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9화 : 학관 풍운(1)
학관 풍운(1)
꽃이 흐드러지게 핀 천화각.
일단의 무리가 쪼그려 앉아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앞쪽에는 책이 펼쳐져 있고 붓을 쥔 오른손은 바쁘게 글귀를 적어 나가고 있었다.
“다들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써. 필체가 티 나 면 안 되니까, 최대한 흘려 쓰는 것도 잊지 말고.”
또래 아이들보다 어깨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소년, 초무석이 아이들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 에 얼마나 괴롭혀 댔는지 그가 앞을 지나칠 때 마다 아이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손을 더 빠 르게 움직였다.
“무석아, 우진이 그 자식은 어떡할 거야? 녀 석이 빠지는 바람에 숙제가 더 밀렸잖아.” 전각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초무석의 오른팔, 고병용이 설우진의 이름을 언급했다. “염려 마, 숙제에 빠진 만큼 그 자식한테 배로 받아 낼 테니까.”
“뭘로 받을 건데?”
“그야, 당연히 자수지. 요전번에 그 자식한테 뺏은 봉황 자수를 시전에 내다 팔았는데 제법 쏠쏠하게 받았어.”
“그럼 이번에도 술 한잔 걸칠 수 있는 거야?”
“돈 되는 거 봐서.”
초무석과 고병용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에게 설우진은 든든한 물주였다.
직접적으로 돈을 뜯는 건 아니었지만 설우진 이 만든 작품은 매번 그들의 주머니를 든든하 게 채워줬다.
“이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진이 자식 저기 오는데.”
초무석이 눈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둘은 호구의 등장에 가볍게 주먹을 꺾으며 마중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발을 옮기려는 찰나.
달라진 설우진의 체형이 두 사람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방학 전까지만 해도 설우진은 학관에서 가장 왜소한 축에 속했다. 키는 평균에도 못 미쳤고, 특히 어깨가 심각할 정도로 좁았다. 오죽하면 설계집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그런데 지금의 설우진은 방학 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어, 친구들. 오랜만이다.”
설우진이 먼저 두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봤다.
“저 자식, 어떻게 된 거지?”
“방학 때 한약이라도 먹었나 보지. 쫄 것 없어. 그래 봐야 껍데기만 큰 것뿐이니까.”
초무석은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그사이, 설우진이 두 사람 앞에 당도했다. 정 면에서 마주서니 초무석보다 설우진의 키가 살 짝 더 커 보였다.
“무석아, 네가 이곳으로 오라고 해서 오기는 왔는데 무슨 일이야?”
“그걸 지금 몰라서 나한테 묻는 거야?”
초무석이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떴다. 또래 아 이들치고는 제법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하 지만, 상대가 나빴다.
‘새끼, 귀엽게 논다.’
설우진은 우스웠다.
전장의 가공할 살기를 접하며 살아온 인생이 다.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기세 따위, 가볍게 흘려 버릴 수 있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매년 하던 일인데 왜 몰라? 너 이 새끼, 덩치 좀 컸다고 나한테 개기냐?”
“아, 혹시 방학 숙제 때문이야?”
설우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에 초무석은 더 열이 뻗쳤다. 마치 다 알고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잘 아네, 그럼 알아서 저기로 기어들어 가.”
초무석이 손가락으로 열심히 필사를 하고 있 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자꾸 말이 길어져서 미안한데, 이번 숙제는 도와주기 힘들 것 같아. 외가에 다녀오느라 내 것도 아직 못 했거든.”
“그거야 네 사정이지.”
“크큭, 얄미울 정도로 이기적인 건 여전하네,
“우리 무석이.”
갑자기 설우진의 태도가 돌변했다.
초무석은 많이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 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나도 한 번쯤은 너 처럼 강자의 입장이 되어 보고 싶었거든.”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는 있는 거야?”
“잘 알다마다. 청운 학관의 골목대장, 초무석에게 정면으로 개기고 있는 거잖아.”
“이 새끼, 겨울에 몸 좀 키웠다고 간덩이가 부 었나 본데. 내가 너와 나의 차이를 제대로 보여 주겠어.”
초무석이 팔소매를 걷어 올리며 기세 좋게 공 터로 나섰다. 이에 설우진도 뒤따라 나섰다. 필 사하느라 정신이 없던 아이들의 시선이 어느새 공터로 모아졌다.
“오늘은 코피 터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 니까 단단히 각오해.”
초무석이 발보 자세를 취했다. 단숨에 달려들 어 설우진을 제압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에 반해 설우진은 여유 만만이었다.
어떤 공격도 막을 자신이 있다는 듯 팔짱 낀 두팔조차 풀지 않았다.
“누가 이길까?”
“그야 당연히 무석이지. 팔룡 무관의 아들이 포목점 아들에게 진다는 게 말이 돼?”
“그래도 믿는 게 있으니까 우진이도 앞으로 나선 게 아닐까. 어른들처럼 술을 마신 것도 아 닌데 맨정신으로 저런 객기를 부릴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몸이 많이 좋아졌 는데. 혹시 벌모세수라도 받은 게 아닐까? 우진 이 집이 다른 건 몰라도 돈은 많잖아.”
“에이, 그건 아니라고 본다. 돈으로 벌모세수 를 받을 수 있었으면 상계에 고수들이 넘쳐 났 게.”
공터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아이 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방학 숙제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먼저 공격해.”
초무석이 선공을 양보했다.
‘새끼,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뭐, 사양하지 않고 받아 주마. 그게 너로선 최악의 수가 되 겠지만.”
설우진이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정직하게 앞으로 주먹을 뻗었다.
‘겨우 그딴 주먹을 믿고 나한테 개긴 거냐.’
초무석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주먹을 보며 가 볍게 옆으로 고개를 젖혔다. 느려 빠진 주먹이 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광대뼈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골이 흔들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몸이 무너지 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 난 분명 피했는데………….”
초무석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주먹이 닿을 찰나의 순간에 고개를 틀어 피했었다. 수련 시간에 수천수만 번을 연습한 동작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봤어?”
“응,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무석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우진이의 주먹도 방향을 틀었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음………… 무관 다니는 형한테 들은 얘긴데, 실 전 경험이 풍부한 무사들의 경우 상대방이 보 일 반응을 미리 예상하고 공격을 한대.”
아이들 중 한 명이 정확히 판을 읽어 냈다.
설우진은 주먹을 날릴 때부터 이미 초무석이 피할 방향과 그 순간을 예측하고 있었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다져진 경험의 소산이었다.
“무석아, 어때? 바닥에 뒹구는 소감이.”
설우진이 가볍게 쪼그려 앉아 초무석의 뺨을 두들겼다. 손끝에 제법 감정이 실려 있던 터라 금세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