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5화 : 의형제 (2)
의형제 (2)
‘저게 칭찬이야, 욕이야?’
남궁벽은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발끈하지는 않았 다. 성질을 내 봐야 자신만 손해라 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설우진.”
바로 그때, 교실 문이 열리며 낯익 은 얼굴이 비쳤다. 적사호의 수업을 돕고 있는 조교 양모란이었다.
그녀는 인 자 조 소속으로 내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조교는 봉사직이지만 졸업 평가 시에 일정 부분 가산점이 주어지기에 그 경쟁이 꽤나 치열했다.
‘저 계집이 여긴 웬일이지?’
설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흘낏 쳐다 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모란은 일전에 그에게 의도적으 로 접근해 온 적이 있었고 목적은 그가 지닌 배경과 돈이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몸을 드러내 유 혹했다. 객관적으로 훌륭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기에 설우진도 처음엔 마음이 슬쩍 흔들릴 뻔했다.
한데 그녀의 입에서 일품점이란 이 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일품점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교무실로 들어섰다.
“저쪽에 가면 학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양모란은 휙 돌아서 갔다.
설우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 을 지어 보였다. 흐릿하게 잊고 지 냈던 낭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 이다.
낭인 시절 그는 많은 여자를 만났 다.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는 수중에 돈 이 마를 날이 없었기에 원하기만 하 면 언제든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
한데 그 뒤끝은 항상 좋지 못했다. 돈을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은 돈이 떨어지는 순간 완전히 딴사람이 되 어 돌아섰다. 마음을 돌려 보려 애 썼지만 돈이 없는 그는 더 이상 그 녀들에게 사랑스러운 남자가 아니었 다.
그런 면에서 자스민은 참 좋은 여자다.
“왔으면 어서 이쪽으로 오지 뭘 거 기서 멀뚱히 서 있는 거냐?”
상념에 젖어 있던 그때 귓가에 묵 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무겸전의 인재양성’ 과목을 맡고 있는 적사호였다.
“절 부르신 용건이 뭐죠?”
적사호와 얼굴을 마주한 설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이지만 이상하게 적사호 앞 에선 기를 펴기가 쉽지 않았다, 괜 히 죄지은 사람처럼.
“오늘부터 신입 관도들의 진로 상 담을 맡게 됐다. 형식적으로 진행되 는 것이니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 하면 된다.”
‘아니, 웬 뜬금없는 진로 상담?’
설우진은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황룡학관의 관도들에겐 절대적인 목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쌍룡맹 입맹이다.
한데 목표가 정해진 이들에게 진로 상담이라니, 왠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나도 위 에서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이니. 자, 이곳을 졸업하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적사호가 물었다.
설우진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가업을 잇는 것도, 관리가 되는 것도 아직 은 영 내키지가 않습니다.”
“무인이 되는 길은 전혀 염두에 두 지 않은 게냐?”
“싸움질이라면 이제 지겹습니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나이도 어린놈이 싸움을 해 봤으면 얼마나 해봤다고.”
적사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 문하자 그제야 설우진은 자신의 실 책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학관에 입관하기 전에 제법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학사님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럼, 쌍룡맹에서 와 달라고 해도 거절할 셈이냐?”
“마음에 없는데, 갈 이유가 없지 요! 그리고 뭣보다 쌍룡맹은 저와 체질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뭐가 안 맞는다는 게냐?”
“전 뒤통수치는 인간들을 세상에서 가장 경멸합니다. 한데, 쌍룡맹은 지 난 마천 쟁투에서 그 추잡한 짓거리 를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뻔뻔스 럽게 자행했습니다. 그걸 뻔히 아는 데 제가 어떻게 쌍룡맹에 들어가겠습니까!”
“크크큭, 정말 욕먹을 소리만 골라 서 해 대는구나. 뭐 그런 점이 네 녀석의 매력이긴 하지만.”
적사호는 설우진의 답을 듣고 기분 이 좋은지 실소를 터뜨렸다.
한데 설우진은 그 웃음이 영 달갑 지가 않았다. 그가 웃을 때마다 반 갑지 않은 일이 필연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설우진은 적사호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이 정도면 제 진로에 대한 답은 나온 것 같은데…………. 그만 가 봐 도 될까요?”
“아직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남았 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려 라.”
적사호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 로 설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거 점점 더 불안해지는데.’
설우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적사호 의 입을 주목했고, 잠시 후 적사호 가 입을 뗐다.
“넌 지금의 강호를 어찌 보느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당금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쌍룡 맹은 철저히 탐욕에 찌들었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진심으로 강 호를 위하는 이들이 제법 섞여 있었 지만, 지금은 근묵자흑이라고 그들 마저 변질되어 버렸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나와 손을 잡고 이 썩어 빠진 강 호를 바꿔 볼 생각 없느냐? 탐욕으 로 물들기 전의 순수한 강호로 되돌 리잔 말이다.”
‘미친’
솔직한 설우진의 속내였다. 이상한 얘기가 나올 거란 건 어느 정도 예 상하고 있었지만 쌍룡맹을 상대로 싸움을 하자니, 미치지 않고서야 나 올 수 없는 얘기였다.
이에 설우진은 솔직한 자신의 속내를 표현했다.
“학사님, 전 인창이처럼 정의감 넘 치는 놈이 아닙니다. 지금의 강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전면에 나서서 그 부조리함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로구나. 한 데 여기서 네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뒤틀린 강 호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가만,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 움직임이라는 게 역천격세逆天格世 는 아니겠지?’
설우진이 불현듯 떠올린 그 이름,
역천격세.
수호 가문이 기존의 하늘인 쌍룡맹 을 무너뜨리고, 삼천세라는 새로운 하늘을 여는 일련의 과정을 상징적 으로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아, 아닐 거야. 하지만 역천격세가 맞다면 이 인간도 수호 가문의 사람 이란 거잖아!’
설우진은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 앉았다. 사실 전부터 적사호의 정체 가 수상쩍기는 했었다. 일단 자신의 기억 속에 그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 고 학관 내에서도 도통 다른 학사들 과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 다. 그리고 무엇보다 쌍룡맹을 거론 할 때면 순간적으로 두 눈에 살기가 비쳤다.
“학사님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십니까?”
설우진은 그가 수호 가문의 사람임 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건넸다.
이에 적사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 더니, 가감 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지금의 강호는 거짓된 정의에 물 들어 있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강호는 뼛속까지 물들어 종국에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그 거짓된 정의라는 게 대체 뭡니 까? 지금의 쌍룡맹이 딱히 잘못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그, 그건…….”
적사호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 을 보였다.
사실 마천 쟁투가 끝난 뒤 쌍룡맹 은 강호의 주인으로서 그 역할에 충 실히 수행해 왔다.
전국 각처에서 마천의 잔당을 찾아 내 축출했고, 혼란한 틈을 타 양민 들을 수탈하는 산적들과 마적들도 소탕했다. 덕분에 양민들 사이에서 쌍룡맹은 정의로운 집단으로 인식되 고 있었다.
“쌍룡맹과 무슨 악연으로 얽혀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하게 판단하 십시오. 학사님의 섣부른 판단이 자 첫 애꿎은 이들을 다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하자는 그따위 헛소 리는 그만하십시오.’
설우진은 열심히 적사호를 설득했 다. 물론 강호의 안녕이 아닌 자신 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 하고 적사호는 뜻을 꺾지 않았다. 복수심이 골수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었던 건 아 니다.
“서로의 뜻이 맞지 않으니 함께하 기는 힘들 것 같구나. 오늘 여기서 들었던 내용은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우도록 해라. 취중에라도 오늘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 다.”
“죄송합니다, 웬만하면 들어 드리 고 싶었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 그만해라, 네놈 은 얼굴에 감정이 솔직하게 묻어나 니.”
“하하, 그런가요.”
설우진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 내려 애를 썼다. 그 노력을 읽었는 지적사호도 더는 쌍룡맹에 대한 얘 기를 꺼내지 않았다.
타당탕탕.
탕탕탕.
요란하게 밥그릇을 두들겨 대며 한 무리의 거지 떼가 등장했다.
그들은 배짱 좋게 쌍룡맹 대문 앞에 자리를 잡고 구걸 시위를 벌였고 수문위사들이 사납게 인상을 쓰며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들을 쫓는 이가 없었다.
“어이, 눈에 힘 그만 주지. 거지가 배고파서 동냥 좀 하겠다는데, 그게 욕먹을 일은 아니잖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 거 지가 코를 후비며 당당하게 소리쳤 다.
그의 허리에는 일곱 개의 매듭이 걸려 있었다.
한데 오랫동안 빨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매듭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얘들아, 가락을 좀 더 구성지게 넣어라! 이래 가지고 밥 얻어먹겠냐?”
중년 거지가 동료 거지들을 독려하 며 힘차게 밥그릇을 두들겼고 이에 주변에서도 덩달아 소리를 높였다. 참다못한 수문위사는 쪽문으로 들 어갔다. 그러고 얼마 후, 큼지막한 그릇에 밥과 반찬을 그득 담아 들고 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이 마지막이오. 또 아까와 같 은 소란을 피운다면 그때는 우리도 참지 않을 것이오.”
수문위사가 그릇을 건네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허허허, 우리도 상도덕이란 것이 있네. 사흘 이상 한 집에서 구걸하 는 일은 없으니 염려 말게.”
중년 거지는 뻔뻔하게 웃으며 그릇 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담벼락 아래 그늘이 지는 명당자리 로 옮겨 가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 다.
그들이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의 양손에는 진한 주향이 흘러 나오는 술병과 잘 말린 황구포가 들 려 있었다.
“구암 형님, 오랜만입니다!”
남자는 중년 거지에게 친근하게 말 을 걸었다.
식사에 열중하던 중년 거지는 코끝 을 씰룩이며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중년 거지가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내며 반가움을 표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진제, 이쪽으 로 앉아. 집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 은 들었는데, 언제 이곳까지 온거 야?”
“정주에 도착한 지는 좀 됐습니다. 맡은 일이 있어서 형님이 이곳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빨리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근데 그 술병에 든 거 혹시 금존청 아니 야?”
“후훗, 맞습니다. 오랜만에 형님을 뵙는 건데, 빈손으로 오기 그래 …….”
“하하하! 역시 우리 진제는 예의가 참 바르단 말이야. 그럼 오랜만에 귀한 술로 목 좀 축여 볼까?”
중년 거지 구암은 술병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콸콸콸.
금존청이 폭포수처럼 목구멍으로 쏟아졌다. 보통 사람은 한 모금 마 시기도 힘든 술이건만,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한 병을 뚝딱 비 워 냈다.
-자네가 이곳까지 날 찾아온 걸 보면 해공의 명을 받은 모양이군? -네. 조사에 진전은 좀 있으셨습니 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네. 이틀 동안 쌍룡맹 주변을 맴돌 았지만 다들 몸을 사리는 눈치더군. 아마 한동안은 원하는 정보에 접근 하기 힘들 것 같네.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척 하면서 은밀히 전음을 주고받았다. 사실 둘은 안면만 있는 사이였다. 그럼 언제쯤 다시 찾아뵙는 게 좋을까요?
-음, 한 달 뒤가 좋을 것 같군, 그맘때쯤이면 놈들의 경계심도 풀려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