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6화 : 의형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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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4권 – 6화 : 의형제 (3)


의형제(3)

“형님, 다음번엔 이런 야박한 동네 말고 저희 동네로 오십시오. 제가 거나하게 한 상 차려서 대접하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한 달 뒤에 봄세.”

두 사람은 태연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우진아, 학사님하고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학관을 나서는 길. 조인창이 설우 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설우진의 얼굴은 평소 와 다르게 굳어 있었다.

‘왜 하필 그 인간이 수호 가문의 사람이냐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얽 히질 말았어야지.’

설우진은 적사호의 정체를 안 뒤로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지난 일 년간 그는 적사호와 지겨 울 정도로 부딪쳤다. 욱해서 욕을 내뱉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한데 정이란 놈이 참 묘하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 다 개소리인 줄 알았는데, 겪어 보니 그 말이 진짜 로 맞다.

가만있어도 괜히 신경이 쓰이고, 잊으려 하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젠장, 술이나 마시자!”

답답한 마음에 설우진은 술자리를 제안했다.

“진랑이 사는 거야?”

옆에 바짝 붙어 걷던 자스민이 매 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자연스럽게 설우진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언제 술값 아끼는 거 봤어?

원하는 데 있으면 말만 해.”

“그럼 우리 취선루로 가자.”

“취선루?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최근에 문을 연 주루야. 나도 친구들한테 얘기만 들었는데, 과일 향 이 그윽하게 풍기는 가운데 혀끝을 감도는 알싸한 술맛이 일품이래.” 

“호오, 그래? 그럼 가 보지 않을 수 없지. 가자!”

장소가 정해졌다.

설우진은 자스민을 길잡이 삼아 부 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 쪽에서 눈치를 보며 걸음을 옮기던 조인창이 옆으로 슬쩍 빠졌다.

‘오늘 우진이 눈빛이 예사롭지 않 아. 분명 술자리가 시작되면 죽어라 부을 텐데………… 승급 시험을 앞두고 그런 무리수를 둘 수는 없어.’

조인창은 태생적으로 술이 약했다.

한두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달 아오르고 넉 잔이 넘어서면 상에 고 개를 처박기 일쑤였다.

‘우진아, 미안. 오늘 못 마신 술은 다음에 배로 마실게, 승급 시험 끝 난 후에!’

조인창은 설우진의 동태를 조심스 럽게 살피며 골목 어귀에서 등을 돌 렸다.

그런데 그가 등을 보인 순간, 억센 손길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인창아, 집에 꿀단지라도 모셔 놨냐? 왜 쥐새끼처럼 도망을 치려고 그래!”

설우진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술을 못 마시니까………..”

“인마, 그러니까 더 같이 가야지. 사내놈이 술 한 병도 제대로 못한다 는 게 말이 돼? 아무 소리 말고 따 라와!”

조인창은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점 안에서 한 사내가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누구한테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후휘, 여긴 네놈처럼 근본 없는 놈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괜히 여기 물 흐리지 말고 저 아래쪽에 가서 싸구려 분주나 마셔라.” 

사내의 발치로 철전 뭉치가 떨어졌 다.

“니미럴, 내가 거지새끼냐! 네놈의 돈이 아니라도 술 한 잔 정도는 내 돈으로 사 마실 수 있다.”

하후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 다. 그러고 사나운 눈초리로 문밖에 서 있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청년 을 노려봤다.

“천한 놈이라 그런지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창해!”

“네, 도련님.”

“놈이 더는 저 지저분한 입을 놀릴 수 없도록 확실한 가르침을 줘라.”

청년의 명령에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중년 사내가 하후휘 앞으로 나섰 다. 그의 손에는 검붉은 빛깔이 감 도는 철곤이 들려 있었다.

“내 손 속이 사납다 원망 마라. 공 자님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내 경고를 무시한 건 하후휘 네놈이니.”

중년 사내가 하후휘를 향해 철곤을 휘둘렀다. 단순한 위협의 의미가 아 닌지 웅혼한 파공성이 일었다.

‘빌어먹을, 아직 부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건가?’

옆구리로 파고드는 철곤을 보면서 하후휘는 힘겹게 검을 뽑았다. 쾌검 을 익힌 듯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절 묘하게 발검이 이뤄졌다. 한데 안타깝게도 검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 았다.

쿵!

철곤에 밀려 하후휘의 몸이 재차 바닥을 굴렀다. 몸 내부로 전해진 충격이 상당한 듯 바닥에 웅크린 채 로 거친 기침을 해 댔다.

“엄살 부리지 마라. 겨우 그 정도 로 쓰러질 네놈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중년 사내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퍽퍽퍽.

철곤이 하후휘의 몸을 거침없이 두 들겼고 그때마다 하후휘는 앓는 소 리를 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도우려는 이가 없었다.


“저거 뭐냐?”

취선루로 향하던 설우진의 발걸음 이 멈춰 섰다. 대로변에서 일어난 싸움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설우진은 자연스럽게 구경꾼 무리 에 합류했다. 물론 오지랖 넓게 나 서서 도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두고 볼 거야? 저대로 뒀다 간 죽을 수도 있어.”

옆에서 지켜보던 조인창이 설우진 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전후 사정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나설 순 없잖아. 그리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저놈, 그 와중에도 충격을 흘려보내고 있어.”

“그게 무슨……?”

“너 부도웅 알지? 아무리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인형. 그것처럼 녀석 은 철곤이 떨어질 때 순간적으로 몸 을 움직여 그 힘을 분산시키고 있 어. 아마 저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에이, 설마.”

조인창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었다.

한데 실제로 설우진이 예상한 대로 뜻밖의 반전이 펼쳐졌다. 시종일관 두들겨 맞고 있던 청년이 기습적으 로 철곤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활짝 열린 중년 사내의 가슴팍으로 팔꿈치를 찔러 넣은 것이다.

방심의 대가는 꽤 컸다.

명치를 얻어맞은 중년 사내는 거친 숨소리를 내더니 힘없이 바닥에 주 저앉았다.

“창 호위, 저놈의 개 노릇을 오랫 동안 하더니 곧 끝이 많이 무뎌졌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수작이라니,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서 체득한 내 기술을 폄하하지 마. 하후가의 그 잘나 빠진 무공보다 몇 배는 더 나으니까.”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 냐?”

“그런 협박에 겁먹기엔 내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어. 그러니 까 그 아가리 닥쳐. 확 찢어 버리기전에.”

하후휘가 중년 사내의 입에 거칠게 오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진짜로 찢어 버릴 기세였다.

“이놈, 당장 철 호위를 풀어 줘라.”

“내가 왜?”

“그는 하후가의 식구다. 어찌 하후 가의 핏줄이 제 식구를 해하려 한단 말이냐?”

“크크큭, 그럼 방금 전까지 네놈들 이 나한테 한 짓은 뭔데? 이 철곤 으로 날 죽이려 들었잖아.”

“그, 그건…….”

“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그러니까 이 인간 무사히 데려가고 싶으면 내 앞으로 와서 빌어.”

하후휘가 창해의 머리채를 잡아 올 렸고 창해의 얼굴은 모욕감에 벌겋 게 달아올랐다.

‘젠장, 이것들은 오늘따라 왜 이리 늦는 거야?’

하후령은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둘 러보았고 얼마 후 그의 얼굴에 의미 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시선 너머에 황룡 학관의 관 복을 입은 이들이 비친 것이다. 

“무슨 일이야?”

황룡 학관의 관도들이 구경꾼들 사 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관복을 확인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길을 터줬다.

무리의 선두에 선 이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무영이었다. 최근 에 연무관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고 하더니 눈에 띄게 살이 빠져 있었 다.

“회주!”

백무영을 발견한 하후령이 다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는 하후휘 가 술김에 시비를 걸어왔다며 제 유 리한 대로 말을 지어냈다.

“중천회의 회주로서 학관 주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백무영이 여봐란듯이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하후휘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백무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거침없 이 말을 뱉었다.

“이봐, 남의 집안일에 신경 끄시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역시 계집종을 어미로 둔 티를 내 는구나. 이래서 근본이 중요하다는 것이지.”

“네놈이 뭘 안다고 그따위 소릴 지 껄이는 것이냐! 어머니 아버지라 부 르기도 부끄러운 작자의 탐욕에 일 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셨다. 양 갓집 규수로 약혼자까지 두고 있던 그분을 망가뜨린 건 다름 아닌 하후가다.”

하후휘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주변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후휘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은 세간에 크게 알려진 바가 없 었기 때문이다.

-회주님, 놈의 입을 틀어막아 주십 시오!

하후령이 다급히 전음으로 백무영 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백무영은 쉽 게 움직이지 않았고 누가 상가의 자 식 아니랄까 봐 조건을 내걸었다. 

-놈을 혼내 주는 대신 오늘 술값 은 네가 책임져라.

하후령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 를 끄덕였다. 망신살이 뻗치는 것보 단 그편이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그렇게 둘의 은밀한 거래는 성립됐다.

잠시 후, 백무영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하후휘 앞으로 천 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간의 수련 이 헛되지 않았는지 전에 없던 묵직 한 기세가 느껴졌다.

‘빌어먹을,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데, 저 괴물 같은 놈은 또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하후휘는 한눈에 백무영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임을 알아봤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맞서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해서 그는 남은 내력을 억지로 쥐어짜 냈다. 쥐꼬리만 한양 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수를 쓸 수는 없으니, 가볍게 뺨을 쳐 주마.” 

백무영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시야 에서 사라졌다. 지난날 설우진의 쓰 린 독설을 듣고 열심히 배운 쾌영보 였다.

쾌영보는 도둑 출신으로 거상의 자 리에 오른 비도무영의 독문심법으로 방향 전환이 자유롭고 짧은 순간에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놀림이 가능했다.

찰싹.

하후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의 뺨에서 경쾌한 타격음이 일었다.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려 있었는지 얼굴이 젖혀짐과 동시에 몸이 날아갔 다.

“크윽.”

벽에 한차례 부딪쳤다 떨어진 하후 휘가 거친 신음을 토해 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선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 만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 다.

‘예상은 했지만 하후령 저 병신 같 은 놈보다 배는 더 강하잖아. 이렇 게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전술로 맞 붙는 거.”

하후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리를 내뻗을 때마다 관절이 요란 하게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일 장 이내로 좁아졌다. 백무영은 하후휘가 어떤 공격을 하든 막아 낼 수 있다는 듯 그가 가까이 접근하는데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하후휘의 손끝이 바닥 을 훑었다. 굵직한 흙모래가 손끝에 걸렸다.

휘익.

백무영의 손끝을 따라 흙모래가 백 무영의 얼굴 쪽으로 날아갔다.

방심하고 있던 백무영의 반응은 기민하지 못했고 짧은 시간 그의 시야가 흙모래에 의해 가려졌다.

순간적으로 훤히 드러난 옆구리. 하후휘는 몸에 회전을 걸어 백무영 의 오른쪽 옆구리로 팔꿈치를 거칠 게 찔러 넣었다.

퍽.

백무영의 옆구리가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갔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 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무영 이 대수인과 더불어 익힌 유가신공 때문이었다.

유가신공은 몸에 탄력을 더해 주는 무공으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는 데 탁월한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천한 놈이라 그런지 그 수법마저 치졸하구나. 지저분한 그 손, 아예 못 쓰게 만들어 주마.”

백무영은 하후휘의 손목을 잡아챘 고 손끝에 힘을 실어 천천히 비틀었 다.

“크아악!”

하후휘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나치다 싶었지만 누 구 하나 나서서 돕는 이가 없었다. 

“선배, 그쯤 하시죠.”

하후휘의 손목이 반쯤 꺾였을 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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