온 설우진이었다.
‘아니, 저 희멀끔한 녀석은 누구지? 왜 내 장포를 들고 있는 거야?”
설우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순간적으로 낭왕의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실책을 깨닫고 눈빛을 지웠다. 자신이 열세 살 어린애라는 걸 다시금 인지한 것이다.
“어머니, 저 형은 누구예요? 왜 아버지 선물로 드릴 대호 자수 장포를 들고 있는 거예요?”
순간, 제갈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버지 선물이라는 말에 대호 자수에 혹했던 마음이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허, 저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거 큰 실수를 할 뻔했군. 천하의 제갈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아녀자를 핍박하려 했다니.’
“부인, 제가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까 들었던 얘기는 그냥 잊어 주십시오.”
제갈윤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여소교는 어리 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제갈윤이 설우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설우진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대호 자수 장포,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라 했느냐?”
“네.”
“하면 이 자수도 네 솜씨이겠구나?”
‘이거 내가 했다고 말해야 하나? 말하면 굉장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설우진은 대답을 망설였다.
다행히 제갈윤은 끈질기게 캐묻지 않았다. 이 에 설우진은 억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름이 뭐지?”
“설우진.”
“이 형은 윤이라 한단다. 언제 시간이 나거든 제갈세가로 놀러 와라. 네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 들을 많이 보여 주마.”
‘가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설우진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에 귀신같은 책략을 쓰던 자.
바로 쌍룡맹의 최연소 군사 제갈윤이었다. ‘하아, 이 인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인생 이란 놈, 참으로 얄궂네.’
설우진은 제갈윤이 쌍룡맹의 군사로 활약하 던 시기에 독립부대의 일원으로 몇 차례 고용 이 됐었다. 그 독립부대는 제갈윤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그는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독립 부대를 투입해 그 흐름을 끊었다.
분명, 그가 세운 일련의 전략들은 훌륭했다.
한데 그 전략들에는 낭인들의 희생이 전제돼 있었다.
‘그때 제갈윤이라고 하면 다들 죽여 버리겠다 고 이를 갈았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고. 하지 만 과거로 돌아온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상관이 야? 어차피 계속 엮일 것도 아니고.’
설우진은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감정을 차분 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었다.
“시간 날 때 꼭 한번 놀러 갈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제갈윤이 설우진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설우진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 며 그를 배웅했다.
“도련님, 이거 좀 드셔 보세요.”
한가로운 오후, 매월이 쟁반을 들고 찾아왔다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가 놓여 있었다.
“매월아, 우리 점심 먹은 지 일각도 안 지났어. 근데 또 무슨 만두야.”
침대 위에서 자수틀을 매만지고 있던 설우진 이 난감한 표정으로 매월을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배가 불렀다.
“죄, 죄송해요. 전 그냥 처음 빚어 본 만두라 도련님께 가장 먼저 맛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 요.”
매월의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흔들리는 마음, 어느새 설우진의 손은 쟁반 위를 향하고 있었다.
“크흠.”
만두를 베어 문 설우진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대, 대체 안에 뭘 넣은 거야?’
설우진은 황급히 물 주전자를 찾았다. 그리고 잔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그대로 입안으로 가 져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근데 너 이 안에 대체 뭘 넣은 거야?”
“그게, 남자들한테 고추가 좋다고 해서………….”
매월이 몸을 배배 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우진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한 존재를 불현듯 떠올렸다. 정력 에 좋다고 하면 소불알도 뜯어 먹을 인간, 바로 사부였다.
‘가만, 이맘때쯤 사부가 무한에 왔다고 하지 않았나. 살벌한 기관진식으로 도배가 된 비동 을 뚫느라 개고생을 했었다고 했는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사부의 영웅담.
그 안에는 악연의 시작점이 되었던 무한의 장 보도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사부가 술만 마시면 그날의 일을 반복적으로 떠들어 댔기에 긴 세월이 지났어도 설우진은 또렷하게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추월산, 태검봉, 안개, 기관진식.’
“매월아, 혹시 태검봉이라고 들어 봤니?”
“음, 그거 추월산에 있는 거 아니에요?”
“잘 알아?”
“잘은 모르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그곳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할머니의 말씀 에 따르면 태검봉은 신선들이 머무는 곳이래요 그래서 사시사철 운무가 끼어 있고, 경험 많 은 약초꾼들도 그 근처에 가면 길을 잃는대요.”
‘사부에게 들었던 무량운무진이군. 그럼 진짜 추월산 태검봉에 비동이 있다는 건데……………?’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욕심이 일었다. 그의 머릿속엔 비동에 설치된 기관진식을 풀 어낼 수 있는 파훼법이 들어 있었다. 그 말은 곧 비동의 위치만 찾으면 그 안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먼저 먹는 놈이 임자잖아. 굳이 양심 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지. 더욱이 이 몸은 왕 의 자리에서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쳐진 가련한 운명이기도 하고.’
설우진은 그렇게 애써 자위하며 비동의 보물 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마음을 먹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 던 문제들이 떠올랐다.
먼저, 그의 집에서 추월산은 너무 멀었다. 말 을 타고 달려도 한나절이 걸릴 거리인데 어린 아이 걸음으로 그곳까지 걸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집을 떠날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가뜩이나 두 아들을 제 몸처럼 챙기는 어머니인데, 아무 이유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 줄 리 만 무했다.
마지막으로 산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건 비동과 관련된 것일 뿐, 그 외의 것은 온전히 몸으로 부딪쳐 알 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세상에 거저먹는 건 없다니까.’
설우진은 답답함을 느꼈다.
단순하게 몸을 쓰는 일이라면 화끈하게 해치
울 수 있는데, 머리를 쓰는 일이라 좀체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설우진이 입을 꾹 닫고 있자 답답했던지 매월 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속이 좀 답답해 서.”
“고민거리 있으시면 저한테 다 털어놔 보세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솔직히 말해 그녀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 았다. 그러나 설우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지푸 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털어놨다. “실은 나 혼자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 근데, 집에서 너무 먼 데다 어머니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게 고민이야.”
“가 보고 싶은 곳이 어딘데요?”
“추월산.”
“그곳이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잖아요.”
“……?”
“설마, 잊고 계신 거예요, 그곳에 뭐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