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화 : 흉수 출현 (2)
흉수 출현 (2)
‘니미,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설우진은 황유하를 모용황에게 맡 긴 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몸 안에 냉기가 침투해 기의 흐름 을 방해했기 때문에 가만있는데도 숨이 차올랐다.
설우진은 냉기를 떨쳐 내기 위해 달렸다.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은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벽뢰진 천의 뇌기가 다시금 맹렬한 기세로 몸 안을 돌았고, 냉기에 의해 막혀 있던 길들은 거칠게 쇄도하는 뇌기 에 의해 뻥 뚫렸다.
“어찌 됐는가?”
약 향이 진하게 풍겨 나오는 약선 당 안. 모용황이 마주 선 중년 사내 에게 말을 건넸다.
눈매가 굵직한 사내는 검룡대의 대 주 양익현이었다.
“죄송합니다. 전력을 다해 뒤를 쫓 았지만 도주로를 미리 확보해 놨는지 맹의 권역을 벗어나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부상자도 있지 않았었나?”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움 직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습 니다.”
“음, 일단 놈들이 사라진 주변을 중심으로 수상한 무리가 없었는지 확인해 보게. 필요하다면 다른 무력 대에도 도움을 청하게.”
모용황은 추가 수색을 지시했다. 검룡대주는 반드시 꼬리를 잡겠다 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방을 나섰 다.
그런데 그가 방을 나서고 얼마 되 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굳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선 사내는 용풍의 수장 차무혁이었다.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맹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때를 잘못 맞췄네. 지금 맹주님을 약을 먹고 주무시고 계시네.”
모용황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 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 호위대에 크게 실망했다. 흉수들이 예상치 못 한 술수를 쓰기는 했지만 너무도 무 기력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 장로님께서 저 대신 이걸 전 해 주십시오.”
차무혁은 품 안에서 패를 하나 꺼 냈다. 금색 테두리에 승천하는 용의 문양이 새겨진 용풍의 신분패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모용황이 차무혁과 눈을 맞추며 물 었고 이에 차무혁은 입술을 깨물다 가 어렵게 입을 뗐다.
“오늘부로 호위장의 지위를 내려놓 고 야인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실망이군,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 피하려 하다니.”
“죄송합니다.”
“알았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앉 혀 놓을 순 없는 노릇이지. 이 용패 는 내가 대신 전해 줌세.”
모용황은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보다 한발 앞서 용패를 낚아채는 이가 있었다. 그것 은 지난밤에 황유하와 함께 약선당에서 밤을 지새웠던 설우진이었다.
하룻밤 새 그의 얼굴은 많이 환해 져 있었다.
뭐 좋은 거라도 받아먹었는지 얼굴 전체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이게 무슨 짓인가?”
모용황은 짐짓 화난 어투로 말하며 설우진을 바라봤고 이에 설우진은 넉살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라고들 하 잖아요. 큰 실수를 한 건 분명한 사 실이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그만두라고 한 것이 아닐 세.”
“그럼 제 기억이 잘못된 건가요?
어제 분명 장로님께서 호위대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그, 그거야……”
모용황은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렸 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 이었다.
“장로님, 지금은 실력이 뛰어난 호 위보다 믿을 수 있는 호위가 더 필 요한 상황이에요. 한데 이렇게 내부 의 결속이 흔들려서야 되겠어요?”
설우진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에 속에선 부아가 치밀었지만 틀 린 말이 아니었기에 모용황은 수용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짧았네. 그 용패는 차대장에게 다시 돌려주게.”
“장로님!”
차무혁은 당황한 얼굴로 모용황을 쳐다봤다.
“방금 전에 저 친구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지금은 내부의 결속 을 다질 때이네. 그리고 정 그렇게 책임을 지고 싶거든 지금 당장 내 앞에 흉수들을 데려오게. 그리한다 면 내 자네의 용패를 받아 줌세.”
모용황이 강한 어조로 대꾸하자 차
무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용패를 건네받았다.
“받아라.”
제갈명이 설우진에게 묵직한 전표를 건네자 설우진은 곁눈질로 전표에 적힌 액수를 확인했다.
은자 일천 냥.
“약속했던 돈보다 더 많은 것 같은……?”
“수고비 조로 좀 더 챙겨 넣었다.”
“역시 큰 세력을 이끄는 분이라 그 런지 화끈하시네요. 이 돈은 몸조리 하는 데 아낌없이 쓰겠습니다.”
설우진은 가슴팍에 전표를 쑤셔 넣 었고 그 거침없는 모습에 제갈명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리며 심중에 묻어 두고 있던 의구심을 밖으로 끄 집어냈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네 녀 석은 왜 황룡 학관에 다니는 게냐?
네 실력이면 굳이 황룡 학관을 통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아, 제가 전에 말씀 안 드렸나요? 저는 무과가 아니고 문과생이에요.”
“……왜?”
“실은, 제가 머리 쓰는 게 좀 부족 하거든요. 지난번에 그것 때문에 아 버지께서 큰 화를 입을 뻔도 하셨고……”
설우진은 황룡 학관에 가게 된 계 기를 간략하게 설명했고 그 얘길 들 은 제갈명은 반색하며 대화를 이었 다.
“하면 졸업 후에는 어찌할 셈이냐? 따로 정해 둔 곳이 없다면 내 군사부에 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는 데.”
제갈명은 넌지시 군사부로의 영입 을 제안했다. 하지만 설우진의 반응 은 심드렁했다.
“죄송하지만 쌍룡맹에 들어갈 생각 은 추호도 없어요.”
“이유가 뭐냐? 혹, 따로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는 게냐?”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제가 누 구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 지 않거든요.”
“하면 그 대단한 실력을 그냥 썩힐 참이냐?”
제갈명이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군사부는 맹 내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손발이 되어 움직여 줄 마땅한 무력대가 없었다.
힘이 집중되는 걸 우려한 천중오가 의 다른 가주들이 군사부로의 차출 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군사부에는 제갈세가 에서 데려온 친위대가 유일하게 무 력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 에 설우진이란 존재가 그에겐 더 절 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 하고 설우진은 뜻을 꺾지 않았다.
“흠,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날 찾아오너라.”
제갈명은 아쉬운 얼굴로 설우진을 배웅했다.
황유하의 고희연에서 벌어진 일련 의 사고는 강호를 한바탕 뒤집어놨 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대상이 쌍 룡맹의 맹주였기에 여파가 더욱 대 단한 것이다.
우선 쌍룡맹은 대대적으로 경비 인 력을 충원했다. 특히 맹주가 머무는 신룡전 주변에는 사대 무력대 중 둘을 집중 배치했고, 소란이 시작된 부분에서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한 두 명의 장로를 소환했다.
하지만 강도 높은 조사가 이어졌음에도 두 사람에게선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마신 술에서 실제로 독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강경파들은 온건파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강경파를 대표하는 두 장로에게 맹 주 암살의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수 작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온건파 측에선 말도 안 되 는 억측이라며 크게 반발했고, 이후 흉수를 밝히기 위한 조사는 흐지부 지된 채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만 격화됐다.
맹주와 군사가 전면에 나서서 중재 해 보려 했지만 한번 불이 붙은 신경전은 좀체 진정되질 않았다.
결국 흉수는 밝혀내지도 못하고 양측의 갈등만 더 깊어졌다.
“지난번 실수는 이해할 수 있었네 만 이번 일은 정말 의외로군, 현무 십령까지 동원하고도 맹주의 숨통을 끊지 못하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가렴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혈옥불에 이은 두 번째 치명적인 실책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번 일로 마천 쪽의 움직임이 심 상치 않네.”
“설마, 저희와의 공조를 끊겠다는…..?”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네만 그럴 공산이 크네. 자네도 알다시피 마천 주는 우리와의 공조를 처음부터 탐 탁지 않아 했었네.”
“제가 그자에게 빌미를 제공한 셈 이군요.”
위가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회에서 오랫 동안 준비한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 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네, 자 네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터질 일 이었으니. 다만 안타까운 건 그 시 기가 너무 빠르다는 것일세.”
해천인은 애당초 마천이 독단적으 로 움직일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마천과 역천회는 한데 섞일 수 없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기였다.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내부적인 갈등이 있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쌍룡맹은 건 재했고 맹이 찢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데 지금 마천이 재발호를 한다! 이는 쌍룡맹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 될 수 있었다. 내부의 갈등을 외부 의 적으로 상쇄시킬 수 있기 때문이 다.
해천인의 말을 듣고 난 후 위가렴은 처음보다 더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공의 말씀대로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마천의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들에게 신뢰를 잃었네. 이 쪽에서 무슨 말을 한들 먹히지 않을 거란 얘기네.”
해천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언성 을 높였다. 격해진 감정을 대변하듯 그가 잡고 있던 탁자 한 귀퉁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움푹 패여 들어갔다.
“자넨 그만 안가로 돌아가게. 그리 고 따로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자중하고 있게.”
해천인은 질책하며 축객령을 내렸 고 순간 위가렴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 다. 대신 방을 나서기 전에 설우진 의 존재에 대해 강하게 피력했다.
“그놈은 필시 회의 대계에 큰 걸림 돌이 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 든 놈의 정체를 밝혀 주십시오.”
‘그리만 해 주신다면 제 손으로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입니다.’
짧은 순간 그의 눈에 살의가 떠올 랐다 사라졌다.
“그 일이라면 이미 흑개방에 얘길해 뒀네. 장로가 직접 나선다고 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뜻밖의 이름이 거론됐다.
흑개방.
이름에서 짐작되듯 개방에서 갈라 져 나온 세력이다.
기본적인 조직 구도는 모체인 개방 과 흡사하나 명분을 중시하는 개방 에 비해 그들은 실리를 추구했고 이 런 점 때문에 흑개방은 강호인들에 게 이단 취급을 받았다.
“제가 그들을 도울 일이 없겠습니 까?”
“흑개방은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 되네. 자네의 맘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만있는 게 그들을 돕는 걸 세.”
해천인은 위가렴의 청을 단호히 거 절했다. 위가렴은 아쉬움이 남는 눈 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조아리고 무 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자넨 어찌 생각하나?”
위가렴이 떠난 뒤 해천인은 벽에 대고 말을 건넸고 순간 벽 속에서 환상처럼 하나의 인영이 빠져나왔 다.
흑성 진추성이었다.
“저 자존심 강한 친구에게 일격을 먹였을 정도면 보통내기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자네가 그리 평가할 정도면 백 대 고수 급이라고 봐야 하는데……. 아 무리 생각해 봐도 쉬이 짐작이 가질 않네.”
“혹시 화산에서 내려온 것은 아닐까요?”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네, 심산 유곡에 틀어박혀 수련에만 힘쓰는 도인들도 있으니. 한데 청성의 말로 는 그자가 뇌기를 사용했다 했네. 그것도 설빙무진을 압도할 정도로 강한.”
“그럼 화산은 아니겠군요.”
진추성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꼬리 를 흐렸다. 화산에는 뇌의 기질을 지닌 무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뇌리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 다.
삼 년 전에 평소 친분이 있던 적 성과의 술자리에서 나눴던 내용이었 다.
“해공, 혹시 통천문이 지키던 마동 에 어떤 무공이 봉인되어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