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3화 : 승부수를 던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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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8권 – 23화 : 승부수를 던지다 (1)


승부수를 던지다 (1)

“우진이 부탁을 받고 찾아 오셨다 고요?”

“아, 네.”

설가장을 찾은 궁악비는 한껏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네는 설무백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우진이 돈 좀 있는 집 아들이라 는 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 지만 설가장의 규모는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했다.

‘이놈, 금수저도 보통 금수저가 아니군. 이렇게 돈 많은 집인 줄 알았으면 보수를 더 올려 받는 것인데.’ 

궁악비는 설우진의 재력을 확인하 자 진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들었을 텐데 한 잔 드시지요.”

설무백이 귀한 용정차를 권했다. 평소 차보다는 술을 즐겨 마셨던 궁악비로선 달갑지 않은 호의였다. 하지만 주인 앞에 대놓고 싫은 내색 을 할 수 없어 억지로 목구멍 너머 로 밀어 넣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뒤 궁악비는 주머니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둥 근 공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설무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화린이라는 물건입니다. 일반인들 은 잘 쓰지 않는 물건이지만 저희 같은 무인들은 꽤나 요긴하게 씁니 다. 사용법은 요기 있는 이 심지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화, 화탄 같은 것입니까?”

“하하, 생긴 것만 보면 그런 오해 할 수도 있는데 화린은 화탄이 아니 라 신호탄입니다.”

“이걸 왜?”

“젊은 친구가 꽤나 고약한 일에 휘 말린 것 같더군요.”

궁악비는 자세한 사연은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얘기했다.

“우진이는 괜찮은 겁니까?”

설무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 다.

“그 친구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대단한 무공을 익혔는 지 저도 상대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궁악비가 어색한 표정으로 설무백 을 위로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쪽 아들과 붙어서 졌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 다.

‘네놈이 이해해라. 나도 체면이란 게 있잖느냐.’

궁악비는 애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 화했다.

이후 그는 설무백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입으로는 이러지 말라 연신 얘기하면서도 그의 손은 쉴 새 없이 술병으로 향했다.

때문에 철사자회를 찾아가라는 설 우진의 말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됩니 까?”

계약서를 작성하고 난 뒤 설우진이 물었다.

진추성과 통천문으로 오는 동안 마 천과 관련된 얘기들을 나누기는 했 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들은 바가 없 었다.

그의 물음에 적사호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조만간에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두둥.

설우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생에는 그저 마천 쟁투 당시에 정신없이 도망쳐 다닌 것밖에 기억 이 남는 게 없다.

그때는 활약하기에 너무 힘이 모자 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마음먹 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마천 쟁투의 판 자체를 뒤엎어 버릴 수 있었다.

“넌 그 싸움의 판도를 뒤바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지금의 강호는 쌍룡맹과 마천의 대척점에 서 있다. 전쟁이 일어난다 면 두 세력은 정신없이 치고받게 될 테지.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곳도 승리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호시탐탐 그들의 뒤를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지.”

“역천회.”

부지불식간에 설우진의 입에서 하 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전생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 는 마천 쟁투의 최후 승자.

“정확히 짚었다. 널 부르기에 앞서 난 쌍룡맹주와 은밀히 만남을 가졌 다. 그리고 긴밀한 논의 끝에 쌍룡 맹과 마천의 양자 구도에 제삼의 세 력인 역천회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쉽진 않겠지, 놈들은 어떻게 해서 든 전력의 누출을 최소화하려고 할 테니. 그래서 네 역할이 중요하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을 시키려 고.”

설우진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사호 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너는 조만간 미끼가 되어 황룡 학 관에 웅크리고 있는 마천의 전위대 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놈들이 밖으로 나오면 역천회의 안 가로 가서 수신무위들과의 충돌을 유도해야 한다.”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나 보고 마천의 무사들이 득실거리는 황룡학관에 제 발로 찾아가라는 겁니까?”

설우진이 적사호의 말을 중간에 끊 고 되물었다.

적사호는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대신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누굴 죽이려고…………….’ 

설우진은 사납게 구겨진 얼굴로 다 급히 소리쳤다.

“전 그런 미친 짓은 절대 못합니 다. 적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켜야지…….”

“네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하나, 너 말고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이가 없다.”

“통천문에도 고수는 있을 거 아닙니까?”

설우진이 강하게 반박했다.

이에 적사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 했다.

“지난 마천 쟁투에서 대다수가 죽 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이들도 그 일에 동원하기 에는 너보다 실력이 떨어진다.”

적사호가 통천문의 내밀한 사정을 밝혔다.

그 사정을 듣다 보니 설우진은 가 슴이 답답해져 왔다. 거부할 명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건가?’

복잡한 심경의 변화 속에서 설우진 은 체념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잠시 후, 설우진이 퉁명스러운 어 투로 입을 뗐다.

“역천회의 무공을 하나도 모르는데 미끼 역할을 어떻게 합니까?

“그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다, 널 위해 미리 검보를 만들어 뒀으니.” 

적사호가 최근에 만든 듯 표지가 빳빳하게 서 있는 책자를 설우진에 게 건넸다. 받아 펼쳐 보니 통천문 의 비천검공이 세세하게 수록돼 있 었다.

“이런 걸 외인한테 함부로 줘도 되 는 겁니까?”

설우진이 검보의 내용을 확인하고 는 찝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통천 문과 너무 깊숙이 엮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가 왜 외인이냐? 과정이야 어찌 됐든 우리 문의 벽뢰진천을 익히지 않았느냐.”

“무슨 그런 억지가…………….”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토해 내라.” 적사호는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틀 린 말은 아니었기에 설우진은 계속 버틸 수 없었다.

“좋습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 제 잘나신 수호 가문의 무공을 익혀 보겠습니까.”

결국 설우진은 적사호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적사호는 설우진이 그리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화를 이어 갔다.

“비천검공은 본문의 기본 검이다. 검술의 요체가 까다롭지 않으니 이 틀 정도면 충분히 손에 익힐 수 있 을 것이다.”

“이틀은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엄살 부리지 마라. 절세마공도 완 숙의 경지에 이른 녀석이 그깟 기본 검에 헤맨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틀 내로 무조건 익혀라.”

적사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래. 더 얘기해 봐야 내 입만 아 플 테지.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익혀 주겠어.’

설우진은 검보를 챙겨 방을 나섰 다.


쉭쉭 쉬쉬쉭.

늦은 밤, 사나운 파공성과 함께 시 퍼런 빛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 다. 경쾌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의 연속이었다.

“이 정도면 대충 흉내는 낼 수 있 을 것 같은데.”

설우진이 검을 내리며 혼잣말로 읊 조렸다.

그는 검보를 받고 난 뒤 바로 비 천검공을 익혔다.

기본검이라고 하지만 비천검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승검법보다 그 무리가 복잡했다.

비천검공은 기본적으로 두 개 이상 의 검결이 결합돼 있었다.

일례로 일 초식인 분절의 경우 빠 르게 검을 내뻗으면서 그 끝을 흔들 어야 했다.

빠르게 검을 내뻗는 동작에서 쾌가 그리고 검극을 흔드는 동작에서 변 의 묘리가 발휘하는 되는 것이다. 한데 설우진은 그 복잡한 비천검공을 불과 세 시진 만에 숙달했다.

어떻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술술 익혔다.

아무래도 적사호의 말처럼 상위의 무공을 익힌 경험이 큰 도움이 된 듯했다.

“후우, 이제 슬슬 방으로 돌아가볼까.”

설우진이 검을 허리에 거두고 옷매 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귓전에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 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소리였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쫓기는 거지?’

설우진은 소리를 쫓아 담벼락을 뛰 어넘었다. 그리고 소리에 의존해 바 쁘게 걸음을 옮겼다.

“나, 난 이미 틀렸네. 자네라도 어 서 도망치게.”

“군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난국에는 저보다 군사님이 더 필요 합니다. 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두 개의 인 형, 그들은 신추명과 해천인이었다. 사흘 전, 신추명은 현무문에 잠입 해 감금 중이던 해천인을 구출해 냈 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잠력환을 복용했 다.

잠력환은 일시적으로 강한 힘을 내 게 해 주는 마약이었다.

약효가 떨어지면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지기에 정파 내에서는 사용을 엄히 금하고 있었다.

신추명은 그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 서도 잠력환을 세 알이나 먹었다. 현무문의 삼엄한 경비를 뚫기 위해 선 한계를 초월한 힘이 필요했기 때 문이다.

쉬익.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 안 등 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 었다.

신추명은 이에 맞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힘겹게 휘둘렀다.

챙강.

검이 크게 흔들렸다. 

급격하게 소진되는 체력 탓에 검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것이다.

이에 신추명은 다시 품 안에서 마 지막 남은 잠력환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해천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걸 먹으면 자넨 죽네!”

“제 미력한 목숨으로 군사님을 구 할 수 있다면 백번이고 그리할 것입니다.”

신추명이 웃으며 잠력환을 입으로 가져갔다.

해천인이 말려 보려 손을 뻗었지만 기력이 빠진 손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면에서 작은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미처 피하고 할 새도 없이 돌멩이가 잠력환을 쥐고 있던 검지를 때렸 다.

‘안 돼.’

잠력환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신추명의 얼굴이 깊은 절망감으로 얼룩졌다. 잠력환의 도움 없이 더 이상의 도주는 불가능했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해지자 그의 몸 은 급격히 무너졌다. 얼굴은 돌무더 기에 긁히고 양손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갔다.

“후훗, 꼴좋구나, 신추명! 겁도 없 이 본문에 잠입하더니 결국 이리되 는구나.”

쓰러진 신추명의 등 뒤로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위가렴이었다.

“청성, 그 아이는 놔 주거라. 너희 들이 필요로 하는 건 내가 아니더 냐.”

해천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위가 렴의 앞을 막아섰다.

“군사 어르신, 유감스럽게도 그 청 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지 모르겠지만 이미 회에서는 통천 문을 배제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 다.”

“배제하다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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