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8화 : 억지 기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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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1권 – 8화 : 억지 기연(4)


뇌기를 발끝으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발바닥이 뜨겁게 달궈졌을 무렵에 땅을 박차며 호무보를 펼쳤다.

호무보는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보법이었다.

호랑이의 움직임을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거창한 이름과 달리 보법으로서의 효용성은 많이 떨어졌다.

특히 속도가 느렸다.

그런데 뇌기를 바탕으로 펼친 호무보는 달랐 다. 마치 호랑이가 등에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 고 날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날이 밝아 오는 걸 보면 일주야는 훌쩍 넘긴 것 같은데………….” 

설우진은 능선에 걸려 있는 해를 보며 대략적 인 시간을 유추했다. 산을 오르고 비동의 기관 을 푸는 데만 세 시진이 넘게 걸렸으니 최소한 하루 이상은 지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거 외가가 발칵 뒤집혔겠는걸.”

흘러간 시간에 마음이 급해진 설우진은 다시 한 번 뇌기를 발끝으로 모아 호무보를 전개했 다.

자잘한 뇌기가 사방에 휘몰아치며.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대체 어딜 다녀온 게야?”

홍안의 노인이 설우진을 붙잡고 언성을 높였 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외할아버지. 추월산의 월출이 아 름답다기에 새벽 일찍 산을 오른다는 게 그만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어요.”

“월출을 보고 싶었으면 이 할아비에게 먼저 얘길 했어야지. 그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느냐?”

여철환이 설우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손자였다.

제 어미와 쏙 닮아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런데 그 외손자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풀어 근처를 모두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설우진이 사라진 이틀 동안 그의 마음이 꼭 그랬다.

“다시는 혼자서 행동하지 말거라.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그날까지 이 할아비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네.”

설우진은 순순히 여철환의 말에 따랐다.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굳이 외조부의 말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설우진은 착한 외손자 역 할에 충실했다. 외조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 면 되는 일이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만 지면 어김없이 낙영장을 몰래 빠 져나갔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벽뢰진천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벽뢰진천은 좌공 위주의 내공심법과 달리 격 렬하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 행공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 그 얘기는 곧 몸을 혹사시킬수록 숙 련도가 올라간다는 것이지.’

낙영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그 위에서 설우진이 난데없이 몽둥이를 들고 도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돌을 매단 수십 개의 출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하압.”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설우진이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몽둥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몽둥이가 밀어낸 바람이 수면 위에 동심원을 그리듯 돌을 매단 줄들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쉬잉 쉬잉.

잠시 후, 밖으로 퍼져 나갔던 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설우진을 덮쳐 왔다. 밤이라 시야 도 어두워 눈으로 보고 대응하기엔 상당히 까 다로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설우진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했다.

마치 그 어둠 속에서 돌의 움직임이 다 보인 다는 듯 사위에서 덮쳐 오는 돌들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몽둥이로 하나둘씩 쳐냈다.

한데, 더 놀라운 건 그 움직임들이 내공이 배 제된 순수한 육체적 능력만을 활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방증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숨소 리가 거칠어졌다.

털썩.

돌을 모두 쳐 낸 뒤, 설우진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역시, 아직 이 몸으로 야수감각도를 펼치는 건 무린가. 이왕이면 야수감각도와 벽뢰진천을 병행해서 몸에 익히려 했는데.”

설우진은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손바닥 을 미리 준비해 온 무명천으로 돌돌 감았다. 방금 전 그가 돌을 쳐 낼 때 펼쳐 보인 움직임 은 모두 야수감각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야 수감각도는 사부에게 전수받은 감각도를 한 단 계 더 발전시킨 것으로 감각도보다 더 격한 움 직임을 요구했다.

손바닥이 찢어진 것도 그 움직임을 몸이 따라 가지 못해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일단은 그릇을 키우는 데 전념해야겠어. 야 수감각도도 벽뢰진천도 그 그릇이 완성되지 못 하면 무용지물이야. 다시 그 짓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만큼 그릇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설우진은 고민 끝에 수련 방식을 과감하게 바꿨다.

새로운 수련 방식은 무공을 일절 배제하고 순 수하게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극한 무도였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극한 무도는 육체를 한 계까지 자극해 인위적인 성장을 유도했다. 왜 소한 체구의 설우진이 팔 척 거구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극한 무도의 공이 컸다.

설우진은 곧바로 양쪽 발목에 돌 주머니를 채 웠다.

묵직하게 들어찬 돌 주머니의 무게는 대략 스무 근이 넘었다.

그 상태로 설우진은 산속을 뛰어 올라갔다. 걷기도 버거운 무게였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그 후로,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설우진은 부 위를 달리해 가며 극한 무도를 실천했다.


설우진은 외가인 낙영장에서 딱 한 달을 보내 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는 외조부인 여철환이 바 리바리 싸 준 갖가지 약재와 보약이 그득 담겨 있었다. 덕분에 하인들의 손길만 바빠졌다.

“형아, 외갓집에서 대체 뭘 먹고 온 거야? 못 본새 키가 엄청 컸어.”

설우결이 훌쩍 커버린 형을 보고 두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외가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였는데, 지금은 머리에 팔꿈치가 닿았 다.

“동생아, 믿기 힘들겠지만 이 키는 먹어서 만 들어진 게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란다.” “에이, 거짓말. 노력해서 클 수 있으면 세상천 지에 팔 척 거인들이 넘쳐 나게.”

‘이 자식아, 네가 그 고생을 안 해 봐서 몰라.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 무도 는 정말 끔찍했어.’

설우진은 외가에 머무는 동안 극한 무도의 효 과를 톡톡히 봤다.

그 과정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 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의 육체적 성장이 이뤄 졌다.

우선 키가 자랐다. 외가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오 척을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육 척에 육박했다.

그리고 가늘었던 팔다리에 다부진 근육이 붙 었다. 특히, 손목의 경우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로 근육의 두께가 상당했다.

“결아, 나 없는 동안 집에 별일 없었지?”

“응, 근데 며칠 전에 무석이 형이 애들을 잔뜩 데리고 찾아왔었어. 형 외가 갔다고 하니까 돌 아오면 바로 천화각으로 오라고 하라던데.”

‘이 자식이 무슨 일이지?’

설우진은 흐릿해진 옛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 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그런지 좀체 생각이 나 질 않았다.

“형아, 혹시 숙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작년에도 해 줬었잖아.”

“숙제?”

“응, 학관에서 내 준 숙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열세 살의 그는 학관에 다니고 있었다. 청운 학관이라고 무한 일대에 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는데, 날이 추 워지는 십일월부터 다음 해 이월까지 방학을 하고 삼월 초하루에 다시 문을 열었다.

“결아, 학관 개관일이 언제지?”

“아니, 삼 년 차가 것도 몰라? 사흘 뒤잖아.”

‘망했다.’

설우진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운 학관은 방학이 긴 만큼 숙제도 많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관도들 사이에선 방학이 아 니라 숙제의 지옥이란 푸념이 공공연하게 흘러 나왔다.

‘개관까지 사흘, 아무리 용을 써도 힘들겠지.’ 설우진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학관에서 내 주는 숙제의 대부분은 필사였다. 책을 보고 따라 쓰면서 그 뜻을 가슴에 새기라 는 의미였다.

이번 방학에 주어진 필사 분량은 다섯 권.

사흘 밤낮을 새운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낭왕 체면에 숙제 안 했다고 벌설 수는 없는데.’

설우진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묘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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