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16화 : 협의지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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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2권 – 16화 : 협의지행 (1)


협의지행 (1)

“주목!”

교실이 쩌렁하게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적사호였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이틀 뒤, 누차 예고한 대로 중간 평가가 치러질 예정이다. 이번 평가 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적사호가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 를 활짝 펼쳤다.

그 위에는 협의지행이라는 글귀가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협의지행은 따로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전 상인들을 괴롭히는 파락호를 때려눕히든 거동 이 불편한 노인을 도와주든 너희들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면 된다. 그 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불상사는 내 가 책임진다.”

적사호가 협의지행의 방법을 설명 했다.

거창한 주제치고는 설명이 꽤나 단 순 명료했다.

“학사님, 평가는 어떻게 내리는 겁 니까? 이 많은 숫자를 학사님이 다 따라다닐 수도 없을 텐데.”

“너희들 한 명 한 명에게 심사관이 따라붙을 것이다. 은밀히 뒤따를 예정이니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또 질문 있는 사람?” 

“어려운 협의지행일수록 보다 높은 평가를 받게 되나요?”

다들 점수에 민감해하는 모양새였다.

“협의를 실천하는 데 쉽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 진심 어린 마 음만 보여 준다면 모두 좋은 점수를 받게 될 것이다.”

적사호의 말에 관도들은 다양한 반 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팔자에도 없는 협객 흉내를 내게 생겼네. 얻는 것 하나 없이 남을 돕는다? 나하곤 정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데.’

설우진은 실습 내용을 듣고 쓴웃음 을 지었다.

낭왕 설우진은 협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낭인들의 정점에 선 자답게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였다. 베어야 할 상대가 누구든 돈을 받으면 그는 주저 없이 천뢰도를 빼 들었다. 그 런 그에게 협의니 정의니 하는 것들 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평가 기간은 사흘이다. 그 안에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협의를 행해라.”

적사호가 마지막으로 시일을 고지 했다.

사흘, 꽤나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황룡학관이 위치한 도시가 서안이 란 점을 감안하면 그 시간은 오히려 넉넉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쉬운 예로, 황룡학관에서 반나절 정도 되는 거리에는 태평시전이 있 었다. 태평시전은 흑도패가 난립하 는 곳으로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 는 상인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설우진의 곁으로 자 스민과 조인창 그리고 남궁벽이 자 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우진아, 협의지행 어떻게 할 거 야?”

조인창이 물었다.

“아직까진 별다른 계획 없는데. 솔직히 그렇게 마음이 내키지도 않 고.”

설우진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이에 자스민과 남궁벽도 비슷한 반 응을 보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조 인창만은 평소와 다른 적극적인 자 세로 설우진의 협의행을 독려했다. ‘자식, 시끄럽게 종알대네. 뭐, 점 수가 달려 있으니 아예 안 할 수도 없고, 그냥 가볍게 몸이나 풀어 볼 까?’

설우진은 못 이기는 척 협의지행에 참가키로 했다. 이에 조인창은 뛸 듯이 기뻐하며 선배들에게 얻은 정보라며 하오문의 비밀 지부 위치를 알려 줬다.

하오문 비밀 지부라는 말에 설우진 은 잠깐 동안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겼 다.


하오문은 강호에 적을 둔 세력들 중 가장 방대한 조직을 자랑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잠정적인 하오문도이기 때문이다.

대도시 서안에는 하오문의 지부들 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다른 강호 세력들의 지부처럼 큰 규모로 운영되지 않기에 그 숫자는 열 곳이 훌쩍 넘어갔다.

늦은 오후 설우진은 조인창이 알려 준 하오문의 비밀 지부를 찾았다. 용강객잔.

황룡대로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건 물이었다.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 다 되었 음에도 손님은커녕 파리만 날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눈꼬리에 점이 박힌 점소이가 설우 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설우진은 점소이와 잠깐 동안 시선 을 교환한 후 창가 쪽 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식탁을 검지로 일곱 번 두 들겼다.

하오문과 접선하는 일반적인 수신 호였다.

“귀한 황룡이 이 누추한 곳까지 왕 림하시고, 영광입니다. 그래,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수신호를 확인한 점소이가 설우진 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설우진은 바로 원하는 바를 전했다. 

“협의지행에 필요한 악당들이 라………… 마침 저희 쪽에서 최근에 완 성한 인명부가 있습니다. 실력 순으 로 나열되어 있으니 요령껏 고르시 면 됩니다.”

“가격은?”

“최근 정보인 점을 감안해 은전 열냥은 주셔야 합니다.”

생각보다 꽤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애써 흥정하지 않 고 품 안에서 은전 열 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가 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돈을 챙긴 점소이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얇은 책자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설우진은 곧바로 책자를 펼쳤다. 점소이가 호언장담한 대로 인명부 안에는 악당들의 이름과 더불어 무 공 수위, 현재 거주지까지 자세하게 기재돼 있었다.

‘대도시라 그런가, 별의별 잡놈들이 다 있군.’

설우진은 한 명 한 명 자세히 그 이력을 훑었다.

절도, 사기, 폭행, 강간, 강도.

악당들의 이력답게 이력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했다.

특히 뒷장으로 갈수록 이력이 화려 해졌다.

“이자는 뭐지?”

설우진이 마지막 장을 펼쳐 놓고 그 위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정도 출신으로 유일하게 악당 명단에 올 라 있는 인물이었다. 초상화 속의 얼굴은 악당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 게 무척 선해 보였다. 언제나 웃는 상인지 양쪽 눈꼬리는 살짝 처져 있고 입술은 양 끝이 말려 올라가 있 었다.

“방상욱이란 자로, 소림 속가문으 로 잘 알려진 금강문 출신입니다. 삼 년 전에 사문의 규율을 어겨 파 문당했습니다.”

“한데 왜 악당으로 분류가 되어 있 는 거지?”

“시가지 외곽에 작은 사찰을 지어 두고 사내아이들을 납치해 몹쓸 짓 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사찰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가 있 었습니다.”

“그럼 왜 관아에 신고를 하지 않은 거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습니다.”

얄밉긴 해도 이해 못 할 답은 아니었다.

하오문은 낭인들과 마찬가지로 철 저히 돈에 움직이는 세력이었다. 어 쭙잖은 동정심에 아이를 위해 나선 다? 그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피해자가 얼마나 되지?”

“이제까지 파악된 바로는 열이 넘 습니다.”

“정말 추잡스러운 놈이군. 할 짓이 없어서 같은 사내를, 그것도 힘없는 어린아이를 탐하다니.”

설우진은 불쾌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여기에는 그가 품고 있는 안 좋은 기억도 한몫했다. 그가 초보 낭인이 던 시절 유난히 그를 아껴 주던 낭 인이 있었다. 사부는 이유 없이 친 절한 놈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당시 에는 정에 굶주려 있던 터라 그 낭 인의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한데 사부가 의뢰 때문에 잠시 자 리를 비웠을 때 사달이 벌어졌다. 그 낭인이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며 잠자는 그를 덮친 것이다.

물론 사내에게 범해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사부에게 배운 극한의 감각도가 위 기를 감지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반격을 가한 것이다.

덕분에 낭인은 바로 황천길로 떠났다.

설우진이 던진 칼날이 사타구니 한 가운데를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종이, 찢어 가도 되겠지?”

설우진이 방상욱의 용모파기가 그 려진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점소이는 친절하게 그 부분을 찢어 설우진에게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설우진은 그길로 곧장 방상욱이 머무는 사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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