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6화 : 측은지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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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2권 – 26화 : 측은지심 (2)


측은지심(2)

양쪽 다 술이 과하게 들어간 탓에 싸움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맨정신 에 싸우는 게 아니었기에 막싸움에 익숙한 낭인들이 정파의 무사들을 압도했다. 물론 원수가 져서 싸우는 건 아니었기에 칼을 휘두르지는 않 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천강이란 자가 나타나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당시 그의 실력은 절정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기에 일류에도 못 미치는 낭인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 었다.

잠시 한숨 돌릴 새에 낭인 둘이 죽고 일곱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 다. 그 안에는 설우진도 끼어 있었 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설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왼팔을 부 여잡고 무천강에게 물었다. 이에 그 가 대답하길.

“네놈들은 죄 없는 이들을 핍박했 다. 이를 징치하는 건 협객의 길을 추구하는 자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 니겠느냐!”

한마디로 개소리였다.

한데 이어지는 주변의 반응이 더 어이가 없었다.

구함을 받은 정파의 무사들은 물론 이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양민들 마저 그를 전에 없을 협객이라며 칭 찬을 아끼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통 이 터졌지만 설우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협객이 되는 거 뜯어 말리고 싶지만 네 인생을 내가 대신 살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대신 협객이 될 거 라면 제대로 정신 박힌 협객이 돼. 저 잘난 맛에 설쳐대는 반편이 협 객이 아니라.”

설우진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 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조인창도 느끼는 바가 많은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아래.

낯익은 얼굴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끝에는 뾰족하게 날이 선 가는 바늘이 들려 있었다.

“괜히 옷은 찢어 가지고 하여간 인 창이 놈 뭐라 할 계제가 아니라니 까.”

설우진은 자신의 손으로 찢어 버린 소교의 옷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입으로 계속 툴툴대면서도 그의 손 끝은 한 땀 한 땀 신중하게 바늘을 움직였다.

‘옷 한 벌로 여러 날을 버티려면 아무래도 어지간한 충격에는 찢어지 지 않도록 강도를 더해야겠지. 그럼 오랜만에 벽뢰진천의 힘을 빌려 볼 까’

설우진이 전신에 퍼져 있던 뇌기를 천천히 손끝으로 끌어 모았다. 뇌기 를 활용해 옷의 탄력과 강도를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쇠의 기운을 품고 있는 금기도 아 니고 천지간에 가장 사납고 거칠다 는 뇌기인데.

믿기지 않지만 가능했다.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뇌기를 불 어 넣었던 일품점의 자수들. 그런데 그 자수에는 뜻밖의 효용이 숨겨져 있었다. 그 효용을 밝혀낸 건 민상 표국의 국주 허민상이었다.

그는 천하오대표국의 하나인 만리 표국의 표두 출신으로 눈앞에 탄탄 대로가 펼쳐져 있는데도 꿈을 위해 가시밭길로 뛰어든 괴짜였다.

‘그자가 겁 없이 산적한테 달려들 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뇌기 자수의 효능을 영영 모를 뻔했 어.’

허민상이 자수의 효능을 알게 된 건 표행 중에 산적들의 습격을 받은 후였다. 그는 표국의 규모가 작은 탓에 비싼 표물을 운반할 때에는 자 신이 직접 표행에 참여했다.

그날도 그는 몇 안 되는 표사들과 쟁자들을 이끌고 산적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면목산을 넘었다.

중간 지점까지는 표행이 순조로웠 다. 한데 마지막 언덕배기에서 매복 하고 있던 산적들이 들이닥쳤다. 수 적으로 열세인 상황이었기에 그는 직접 칼을 빼 들고 뛰쳐나가 선두에 서 맹렬히 싸웠다.

대형 표국 출신답게 그가 휘두르는 칼날은 산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 다.

그런데 그가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 는 사이.

산적 하나가 활을 들고 그의 등을 겨눴다. 맹렬한 기세로 화살이 쏘아졌고 앞쪽의 산적들을 상대하느라 뒤쪽을 신경 쓸 여력이 없던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화살이 그의 등판에 꽂히는 순간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화살 이 옷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온 것이다. 뒤늦게 화살의 존재를 알아챈 허민상은 전방의 적들을 뿌 리치고 후방에 자리하고 있던 궁수 를 일격에 잠재웠다.

그의 활약으로 싸움은 민상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표행을 성공리에 마친 허민상은 무 한으로 돌아와 곧장 일품점 본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설무백에게 다짜 고짜 구명지은을 입었다며 절을 해댔다.

설무백이 당황해 그 연유를 물으니 일품점에서 구매한 옷 덕분에 목숨 을 건졌다고 했다.

“뇌기 자수가 특별한 건 알고 있었 지만 설마 지근거리에서 날아드는 화살까지 막아 낼 정도로 대단한 강 도를 지녔을 줄 누가 알았겠어.”

허민상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뇌 기자수의 새로운 능력은 뛰어난 방 호력이었다.

사실 그 능력은 설우진이 조금만 깊게 생각했다면 보다 일찍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뇌기 자수가 내 기발출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내기발출은 몸 안의 기를 밖으로 끄집어내 사물을 강화하는 기술이 다.

이를 잘 활용하면 한 줄기 나뭇가 지도 잘 정련된 철검처럼 사용할 수 가 있는데 이에 빗대어 생각하면 뇌 기 자수가 화살을 튕겨 낼 정도의 방호력을 갖고 있는 건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빠, 안 자고 뭐 해요?”

설우진이 바느질에 심취해 있을 때 작은 인영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교였다.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했어? 네 나이 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쑥쑥 큰다고.”

“헤헷, 그건 저도 잘 아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잠이 잘 안 와요.”

“왜, 꿈속에서 성질 더러운 큰어머 니라도 만날까 봐 그래?”

“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요. 하 지만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건 아니에요.”

“그럼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설우진이 고개를 들어 소교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소교가 다급히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소교의 얼 굴은 잘 익은 능금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동한 설우진은 짓궂은 물음을 던졌다.

“혹시, 나 때문에 잠 못 이룬 거야?”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 하기야 이 오빠가 잘생기기는 했지. 키도 크고.”

설우진이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아닌 말로 그는 객관적인 기준에서 미남 축에 속했다.

주변에 워낙에 쟁쟁한 미남들이 많 아서 도드라지지 않을 뿐 그의 외모 도 어디 가서 꿀릴 수준은 아니었 다.

일단 육척이 훌쩍 넘어가는 큰 키에 꾸준한 수련으로 다져진 탄탄 한 몸매. 그리고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속된 말로 꽃미남이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오, 오빠한테 반해서 그런 거 아 니에요.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뭐가 고마운데, 네 사촌 오빠 밟아 준 거?”

설우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소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어렵게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 놨다.

“저 그동안 큰어머니나 사촌 오빠 앞에서 한 번도 싫다는 얘기를 해 보지 못했어요. 솔직히 그들에까지 버려질까 겁이 났거든요. 근데 오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소교는 손추향에게 버섯 죽을 빼앗긴 뒤 곧장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 는 막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에는 낼 수 없었던 용기를 내 손추향에게 버섯 죽을 돌려 달라 요구했다. 당 연히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오히려 손추향은 어린 게 버르 장머리가 없다며 때리고 감금하기까 지했다.

“그래도 너무 무모했던 거 아니야? 네 큰어머니라는 여자 손이 되게 맵 게 생겼던데.”

“한두 번 맞은 게 아니라서 요령이 붙었어요. 봐요 멀쩡히 돌아다니잖 아요.”

‘나이도 어린 게 너무 일찍 철이 들었네.’

설우진은 가슴 한구석이 짠했다.

의연하게 대답하는 소교의 모습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이 떠 오른 것이다.

“소교, 넌 꿈이 뭐냐?”

“음, 전 오빠처럼 멋진 여협이 되 고 싶어요.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많이 돕고 싶어요.”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 양인데, 나 네가 생각하는 협객 아니야.”

“그럼 그때 왜 절 구했어요?”

“그야 눈앞에서 애가 떨어지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게 협객이 아니고 뭐예요!”

순간 설우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 보면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옆쪽에 풍광 좋은 바위 절벽이 있었지만 원 체 그런 쪽으론 관심이 없던 터라 시선도 두지 않았다.

한데 바로 그때 아이의 비명이 들 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는 소교가 보였다.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훑었고 천 뢰도가 바위 절벽으로 날아갔다. 

‘그때 정말 내가 왜 그랬지? 나하 곤 일면식도 없는 아이인데 굳이 천 뢰도까지 써 가며. 설마, 인창이 놈 의 협객병이 나한테 옮기기라도 한 건가?”

설우진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회귀 이후 방관자의 삶을 추 구해 왔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 혹 은 지인들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전 면에 나서질 않았다. 한데 이곳 신 하촌에서 와서 그 삶의 방식에 조금 의 변화가 생겼다.

“흠, 널 구한 건 그냥 우연이었어. 괜한 오해하지 마.”

“헤헤, 오빠 눈빛 지금 엄청 흔들 린거 알아요?”

소교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설우 진의 눈을 가리켰다. 그제야 설우진 은 실책을 깨닫고 두 눈에 잔뜩 힘 을 줬다. 그리고 소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가서 자. 이 오빠 작업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바느질은 저도 제 법 하는데.”

“이건 이 오빠밖에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쫑알쫑알 그만 지저대고 들어가.”

설우진은 민망함에 소교를 억지로 동굴로 보냈다. 소교는 끝까지 옆에 있겠다고 버텼지만 ‘네가 있으면 오 히려 작업에 방해가 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동굴로 돌아갔다.

‘정신 차리자, 설우진. 낭왕한테 협 객이 웬말이냐! 저 아이들을 돕는 건 그저 사소한 변덕에 불과해. 절대 협의 같은 거 아니야.’

설우진은 양쪽 뺨을 가볍게 두들기 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 한 귀퉁이에서는 전에 알 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이 싹을 틔우 고 있었다.


“와, 예쁘다.”

“이게 뭐가 예뻐, 문양도 없고 밋 밋하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제 눈엔 어느 비단옷보다 예뻐요. 근데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어제 약속했잖아. 옷 새로 만들어 준다고.”

밝아 오는 동천의 해를 등지고 설우진이 소교에게 밤새 고생해 만든 옷을 건넸다.

옷은 담백했다.

그가 여태껏 만들어 왔던 화려한 옷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일단 한번 입어 봐. 몸에 맞는지 보게.”

“네.”

소교가 다 해진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눈대중으로 만든 것임에도 치수를 잰 것처럼 정 확히 몸에 딱 들어맞았다. 

“느낌이 어때?”

“마치 솜옷을 입은 것처럼 따뜻해 요. 천이 이렇게 얇은데 어떻게 이 럴 수가 있죠?”

“그야 기술자의 손재주가 좋아서 그렇지.”

설우진은 넉살 좋게 자신의 손재주 를 자랑했다.

지난밤, 그는 평소 때보다 더 심혈 을 기울여 옷을 완성했다. 특히 아 름다움에 치중한 자수 대신 실용적 인 측면에 비중을 둔 자수를 옷이 잘 해지는 부분에 놨다.

천감과 색이 같은 수실을 사용해서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는 않지만 자 수가 옷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 었다.

그리고 옷에서 열이 나는 부분은 수를 놓다가 우연찮게 발견하게 된 뇌기의 또 다른 능력이었다. 뇌기는 순간적으로 강한 열을 뿜어내는 특 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절정의 뇌기에 당하면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재만 남게 되는데 설우진은 이 점에 착안해 수실에 열기를 담아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적잖은 시행착오 가 있었다.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일이기에 뇌기의 양을 일일이 조절해 가며 수 실에 열기가 남게 되는지를 확인했 다. 덕분에 작업 시간이 평소보다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고생한 만큼의 보람도 있었 다.

뇌기를 세밀하게 반복적으로 다루 면서 좀체 진전이 없던 벽뢰진천이 눈에 띄게 성장을 한 것이다. 

“오빠, 잘 입을게요.”

소교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의 마음 을 전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 모습에 설우진의 입꼬리도 절로 들 썩였다.

옷을 전한 뒤.

설우진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소 교 남매를 뒤로한 채 마을을 나섰 다.

처음의 계획대로 혈옥불을 손에 넣 기 위함이었다.

그가 마을을 떠나올 때 조인창도 학관으로 먼저 돌아가겠다며 함께 나섰다.

설우진은 소교 남매의 일을 겪고 큰 심경의 변화가 온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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