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8화 : 귀향지로 (1)
귀향지로 (1)
“마셔라.”
설우진이 흘러넘칠 듯한 술잔을 하 후휘에게 건넸다. 하후휘는 부목이 감겨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이용 해 술잔을 건네받았다.
“왜 나한테 잘해 주는 거요? 아까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어떤 신분 인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하후휘는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설우진을 바라봤다.
“그깟 신분이 뭐 대수라고. 이 강호는 힘만 있으면 언제든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잖아.”
“그 힘이란 것도 배경이 있어야 손 에 넣을 수 있는 거 아니요? 하늘 에서 기연이 뚝 떨어지지 않고서 야.”
하후휘가 한탄을 늘어놨다.
그는 나면서부터 하후가에서 철저 히 외면당했다. 가주의 핏줄을 타고 났지만 하후가의 무공은 구경조차 해 보지 못했고 집 안에 머무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찾아 헤맸다. 이름난 무가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기도 하고 낭인 무리에 섞여 실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뿌리가 없는 배움은 그 한 계가 뚜렷했다.
“그 기연, 내가 주지.”
“……”
“아까 내 실력 봤잖아. 그 정도면 너한테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요?”
하후휘는 마음이 동하면서도 설우 진의 제안을 쉽사리 수락하지 못했 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 가닥 의 심을 떨쳐 내지 못한 것이다.
“실은 내가 문파를 하나 세울 생각이거든.”
“……”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지? 뭐, 당연한 반응이야. 문파를 세우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 니까. 한데 내겐 그 조건들이 이미 다 충족돼 있어. 우선 돈은 내 이름 으로 예치된 것만 금자 수백 냥이 넘어. 그것은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것도, 훔친 것도 아니야. 다 내 능 력으로 벌어들인 거지. 그리고 문도 들도 최소한의 인원은 확보된 상태 야. 이쪽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총관 을 맡을 거고 이 비리비리한 녀석은 순찰당주 그리고 저쪽에 괜히 무게 잡고 앉아 있는 놈은 무력대의 대장 을 맡을 거야.”
설우진은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는 세 명의 친구들에게 지위를 부여했 다. 이에 자스민은 만족한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남궁벽 은 그와 반대로 기분 나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조인창은 이미 술상에 고개를 처박 고 있었다.
‘이 헛소리를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하후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냥 술김에 해 보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곧이곧대로 믿기엔 그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떤 조건이든 원하는 힘만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파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정말 당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는 거 요?”
하후휘는 진지한 눈빛으로 설우진 을 쳐다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 에 설우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 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난 공짜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 야. 그 말은 곧 투자한 만큼 부려 먹겠다는 뜻이지.”
설우진은 전생의 인연 때문에 하후 휘를 특별 대우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그 것은 회귀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는 그의 신조였다.
“나도 이유 없이 빚지는 건 싫소. 정말 내가 원하는 무공을 얻게 된다 면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 것 이오.”
“그럼 이 한 잔의 술로 맹약을 나 누지. 사내라면 한 입 가지고 두말 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
두 사람은 강하게 술잔을 부딪쳤 다. 피를 섞어 마시는 등의 허세는 생략했다.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고 조인 창에 이어 자스민도 쓰러졌다.
설우진을 노려보며 안간힘을 쓰던 남궁벽도 자정 무렵에 고개를 박았 다.
승급을 결정짓는 용익대전이 치러 졌다.
설우진은 모두의 예상대로 가볍게 상대를 꺾고 승급 심사에 당당히 합 격했다.
그의 뒤를 이어 남궁벽과 조인창, 자스민도 연달아 합격 소식을 전해 왔다. 남궁벽이 조금 고전하기는 했 지만 가까이서 지켜봐 준 설우진 덕 분에 아슬아슬하게 상대를 꺾을 수 있었다.
용익대전이 끝난 뒤, 설우진은 객 잔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철사자회 의 회식을 위해서 스무 명의 넘는 인원이 용미각으로 모여들었다.
용미각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위치해 있지만 시원한 국물 맛이 일 품이라는 소문이 퍼져 관도들 사이 에 꽤 인기가 높았다. 용미각 일층 이 철사자회 회원들로 꽉 들어찼고 식탁에는 설우진이 미리 주문해 놓 은 요리들이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들 올 한 해 수고 많았다. 승급 시험에 떨어져서 의기소침한 녀석들 도 있겠지만 우린 이제 겨우 시작점 에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간의 마음고생은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운 내일을 맞 이하도록 하자.”
본격적인 식사에 앞서 설우진은 회 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춰 가며 한해를 정리하는 건배사를 외쳤다.
물론 그의 자의는 아니었다.
부회주인 조인창이 회주로서 최소 한의 역할은 해 달라며 매달리는 바 람에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다. 뭐 동기야 어쨌든 설우진의 건배사 덕분에 회식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 올랐다. 마음 맞는 지우들이 옆에 있고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요리들 이 눈앞에 있으니 분위기가 안 좋아 지려야 안 좋아질 수가 없었다.
“우진아, 넌 방학 때 고향에 다녀 올거야?”
조인창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옆자 리에 앉은 설우진을 마주 보며 물었 다.
건배주로 달랑 한 잔 마셨을 뿐인데도 그의 얼굴엔 옅은 홍조가 피어 올라 있었다.
“가족들 얼굴 못 본 지도 오래됐으 니 집에 다녀와야지. 그러는 넌?”
“아버질 생각하면 가고 싶지 않은 데, 동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네 동생 괜찮아? 그날 꽤 충격이 컸을 텐데.”
“처음엔 많이 힘들어했는데, 최근 에 보내온 편지를 보니 잘 극복해 낸 것 같아. 아, 그리고 깜빡 잊고 못 전했었는데 자, 이거.”
조인창이 갑자기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내 푸른 비단에 구름 위를 노니는 용의 형상이 생동감 있게 수놓인 영웅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