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17화 : 낭왕 비무 (3)

랜덤 이미지

낭왕전생 3권 – 17화 : 낭왕 비무 (3)


낭왕 비무 (3)

그는 치군성을 보좌하기 위해 혈룡 보주가 보내온 인사였다. 외삼당 중 하나인 흑매당의 부당주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능하고, 무공마저도 나 이에 비해 뛰어났다.

지난 사흘 동안 그는 치군성의 명 령에 따라 상관추를 자진케 한 흉수 를 찾아다녔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매들이 모두 동원됐다. 먼저 의심 가는 인물부터 추려냈다. 평 소에 자주 해 오던 일이었기에 그 과정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치명적인 실 수를 범하고 말았다.

풍연에 머문 이들의 명단 중에서 설우진을 우선적으로 빼 버린 것이 다.

사실 그를 탓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황룡 학관의 일 년 차 관도가 범인일 거라곤 생 각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놈들을 더 용 서할 수 없다. 감히 나를, 아니 우 리 혈룡보를 기만한 것이니.”

“장로님, 너무 흥분하실 거 없습니 다. 복수의 무대야 저희 쪽에서 만 들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무슨 묘책이라도 있는 게냐?”

“비무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해 주십시오. 돈이 됐든, 여자가 됐든, 지위가 됐든.”

“지금 나보고 투견판을 만들라는 게냐?”

“네. 솔직히 일상적인 비무로는 저 희쪽 무사들이 정파에 밀립니다. 하지만 개싸움을 한다고 가정하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태사군이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개싸움을 언급했다.

개싸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급소를 공격하는 것도 개싸움에선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놈들이 가만히 보고 있겠느냐?” 

“후훗, 체면을 제 목숨보다 소중하 게 여기는 놈들입니다. 따라하라고 해도 못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상관의 죽음으로 잠시 중단됐던 쌍룡무회 명인전이 다시 재개됐다. 일회전을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실시해 대진표를 짰다. 단순 한 우연인지는 몰라도 공교롭게 정 파와 사파의 무사들이 맞붙는 대진 이 꽤 많이 성사됐다.

첫 번째 시합.

백검성의 검주 조황우와 사귀령의 삼혼이 격돌했다.

정통의 검문인 백검성과 살수지문인 사귀령의 대결. 무척 흥미로운 대전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비무대 주변에는 구 름떼 같은 관중이 꽉 들어차 있었 다. 그중에는 설우진과 그 일행도 있었다.

“우진아, 넌 저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아?”

조인창이 물었다.

설우진은 살짝 귀찮은 기색을 보이 면서도 나름의 의견을 냈다.

“초식의 정교함이나 검 끝에 실려 있는 힘은 확실히 백검성 쪽이 좋 아. 이대로 경기가 흘러간다면 십중 팔구는 그가 승리할 거야. 한데 아 까부터 자꾸 맘에 걸려, 저 삼혼의 눈빛이.”

“눈빛이 왜?”

“노골적으로 살기를 담고 있거든.” 

“에이, 설마, 살수를 쓰면 자동으로 실격 처리가 되는데 그런 무모한 짓 을 할까?”

“실격 처리가 돼도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하겠지. 너도 사파 출신 이라 잘 알 거 아니야? 목적을 위 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는 사파의 습성을.”

설우진이 신랄하게 사파의 습성을 꼬집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정파에 비해 사파 는 철저히 실리를 추구했다. 자신들 에게 이익이 된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설우진의 얘기를 증명하기라도 하 듯 시종일관 수세에 몰려 있던 삼혼 이 갑자기 발끝으로 비무대를 세차 게 쓸었다.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그 발끝을 따라 흙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조황우의 얼굴을 덮쳤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흙모래에 조황 우의 시야가 일시적으로 흐려졌다. 그 순간 조황우의 움직임이 주춤했 다.

삼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 게 쇄도해 조황우의 사타구니를 노 렸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조황우는 다급히 보법을 전개하며 삼혼의 공격을 피해 보려 했지만 작정하고 달려드 는 삼혼의 독심을 당해 낼 순 없었 다.

퍽.

조황우의 사타구니에서 둔탁한 소 리가 터져 나왔다.

“끝났네.”

설우진이 한마디를 내던진 순간 조 황우가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그대로 비무대로 쓰러졌다. 철벽무검이란 별호가 붙을 정도로 대단한 인내심 을 지닌 그였지만 그곳을 얻어맞은 충격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남궁천호가 사나운 얼굴로 삼혼을 노려봤다. 대답 여하에 따라 검까지 뽑아들 기세였다.

“아,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계속 수세에 몰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흥 분을 했던 모양입니다.”

삼혼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 했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말하는 입 과 달리 두 눈은 진한 미소를 그리 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궁천호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삼혼의 실 격패를 선언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여러 차례 연출됐다.

사파에 속한 무사들은 노골적으로 반칙을 일삼았다. 정파의 무인들은 이에 나름대로의 대처를 했지만 그들의 음흉한 술수를 당해 내기엔 경 험이 너무 부족했다.


명인전의 경기가 절반쯤 치러졌을 무렵 정파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 였다. 그들은 명인전의 결과를 두고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이대로 계속 지켜만 볼 셈이오?” 

“하면, 우리도 사파 놈들과 똑같이 행동하자는 것인가?”

“먼저 칼을 빼 든 쪽은 사파였소. 그 정도면 명분은 충분한 것 아니 오!”

평소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황보 진천이 복수전을 제안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모용황만은 신중론을 내세 웠다.

“명분이 문제가 아닐세. 우리가 그 런 식으로 대응한다면 쌍룡무회의 의미는 퇴색되고 나아가 맹이 반으 로 쪼개지는 최악의 사태로 번질 수 있네.”

쌍룡맹의 분열. 그것은 또 다른 전 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정파와 사파는 공통의 적을 상대하 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언제든 계기가 마 련된다면 적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모용황은 바로 쌍룡무회가 그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어차피 놈들과 평생을 함께할 수 는 없는 것 아니오. 쌍룡맹이 쪼개 지는 건 나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막기 위해 정파의 자존심을 버 리고 싶지는 않소.”

황보진천이 모용황의 의견에 대놓 고 반박했다. 이에 주변에 있던 많 은 이들이 그의 말에 동조했다. 결국 오후부터 재개된 명인전에선 정파인들도 개싸움에 동참하기 시작 했다.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무슨 수로.”

“하지만 저대로 두면 저 사람 죽을 것 같은데.”

사파일맥인 적혈문의 무사 하나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쏟아 지는 피의 양이 적지 않은 것이 상 처가 꽤나 깊은 듯 보였다.

한데 상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뭐에 씌기라도 한 사람처럼 궁지에 몰린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 둘렀다.

‘정파 놈들도 눈이 뒤집히니까 사 파 놈들 못지않네. 하기야 저게 솔 직한 인간의 본성이지.’

설우진은 철저히 방관자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에게 정이니 사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살아왔 던 낭인의 삶은 그 둘 중 어느 것 에도 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적혈문의 무사 가 잘려 나간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그 순간, 사위가 크게 들끓었다. 사파인들은 정파 무사의 잔인한 손 속에 격노했고, 정파인들은 자업자 득이라며 그에 맞섰다.

“그만 가자.”

설우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궁벽은 말없 이 그 뒤를 따랐고 조인창은 몇 번 을 망설이다 다급히 설우진의 뒤를 쫓았다.


“상황이 저리될 줄 알고 계셨습니까?”

흥분한 군중 속에서 낯익은 두 개 의 얼굴이 보였다.

이 사달을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진성과 그에게 지시를 하 달했던 해천인이었다.

“허허, 내가 신도 아니고 어찌 그 걸 알았겠는가. 그저 둘 사이에 곪 은 응어리가 터질 때가 됐다고 지레 짐작했을 뿐이네.”

“이로써 쌍룡맹은 큰 내흉內凶을 겪게 되겠지요?”

“아마도 그렇게 될 테지. 하나,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걸세. 쌍룡맹에는 황유하와 그의 오른팔인 제갈명이 있으니.”

해천인이 언급한 제갈명은 쌍룡맹 의 대소사를 맡고 있는 총사였다. 총사는 맹주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 하는 자리로, 쌍룡맹의 중요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 을 담당했다.

“아무리 공명의 현신이라 불리는 그자라도 이번 일은 쉽게 수습하기 힘들 겁니다. 정파 쪽이야 그의 입 김이 크게 작용하겠지만 사파는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진추성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지적대로 사파인들은 정파 출신의 총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의도적으로 정파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맹을 이끌어 간다 여겨서 다.

하지만 그건 편견에서 비롯한 그릇 된 오해였다.

제갈명은 공명정대한 사내였다. 그 는 정·사 구분 없이 과가 있는 자는 철저히 따져 벌하고, 공이 있는 자 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정세 도 꽤 읽을 줄 아는군. 그래 자네 말대로 수습하는 과정이 만만치는 않을 걸세. 하지만 그라면 아마 누 구도 예상치 못했던 과감한 선택을 통해 반전을 꾀할 것이네.”

해천인의 적안이 맑게 빛났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