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11화 : 학관 전투 (2)

랜덤 이미지

낭왕전생 2권 – 11화 : 학관 전투 (2)


학관 쟁투 (2)

“하아, 그때 왜 쓸데없이 입을 놀 려 가지고.”

설우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으 로 향했다.

그는 남자의 강권에 의해 억지로 장의 자리를 떠맡았다. 전권을 준다 는데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었 다.

장이 되자 그를 바라보는 동기들의 눈빛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날 선 적의였고 다른 하나는 분명한 목적성을 띤 호의였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는데, 낭아문을 만들 때처럼 제대로 한번 굴려 봐?”

설우진은 낭아문을 만들 당시를 떠 올렸다.

군림마천의 이 차 발호 후, 낭인들 은 군림마천과 쌍룡맹의 말이 되어 전장에 나섰다. 울타리가 되어 줄 세력이 없었기에 그들은 철저히 이 용당하고 버려졌다.

당시에 죽어 간 낭인들의 숫자는 일만에 육박했다.

물론 설우진은 그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끈덕지게 살아남았다. 두 세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한 것이 주효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낭인들은 자연스럽게 설우진의 곁 으로 모여들었다.

향랑자-바퀴벌레-보다 질긴 생명 력을 지닌 그에게 기대기 위함이었 다.

열 명이 백 명이 되고 백 명이 천 명이 됐다.

설우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하나의 세력이 만들어졌 다.

그 세력이 바로 낭천의 모태가 된 낭아문이다.

하지만 낭아문은 겉모습만 그럴싸 할 뿐 그 안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문주라는 작자는 매일같이 술에 빠져 살고 문도들은 한식구라는 의식이 전혀 없이 매일 싸움판을 벌였 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몇몇 낭인들이 설우진을 찾아가 애원했 다. 제발 문도들 좀 봐 달라고.

이에 설우진은 과격한 방법으로 그 들의 청을 들어줬다.

사부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문 도들을 굴리고 또 굴렸다. 살려 달 라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효과는 탁월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문도들이 자 연스레 옆 사람의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일명 전우 효과였다.

“그래, 함께 학관에 들어온 것도 인연인데 십 년 뒤 벌어질 전쟁에서 개죽음은 안 당하게 도와줘야지.” 

설우진은 장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 골목 어귀가 눈에 들어왔 다. 그런데 어귀 쪽에서 사람 그림 자가 드리웠다. 체형으로 보아 사내 들이 분명했다.

‘이것들은 또 뭐야?’

설우진은 살갗을 찌르는 살기에 잠 시 걸음을 멈추고 골목 어귀를 주시 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그쪽에서 두 명의 사내가 먼저 모습을 비쳤 다.

낯익은 얼굴 언기문과 서천회의 대 표 주먹 척무강이었다. 척무강은 한 눈에 보기에도 싸움을 잘하게 생겼 다.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상체는 둘째 치고 가볍게 틀어쥔 주먹이 남 들보다 한 배 반은 더 커 보였다. 

“이게 누구십니까? 하늘 같은 선배 님이 아니십니까?”

설우진은 언기문의 얼굴을 보며 한 껏 너스레를 떨었다.

“이 자식, 그렇게 기고만장한 것도 오늘로서 끝이다. 척 선배가 나선 이상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아이고, 저한테 앙갚음하려고 아 는 형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세 살 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설우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악의를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친절 하게 대할 만큼 그는 마음이 너그럽 지 못했다.

“너, 너 뭘 믿고 그리 당당한 거 냐? 척 선배로 말할 것 같으면 지 자 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가는 강자다.”

언기문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척무 강의 이력을 자세히 소개했다. 하지 만 설우진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기문은 어쩔 수 없이 척무강에게 나서 줄 것을 부탁 했다.

이에 척무강이 앞으로 나섰다.

“너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다만 시키는 대로 따를 뿐.”

척무강이 양 주먹을 가슴 어름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두 발을 경쾌하게 교차시키 며 설우진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저건 서역에서 건너왔다는 권투인가?”

설우진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권투는 중원에 알려진 지 얼마 되 지 않은 색목국의 무공이다. 보법과 권법이 하나로 결합된 형태인데 앞 으로 쇄도하고 뒤로 회피하는 동작 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공수의 균형 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쉭.

어느 정도 거리가 좁아졌다 싶은 순간 척무강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 라졌다. 폭발적인 속도로 앞으로 쇄 도해 들어온 것이다.

이에 설우진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거리를 채 벌리기도 전에 척무강의 주먹이 벼락처럼 날아들었 다. 익숙지 않은 공격 수법에 당황 했는지 설우진의 대응은 평소보다 둔탁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야수안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간발의 차이로 주먹이 나아가는 궤적을 읽어 낸 것이다.

주먹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리고 그 궤적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비산했다.

‘권투가 근접전에서는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뽐낸다고 하더니 틀린 말 이 아니었네. 이거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는걸.’

몸소 느낀 권투의 위력에 설우진은 심중에 품고 있던 방심을 버렸다. 그사이 척무강이 다시 순간적인 쇄 도를 활용해 공격을 이어 갔다. 설 우진은 양팔을 방패처럼 세워 급소 를 가리고 야수안을 활용해 궤적을 읽어냈다.

쉬쉬쉭 쉬쉬쉭.

주먹이 연타로 들어왔다.

설우진은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건 양팔을 방패 삼아 막아 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연이은 공격 실패로 척무강의 호흡 이 살짝 끊기자 설우진은 오른발로 하단을 쓸었다. 방어가 탄탄한 상체 보다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하체를 공략한 것이다.

그런데 척무강은 그 노림수를 훤히 읽고 있었다.

자신의 약점이 하체라는 걸 진즉부 터 인지하고 있는지 설우진의 발이 날아들자 잽싸게 오른쪽 다리를 들 어 그 궤적을 틀어막았다.

이를 시작으로 둘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척무강이 익힌 권투는 설우진의 감 각도와 비슷한 측면이 많았다. 신체 의 감각을 극대화시킨 상태로 상대 의 움직임에 맞춰 반응하는 점이 꼭 닮아 있었다.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지? 회주님 지시로 일부러 지 자 조에 남아 있는 척무강 선배와 대등한 싸 움을 벌이다니.’

두 사람이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 언기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세기가 척무강을 붙여 줄 때만 해도 설우진을 상대로 멋지게 복수 를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다. 척 무강은 지 자 조에 속해 있지만 실제 그 실력은 천 자 조에 들고도 남기 때문이다.

‘이 싸움, 설마 척 선배가 지는 건 아니겠지?”

언기문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척 무강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했다. 어느덧 싸움이 시작된 지 반 각여 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둘 다 지 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그 움직임은 뭐지? 내 공격 을 훤히 꿰뚫고 있던데.”

“선배가 익힌 권투랑 비슷한 겁니 다. 눈으로 읽고 몸으로 반응하는 거죠.”

“그런 무공이 있었던가?”

“어릴 때 연이 닿았던 낭인에게 배운 겁니다.”

“흠, 이제야 이해가 좀 되는군. 그 자유분방한 움직임, 일반적인 무공 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

척무강은 감각도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권력의 개인 줄 알았더니 그냥 주 변 일에 관심이 없었던 거였네. 내 사람으로 거두면 꽤 쓸 만하겠어.’ 설우진은 척무강이 욕심났다.

우직한 성격에 뛰어난 무재까지. 어디 가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재 가 아니었다.

“선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 데 왜 서천회 같은 권력 조직에 들 어가 있는 겁니까? 선배의 성향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돈이 필요했다. 이 곳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학비를 걱 정할 정도로 돈에 쪼들리지는 않았 다. 그런데 입학 후 반년 정도 지났 을 무렵 갑자기 가문의 지원이 뚝 끊겼지.”

‘후계자 다툼인가?

설우진은 가장 흔한 전개를 떠올렸 다.

무가의 경우 장남보다 차남의 재능 이 특출할 경우 심심찮게 후계자 다 툼이 벌어졌다. 그 다툼에서 피해를 입는 쪽은 대부분 지지 기반이 약한 차남 쪽이었다.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낯부끄러운 얘기지만 내가 이곳에 들어온 사이 아버지께서 늦장가를 가셨다. 그것도 내 나이 또래의 여 인에게.”

척무강의 무표정한 얼굴에 주름이 졌다.

분명한 감정의 동요였다.

‘참, 듣고 보니 기가 차네. 어린 아 내한테 푹 빠져서 아들내미 뒷바라 지를 포기하다니.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는 아닌 모양이네.’

설우진은 척무강의 사연을 들으면 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럼 부족한 학비는 계속 서천회 에서 지원을 받으셨던 겁니까?”

“서천회가 아니라 회주 개인의 지 원이었다.”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군. 하기야 저 정도면 수행원으로 쓰기엔 제격이지.’

설우진은 당세기의 속셈을 훤히 꿰 뚫었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을 거친 후 척 무강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선배, 돈만 해결되면 그쪽에서 나 올 의향이 있으십니까?

-돈만 해결된다면야………… 굳이 남 아 있을 이유가 없지.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나오세요. 남은 학비는 제가 모두 부담할게요.

-적은 돈이 아니다.

-후훗, 저 상가 출신이에요. 자금력만 놓고 보면 오히려 서천회주보 다 나을걸요.

허투루 내뱉는 전음이 아니었다. 사실 설우진은 황룡 학관에 들어오 기 전까지 일품점의 중요 인력으로 꾸준히 돈을 벌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자수들은 옷과 결합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 갔고, 거기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고 스란히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나한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 가 뭐지? 너도 나를 개처럼 부리고 싶은 것이냐?

척무강의 무심한 눈길이 설우진의 얼굴로 향했다. 이에 설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개가 아니라 믿을 만한 선배를 만들고 싶은 것뿐이에요. 솔직히 이 곳에 와서 선배들에게 많이 실망했 거든요.

-단지 그 이유뿐이냐?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 제안을 거 절하셔도 돼요. 서천회주처럼 선배 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거 든요.

설우진은 마지막 선택지를 척무강 에게 남겼다.

둘 사이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 르고 척무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마.”

“잘 생각하셨어요. 선배는 꼭 멋진 강호 영웅이 될 거예요.”

‘아니, 내 충성스러운 그림자가 될거예요.”

설우진은 남모를 각오를 다졌다.


다음날 서천회는 척무강의 탈퇴로 큰 소란이 빚어졌다. 당세기는 온갖 협박을 해 가며 그의 결정을 번복하 려 했지만 한번 굳어진 마음은 돌아 서지 않았다.

척무강의 탈퇴로 황룡삼천의 세력 구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비등한 전력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남천회는 힘의 공백이 생긴 틈 을 놓치지 않고 서천회를 찍어 눌렀 고, 서천회에 눌려 좀체 기를 펴지못하던 중천회도 오랜만에 기지개를 활짝 켰다.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당세기의 방 안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의 중요 전력이 제 발로 뛰쳐나 갔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 만무했다. 

“아, 아무래도 설우진 그놈이 수작 을 부린 것 같습니다. 전음으로 말 을 주고받아 그 내용을 듣지는 못했 지만 놈과의 대화가 끝난 후 척 선 배의 태도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 졌습니다.”

“그놈이 왜? 우리처럼 조직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게, 이번에 놈이 적사호의 선택 을 받았다고 합니다.”

“적사호가 놈을 선택했다고? 그럴리가…………….”

당세기는 척무강이 탈퇴한 것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