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2화 : 해결사 (2)
해결사 (2)
설우진이 고간에게 슬쩍 눈짓을 보 냈다.
이에 고간은 잽싸게 황월련 곁으로 다가가 양쪽 눈을 가렸다.
그녀의 눈이 가려지자 설우진은 멱 살을 틀어쥐고 있던 진태걸의 오른 쪽 손목을 부여잡고 사정없이 옆으 로 비틀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힘 에 진태걸의 몸은 제 의지와 상관없 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쿵!
진태걸은 불의의 일격에 당황했다.
화초처럼 자란 부잣집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손목을 꺾는 동작이 예사 롭지 않았다.
“네, 네놈 정체가 뭐냐?”
진태걸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으 며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설우진을 바라봤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네놈은 누구 사주를 받고 여기에 기 어든 거야?”
“애, 애먼 사람 잡지 마라.”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설우진이 청룡 무의를 담았던 포장 지를 진태걸 앞에 내밀었다. 순간적 으로 진태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끝내 관련 사실을 완강 히 부인했다.
“역시, 흑도패 놈들은 말로 해선 들어 처먹질 않는다니까. 그래, 너희 식대로 풀어 보자.”
설우진이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젖 히며 몸을 풀었다.
그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뒤 늦게 인지한 진태걸은 발목 어름에 서 또 한 자루의 단도를 끄집어냈 다.
진태걸은 서안 뒷골목에서 쌍칼이 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맨손일 땐 별 볼 일 없는데 칼만 들었다 하면 귀신같이 상대를 조각 낸다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진태걸은 선공을 취했다.
불의의 일격으로 오른팔이 정상적 이지 않은 상태라 싸움을 길게 끌면 자신이 불리하다 판단한 것이다.
쉭쉭쉭.
그의 손끝에서 소도가 현란하게 춤 을 췄다.
급소만을 노리고 들어가는 그 움직
임은 여느 고수 못지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야수안을 익힌 그에게 진태걸의 칼 놀림은 잔재주에 불과했다. 해서 뇌 기를 쓰지 않고도 가벼운 몸놀림만 으로 충분히 회피가 가능했다.
‘빌어먹을, 왜 맞질 않는 거야?’
진태걸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덕분에 동작이 조금씩 커졌다. 공 격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과도하게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쉬익.
진태의 우수가 설우진의 옆구리 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작이 컸던 탓에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 다.
설우진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훤히 노출된 진태걸의 오른쪽 옆구 리에 주먹을 냅다 꽂아 넣었다.
“커억.”
앓는 신음과 함께 진태걸의 옆구리가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갔다. 충격이 심한지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이어 진태걸의 얼굴 쪽으로 설우 진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피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우진은 진태걸의 얼굴을 틀어쥔 채 벽쪽으로 내달렸다.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벽이 부서졌 다.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 낸 진태걸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연 신 피를 토해 냈다.
“겨우 이 정도로 앓는 소리 하지 마. 난 아직 제대로 몸도 못 풀었다 고.”
설우진이 진태걸의 가슴팍에 발을 올려놓고 위압적인 기세로 말을 뱉 었다.
“크, 크윽. 네, 네놈이 이러고도 무 사할 줄 아느냐? 우리 흑월랑은 식 구들을 중히 여긴다. 내가 이리 당 한 걸 두목님께서 알게 되신다면 그 때는 네 목이 무사치 못할 것이다.”
진태걸이 흑월랑의 이름을 내세워 설우진을 압박했다.
하지만 낭왕으로 무수한 강자들과 맞서 본 이력이 있는 설우진에게 흑 월랑 따위가 위협이 될 리 만무했 다.
“남의 목 걱정 말고 네 목이나 걱 정하시지.”
설우진이 발을 진태걸의 목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지그시 힘을 줘 목 뼈를 압박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 성을 깨달았는지 진태걸이 힘겹게 대화를 이었다.
“자, 잠깐, 우리 대화로 풀어 보자 고. 그쪽이 원하는 거 다 말해 주겠어.”
“내가 원하는 게 뭔데?”
“이, 이번 일의 배후.”
“네가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엉뚱 한 놈을 지목하면 나만 손해잖아.”
설우진은 순순히 그 거래에 응하지 않았다. 흑도패의 간교한 술수를 수 도 없이 겪어 봤기 때문이다. 이에 한참을 망설이던 진태걸은 왼쪽 손 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힘겹게 빼냈다. 그리고 그걸 설우진에게 내밀었다.
“흑월랑의 식구임을 상징하는 반지다.”
흑옥으로 만든 반지였다.
겉면에는 흑월랑을 상징하는 늑대 가, 안쪽에는 서열을 나타내는 숫자 십+이 새겨져 있었다.
“흠, 신뢰의 증표로 쓰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한번 믿어 보기로 하지.”
설우진이 흑옥환을 주머니에 넣으 며 발에 힘을 풀었다.
꽉 막혀 있던 기도가 뚫리자 진태 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안 정시켰다.
“자, 이제 시원하게 털어놔 보시지. 어떤 놈들이 이런 치졸한 음모를 꾸 몄는지.”
“크흠, 당가에서 우리 쪽으로 사람 을 보내왔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 상이 험악한 애들을 뽑아서 보내 달 라 청했고 내가 대표로 애들을 이끌 고 오게 됐다.”
하하, 이거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네. 설마 내가 아닌 일 품점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 줄이야. 내가 너무 당가라는 핏줄을 얕봤 어.’
당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설우진 은 자연스럽게 당세기를 떠올렸다. 솔직히 그동안 그는 당세기란 존재를 잊고 지냈었다.
백무영과 달리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고 소예상처럼 친근하 게 다가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고간이 자신을 찾아왔기에 망정이 지 이 일의 수습이 더 늦어졌다면 아마 일품점 전체로 그 피해가 번졌 을 것이다.
“널 찾아왔던 당가 놈들은 어디에 있지?”
“측천대로 서북쪽 방향에 버려진 폐가가 하나 있다. 저 계집을 그곳 으로 데려오라 했으니 아마 놈들도 그곳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폐가라… 분풀이를 하기엔 딱 좋은 장소군. 어디 그 낯짝들 좀 보 러 가 볼까.”
설우진이 진태걸의 어깨를 잡아 일 으켰다.
진태걸은 의아한 표정으로 설우진 을 쳐다봤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굳이 힘들게 찾아갈 필요 없잖 아. 그곳까지 길잡이 역할을 좀 해줘야겠어.”
“이건 약속이…….”
“왜, 불만 있어?”
설우진이 지그시 어깨를 짓눌렀다. 뼛속 깊이 전해지는 통증에 진태걸 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섰다.
폐허로 변해 버린 신하촌에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그들은 붉은빛이 감도는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저마다 한 손에 묵직해 뵈는 상자를 쥐고 있었다.
“상부에서 직접 하달된 지시다.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의 흔적 을 찾아내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가장 먼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그 용도를 쉬이 짐작 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빼곡하게 들 어차 있었다.
‘그간의 정황을 감안해 봤을 때, 놈은 분명 일이 벌어진 후에 마을에 당도한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분명 마을 어딘가에 놈의 흔적이 남아 있 을 거야.’
남자는 상자 안에서 두툼한 주머니 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백색 가루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백색 가루가 흙바닥 위에 흩뿌려졌다.
사내는 뒤이어 상자에서 알이 하나 있는 안경을 꺼내 오른쪽 눈에 걸쳤 다. 그 안경은 천심안이라 불리는 기물로 사물을 크게 확대해서 볼 수 있었다.
‘다른 발자국들은 불규칙하게 나 있는 데 반해 이 녀석은 균일하게 그 형태가 이어지고 있어. 그건 곧 놈의 발자국일 확률이 높다는 거 지.’
사내는 하나의 발자국을 표적 삼아 마을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놀랍 게도 그가 움직이는 방향은 설우진 의 동선과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정체를 추론할 만한 단서가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답답함만 더해졌다. 소득 없는 수색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내의 눈에 시체 하나가 들어왔다. 젊은 청년이었는데 손을 다쳤는지 부목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한 건 부목이 아니라 청년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피가 묻어서 언뜻 보기엔 오래된 옷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 옷 에 가까워. 홍수로 옷들이 다 엉망 이 됐을 텐데 저런 새 옷이 있다는 건 누군가 외부에서 들여왔다는 걸 의미하지.’
사내는 즉시 수하 한 명을 호출했다.
“이 옷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해 봐라.”
사내가 청년의 옷을 벗겨 수하에게 건넸다. 수하는 옷을 받아 들고는 위아래로 자세히 훑었다.
그리고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이 옷은 직조 방식이 상당히 거칩 니다. 이런 식으로 옷을 지어 내는 곳은 섬서 전역과 호북, 산서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는데 호북과 산 서 쪽은 생산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쪽까지 흘러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하면 섬서 일대에서 제작된 옷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로군.”
“네, 그리고 여기 소매 부분을 보 시면 조악하지만 매화 문양이 들어 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양을 넣는 건 도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 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근거로 수색 범위를 좁혀 나간다면 옷의 출 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흠, 그럼 지금보다 인원을 늘릴 필요가 있겠군. 아성, 너는 일 조와 이 조를 데리고 서안을 중심으로 수 색 범위를 넓히도록 해라. 난 인원 이 충원되는 대로 합류하겠다.”
“존명.”
아성이라 불리운 사내가 마을 곳곳 에 흩어져 있던 이들을 한데 모았 다. 그리고 말 대신 수화를 통해 지 시 사항을 전달했다.
잠시 후, 붉은색 피풍의가 작은 내 를 이루며 빠른 속도로 마을을 빠져 나갔다.
“너희들 그 소식 들었어? 글쎄 어 떤 미친놈들이 일품점의 명성을 깎 아내리려고 옷을 담는 포장지에 독을 섞어 만들었대.”
“그럼 최근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도 그 독 때문이었던 거야?”
“응. 포장지 때문에 간지럼증이 일 어난 건데 사람들이 일품점 옷 때문 이라고 오해한 거야.”
“어쩐지, 품질 하나만큼은 최고를 자부한다고 하는 일품점인데 그런 불량품이 대량으로 나왔다는 게 애 당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설우진이 일품점 서안 지점에 다녀 간 후 환불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환불 사건 이후 생긴 일품점이 배 가 불렀다느니, 화려한 명성에 속았 다느니 하는 불평 여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불을 해 갔던 손님들이 지점을 찾아와 사과의 말 을 전하며 옷을 다시 가져갔다.
“아버지, 정말 꿈만 같아요. 어떻게 하룻밤 새 이렇게 상황이 바뀔 수 있죠?”
“후훗, 이게 다 총점주께서 아드님 을 잘 둔 덕이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쩜 그렇게 어른스러울 수 있죠?”
“타고난 역량이 다른 게야.”
“또 만날 수 있겠죠?”
“맘에 들었나 보구나?”
“그, 그런 게 아니라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거든요.”
아버지의 농에 황월련의 얼굴이 잘익은 능금처럼 붉어졌다.
사흘 전, 황월련은 아버지와 재회했다.
설우진이 당가의 무사들을 때려눕 힌 후 가게로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무사히 돌아온 아버지를 보 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선은 시종일관 아버지가 아닌 설우진의 얼굴을 향 하고 있었다.
“네가 맘에 든다면 이 아비가 제대로 힘 좀 써 보마.”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허허, 정말 푹 빠졌구나. 하기야 어디 한군데 빠질 것 없는 사내니.”
황태성은 그날 설우진이 보여 줬던 화려한 몸놀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당문의 고수들은 좁은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암기를 연발했었 다. 그의 눈에는 도저히 피할 구멍 이 없어 보였다. 한데 설우진은 한 줄기 바람처럼 암기 속을 유유히 스 쳐 지나며 당문의 무사들에게 주먹 을 안겼다.
‘청운 그 친구가 총점주와 인연이 꽤 깊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친구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