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7화 : 측은지심 (3)
측은지심(3)
황하 강변.
일단의 무리가 한 사내의 뒤를 맹 렬한 기세로 쫓고 있었다. 그들은 장안에 기반을 두고 있는 용아보의 무사들이었다. 용아보는 정마대전 이후로 두각을 드러낸 신생 문파로 실전 검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 고 있었다.
“놈의 뒤를 쫓아라. 무슨 일이 있 어도 반드시 혈옥불을 우리 손에 넣 어야 한다. 절대 마도의 잔당에게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선두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사내.
그는 용아보의 소보주 백승천이었다.
문무겸전의 인재로 섬서 일대에서 는 다음 대에 무림을 책임질 동량으 로 큰 기대를 얻고 있었다.
한데 그의 맹렬한 추격에도 쫓기는 이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 았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그 간격 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욕심에 눈이 멀어 제 발밑에 벼랑이 도사리고 있는 줄 도 모르고 정신없이 쫓아오는구나. 그래, 어디 지옥 불구덩이에서 발버 둥쳐봐라.’
혈옥불을 가슴에 품은 봉두난발의 사내 청무가 뒤를 돌아보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는 강호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오던 다섯 수호 가문 중 하나 인 현무문에 속해 있었다.
현무문은 삼국시대 와룡 제갈량과 자웅을 겨뤘던 오나라 주유의 후손 들로, 제갈가 못지않은 뛰어난 지식 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법에 능 했다.
지금 청무가 보여 주고 있는 달음 박질도 축지라 불리는 이법인데 내 력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무인들의 경공을 앞지를 수 있었다.
추격전은 한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청무는 간격을 적절히 조절하며 미 리 점찍어 둔 마을로 그들을 인도했 다.
그곳은 바로, 신하촌이었다.
신하촌에서는 한참 재건 작업이 이 어지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 이 저마다 제 할 일을 찾아 부지런 히 움직였다. 그 안에는 소교도 있 었다.
“촌장님, 상윤이 형이 돌아왔어요.”
부지런히 진흙을 퍼 나르던 청년 하나가 청무를 발견하곤 반갑게 소 리쳤다. 이에 모두가 잠시 일손을 놓고 청무 쪽을 바라봤다. 다들 반 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서 노인의 얼굴이 밝았 다.
“고생했구나. 그래, 구휼미는 어찌 됐느냐?”
서 노인이 청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서안에 다녀온 일을 물었 다.
“다행히 현령께서 구휼미를 내주기 로 하셨습니다. 아마 사나흘 정도만 더 버티면 구휼미를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허허, 정말 큰일을 해냈구나.”
“아닙니다. 마을의 일원으로 당연 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청무는 답을 하면서 흘깃 뒤를 쳐 다봤다.
멀리서 용아보 무사들의 모습이 흐 릿하게 비쳤다.
‘이쯤에서 미끼를 던져야겠군. 당 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어, 힘이 없는 게 죄인 것을. 그래도 저 승길이 마냥 외롭지는 않을 거야. 당신 손자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부님, 서안에 다녀오는 길에 우 연히 얻게 된 불상입니다. 마을을 위한 제를 지낼 때 사용하십시오.”
“호오, 빛깔이 참으로 곱구나. 그 래, 이 불상은 내가 보관해 뒀다가 마을의 제를 지낼 때 사용하도록 하마.”
서 노인은 청무가 건넨 혈옥불을 별 의심 없이 건네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용아보의 무사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혹 혈옥불을 지닌 자를 본 적이 있느냐?”
백승천이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 아 놓고 물었다.
혈옥불이란 말에 마을 사람들은 약 속이나 한 듯 서 노인을 바라봤다.
‘주인이 있었던 물건인가?’
서 노인은 용아보의 무사들이 찾는 게 자신의 손자가 가져온 혈옥불이 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혈옥불 때문에 제 손자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그 물건은 제게 있습니다.”
“혈옥불이 네 손에 있다고?”
“네, 여기.”
서 노인이 잠시 품에 넣어 뒀던 혈옥불을 꺼냈다.
혈옥불은 다섯 치 정도 되는 크기에 불상 전체가 진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진품 여부를 확인해 봐라.”
백승천이 승룡대주인 고철건에게 지시했다. 고철건은 혈옥불을 건네 받은 뒤 배꼽 부위에 우장을 갖다 대고 내력을 불어 넣었다.
부르르.
불상이 세차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환하게 웃고 있던 부처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악귀의 얼굴로 바뀌었다.
‘진품이 확실하군. 한데 왜 놈은 이걸 저자에게 주고 사라진 거지? 우릴 농락하던 그 경공술이라면 충 분히 불상을 가지고 도망칠 수 있었 을 텐데.’
백승천은 너무나 쉽게 손에 들어온 혈옥불을 보고 강한 의구심에 휩싸 였다.
“대주는 이 상황이 이해되나?”
“음, 제 좁은 소견으로는 기술을 사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만술?”
“네, 자신이 미끼가 되어 우라들의 시선을 돌린 뒤에 제 동료들로 하여금 혈옥불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죠.”
그럴싸한 추정이었다.
이에 백승천은 승룡대를 둘로 나눠 하나는 청무의 뒤를 쫓게 하고 나머 지 하나는 자신의 곁에 남겼다.
‘놈이 진짜 기술을 펼친 거라면 이 마을에 마도의 종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백승천이 마을 사람들의 일면을 두 루 살폈다.
겉보기에 의심 가는 인물은 없었다.
‘혈옥불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굳 이 힘들게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어차피 이자들, 살려 둘 수도 없잖아.’
정기 넘치던 백승천의 두 눈에 비 릿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혈옥불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 다는 걸 세상에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혈옥불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고 대주!”
“네, 소보주님.”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 도록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게. 저들 도 포함해서.”
백승천이 은밀히 추살령을 내렸다. 고철건은 그 말에 담긴 진의를 읽어 내고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상아, 이 옷 입어.”
어둠이 몰려드는 밤.
소교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 어 소상에게 건넸다. 둘은 촌장이 내준 막사 안에 머물고 있었다. 설 우진이 한바탕 소란을 피운 덕분에 토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누나, 그 옷, 착한 형아가 누나 입으라고 선물해 준 거잖아.”
“으응, 그렇긴 한데 누나 혼자 입 기 미안해서. 이거 보기보다 정말 따뜻하거든.”
소교가 옷 자랑을 늘어놨다.
설우진이 만든 무명보의는 사람의 체온이 더해지면 보온력이 더 올라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소교는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 한번 입어 봐.”
“싫어.”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소교가 억지로 옷을 입히려 했다. 하지만 소상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 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누나 속상 하게.”
“그 착한 형아가 나보고 그랬어, 여자는 남자가 지키는 거라고. 앞으 론 누나 내가 지킬 거야.”
소상이 짐짓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 모습에 소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느 때보다 소교에겐 행복한 밤이었다.
그런데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동생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려는 찰 나 멀리서 불길한 비명이 들려왔다. 소교는 산짐승이 울부짖는 거라며 동생을 안심시키고 막사 밖으로 조 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밖에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말을 탄 무리가 도망치는 마을 사 람들의 뒤를 쫓으며 칼을 휘둘렀다. 등이 갈라지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소교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안으 로 들어와 숨을 곳을 찾았다. 다행 히 임시로 만든 침상 밑에 두 사람 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 다.
“상아, 누나 말 잘 들어. 지금부터 우린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술래가 알아차리면 안 되니까 술래가 돌아 갈 때까지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돼.”
소교가 소상을 데리고 침상 밑으로 기어들었다.
잠시 후 막사가 거칠게 요동치며 안으로 독안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하나 남은 눈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새로운 사냥감을 쫓았다.
침상 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교 는 입을 꾹 다물고 소상의 입도 작 은 손으로 틀어막았다.
“킁킁, 분명 애새끼들 냄새가 진하 게 풍기는데 대체 어디로 숨은 거 지. 여긴가?”
남자가 침상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몸을 바짝 굽혀 얼굴을 침상 아래쪽으로 들이밀었다.
순간 세 쌍의 시선이 교차했다.
두려움에 떨리는 두 쌍의 시선과 호선을 그리는 한 쌍의 시선. 남자 는 양손을 밑으로 밀어 넣어 남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둘은 안 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무공을 익힌 어른의 힘을 이겨 내기 엔 역부족이었다.
“제, 제발, 우리 상이만은 살려 주세요.”
소교가 눈물 바람으로 사내에게 애 원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 니 동생만은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어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끔 찍하네. 근데 어쩌지, 이 아저씨한테 도 지켜야 할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거든. 너흴 살려 두면 우 리마누라랑 자식이 죽어. 그니까 시끄럽게 조잘대지 말고 얌전히 뒈 져.”
독안의 사내가 매정하게 칼을 휘둘 렀다.
“젠장, 허탕만 쳤잖아. 하긴 그때는 별로 관심도 두지 않았던 사안이니 기억이 정확할 리 없지.”
혈옥불을 찾아 잠시 신하촌을 떠났 던 설우진이 터벅터벅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그는 지난 나흘의 시간 동안 용아 보에 다녀왔다.
그의 기억 속에서 첫 번째로 혈옥 불을 손에 넣은 곳이 용아보였기 때 문이다.
한데 그가 방문했을 때 용아보는 텅텅 비어 있었다.
난감하게도 백승천이 혈옥불을 쫓 아 움직인 시점과 그가 방문한 시점 이 일치했던 것이다.
기다릴까 하다가 그는 고민 끝에 걸음을 돌렸다.
분명 혈옥불은 탐나는 보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력이 늘어난다는데 누군들 욕심내지 않겠 는가.
한데 과거와 달리 설우진에겐 벽뢰 진천이라는 희대의 내공심법이 있었 다. 혈옥불을 손에 넣지 않고도 충 분한 내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 다.
그리고 뭣보다 혈옥불로 인해 야기 될 문제들이 마음에 걸렸다.
혈옥불은 군림마천의 신물로 알려 져 있다.
남들이 모르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모를까 만에 하나라도 그 행적이 밝혀진다면 욕심 많은 작자들이 눈 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뻔했다. 전생처럼 혼자의 몸이었다면 까짓 배짱을 부려 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은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용아보를 빠져 나온 설우진은 근처 시전에 들러 소 교 남매에게 줄 간식거리를 샀다.
“소교 녀석, 이걸 보면 뛸 듯이 기 뻐하겠지.”
설우진은 흐뭇한 얼굴로 왼손에 쥐 고 있는 꾸러미를 바라봤다. 그 안 에는 마을을 떠나올 때 소교가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던 당과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소교를 만날 생각에 들떠있던 그의 얼굴은 마을이 가까워 오 자 눈에 띄게 굳어졌다.
“크음, 왜 마을 쪽에서 시체 썩은 내가 풍겨 오지?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염병이라도 돈 건가? 아니야, 전염병이 이 시기에 돌았다 면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 없 잖아.”
설우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시 후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마을의 전경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