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8화 : 판을 벌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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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8권 – 28화 : 판을 벌이다 (3)


판을 벌이다 (3)

‘그곳에 숨어 있었군.’

마석진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그의 발걸음이 벼랑 쪽으 로 향했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뉘 인 절벽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이 보였다.

‘은잠술이 아니라 얄팍한 눈속임이 었군. 어디 잡아서 황유하 그자와 무슨 얘길 나눴는지 알아볼까.’

마석진이 벼랑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단숨에 머리채를 잡아 위로 끌 어 올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머리칼을 쥐려는 찰나 손목 이 붙잡혔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몸이 벼랑 쪽으로 쏠렸다.

급한 마음에 허리에 차고 있던 검 을 뽑아 벼랑에 냅다 꽂아 넣었지만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검이 벼랑에 파고들기도 전에 이미 두 다리가 허공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게 사람을 가려서 쫓았어야 지.”

설우진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마 석진에게 뼈저린 충고를 남겼다. 깔끔하게 꼬리를 잘라 낸 후 설우 진은 황유하가 얘기한 모처로 향했다.

그곳은 하남성 서남부에 자리한 대 별산의 한 산채였다.

대별산은 쌍룡맹이 자리를 잡기 전 까지 녹림도들이 들끓었던 곳이다. 호북과 하남을 오가는 상인들이 많 이 그곳을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리 떼가 꼬인 것이다.

하지만 쌍룡맹이 생겨나면서 녹림 도들은 분루를 머금고 집을 비웠다. 

“여긴가?”

설우진이 산채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전면에서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고 설우진은 가볍게 후보를 밟 으며 몸을 살짝 틀었다.

쉭.

이후 문에는 짧은 파공성과 함께 비도가 연달아 틀어박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환비도였다.

‘실력은 나쁘지 않군. 뭐, 잘만 굴 리면 쓸 만한 전력이 되겠어.’

“맹주님이 보내서 왔다. 이걸 보면 믿을 테지.”

설우진은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황유하로부터 받았던 철패를 정면에 내보였다.

칙칙한 빛깔에 밋밋한 문양까지, 전혀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철패였 다.

그런데 그 철패를 보이자마자 주변 의 날카로운 기세들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비검대 부대주 차건웅, 대주를 뵙습니다.”

비도를 날린 것으로 짐작되는 서른 무렵의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와 정 중히 인사를 청했다.

‘비검대라………… 이름 그대로 숨겨진 검이라는 뜻인가?’

설우진은 차건웅을 시작으로 비검 대원들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눈에 담았다.

다들 균형 잡힌 몸에 오래 수련한 듯 자연스러운 예기가 느껴졌다.

“날도 추운데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길 나누지.”

“절 따라오십시오.”

차건웅이 설우진을 산채 깊숙한 곳 에 자리한 방으로 안내했다. 채주가 머물렀던 곳이었는지 바닥에는 호랑 이 가죽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갖가 지 병장기들이 장식처럼 걸려 있었 다.

“나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차건웅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고 설 우진은 그 솔직함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에둘러 얘기하지 않고 자신 에 대해 직설적으로 밝혔다.

“난 설우진. 뭐, 오래 볼 사이는 아니니 이름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될거야.”

“그게 무슨……?”

“쉽게 얘기하면 난 이번 일을 위해 서 임시로 고용된 용병이야. 대주로 서 너희들을 지휘하기는 하겠지만 일이 끝나면 남남이 된다는 뜻이 지.”

설우진은 가감 없이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한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당혹스 러울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를 끌어들이신 거지? 소속감 이 없다는 건 언제든 상황이 불리해 지면 태도를 달리 할 수 있다는 뜻 인데.’

차건웅은 이번 일에 대하는 마음가 짐이 남달랐다. 비검대라는 새로운 조직을 꾸린 이후 처음으로 맡게 된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믿고 의지해야 할 대주가 임시직이 라니,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함께하는 동안에라도 잘해 보자 고.”

“아, 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 내일이 날이 밝으면 지금처럼 한가하게 얼 굴 마주하기 힘들 테니.”

설우진이 차건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자연스럽게 침상으로 향했 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차건웅은 멍 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대장, 아까 그 새파랗게 젊은 놈 이 새로운 대주 맞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 대가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움직이는 것 인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를 따 르라니요.”

“당장 맹주님을 찾아봬야 합니다.”

설우진이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비 검대원들이 저마다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대주가 온다는 소식에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맹주가 직접 임 명하는 자리이니 강호의 명망 높은 고수가 올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 다.

그런데 대주라고 온 자는 너무 젊었다.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 게다가 얼굴도 무척 낯설었다. 명문 가의 인재도 아니란 뜻이다. 

“다들 목소리 낮춰라.”

차건웅이 굳은 표정으로 경고했다. 입이 나와 있던 비검대원들은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황급히 입을 다물 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만은 그의 뜻에 반했다.

“형님, 전 그자를 대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건호, 이건 맹주님의 뜻이다.”

차건웅의 시선이 유건호의 얼굴로 향했다.

유건호는 비검대 내에서 가장 뛰어 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차건웅도 그에게만큼은 한 수 접어 줄 정도였 다. 그런 만큼 비검대 내에서 그의 입김은 상당히 셌다.

“형님, 이렇게 믿음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마천에 검을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형님이 말을 못 하겠다면 제가 직접 맹으로 가겠습니다.” 

유건호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가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못 말린다는 것을 알기에 차건웅은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설우진이 묵고 있는 이 층 방의 창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향했다.

“다들 안 자고 뭐해!”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금방 해 산시킬 테니 어서 주무십시오.” 

차건웅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한데 그것이 실수였다. 유건호가 그 모습에 발끈해 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토해 내 버린 것이다. 

“건방진 놈, 우린 네놈을 인정할 수 없다! 무슨 의도로 맹주님이 널 이곳으로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네 자리로 돌아가 라!”

그야말로 폭탄 발언이었다.

대다수의 비검대원들은 속이 시원 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차건 웅은 암담함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한데 설우진의 반응은 의외였다. 발끈해서 소리라도 내지를 줄 알았 더니 되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그래, 이게 정상이지. 나 같 아도 이런 엿 같은 상황이면 꼭지가 돌았을 거야.”

“……?”

“근데 안타깝게도 이미 계약서에 수결까지 한 상황이라 이대로는 못 돌아가. 위약금을 물어 줘야 하거 든.”

‘정말 맹주님이 돈을 주고 고용했 단 말인가?’

차건웅은 설우진의 얘기에 머릿속 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마천을 상대로 하는 은밀한 작전이 다.

정보가 세는 걸 막기 위해 맹에도 알리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돈으로 사람을 사다니,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유건 호가 다시 한 번 설우진에게 폭탄을 던졌다.

“우릴 네 수족으로 부리고 싶다면 실력으로 증명해라. 모두가 보고 있 는 이 자리에서 날 꺾는다면 그때는 널 대주로서 깍듯이 대하겠다.”

차건웅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 다. 유건호가 강경하게 나설 때 혹 시나 하고 품었던 생각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건호, 이게 무슨 무례냐! 당장 무 릎 꿇고 사죄해라. 그리하지 않는다 면 내가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차건웅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평소보다 강경한 어조로 유건 호을 힐책했지만 유건호는 끝내 뜻 을 굽히지 않았다.

“힘으로 증명하라고? 뭐,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 좋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설우진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살기를 발산했 다.

비검대원들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설우진의 살기에 목 숨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바로 그때, 차건웅이 오른발을 세 차게 굴렸다. 그를 중심으로 발산된 경력이 간발의 차이로 설우진의 살 기를 해소시켰다.

“여기서 할까?”

설우진이 유건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유건호는 아까와 달리 살짝 위축된 모습이었다.

‘방금 전의 그 살기,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어. 내가 검을 뽑아 들었다면 진짜 죽이려 들었을 거야.’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유건호는 설우진이 방금 전에 보여 준 한 수로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방 심을 버렸다.

전력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진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모두 십 장 밖으로 물러서.”

유건호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그들도 설우진의 실력이 보통이 아 님을 어느 정도 눈치챘던 터라 순순 히 뒤로 물러났다.

“먼저 비명을 지르는 쪽이 지는 걸 로 하지.”

설우진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양손을 풀었다. 함께할 사이에 피를 볼 수 없어 천뢰도는 방에 두고 온 것이다.

이에 유건호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럼 시작해 볼까.”

무대가 마련되자 설우진은 벼락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선공을 양보하는 식의 배려는 하지않았다.

흙먼지가 사납게 피어올랐다.

유건호는 설우진의 움직임을 두 눈에 담으며 양발에 힘을 실었다.

파파팟.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내달렸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서 정면으로 맞 닥뜨렸다.

두 쌍의 주먹이 현란하게 상대의 급소를 노렸다. 내력이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주먹을 내뻗을 때마다 이 는 바람은 제법 매서웠다.

초반의 공방전은 우열을 가리지 힘 들 정도로 비등했다.

서로 쉴 틈 없이 공격을 이어 가 고는 있지만 급소에 꽂히는 정타는 한 번도 나오질 않았다.

“저자, 실력이 만만치 않아. 비검대 내에서 건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차 부대주님 뿐인데 조금도 속도에서 뒤처지지 않고 있잖아.” 

“아직 건호가 전력을 발휘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보고도 그 런 소리가 나와? 평소 우리와 대련 할 때는 저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잖아.”

비검대원들의 시선은 온통 유건호 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유건호는 동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마치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 같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는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내력만 싣지 않았을 뿐이지 전개되 는 공격들을 그가 어릴 때부터 익혀왔던 풍류권의 정수였다.

풍류권은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강 의 묘리가 담고 있는 대표적인 권법 이었다.

겉보기엔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연약해 뵈지만 그 안에는 철탑거석 도 일격에 부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이 있으면 뭐 하겠는 가, 맞추질 못하는데.

“겨우 이 정도로 날 시험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겠지?”

초조함이 고조되고 있을 때 설우진 이 그를 자극했다.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 유건호는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내력을 끌어올렸다.

내력이 충만해진 그의 몸놀림은 전에 비할 데 없이 빨라졌다.

‘닿는다.’

강렬하게 전해지는 주먹의 감촉. 유건호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 지 않기 위해 풍류권의 후반 삼절초 를 연달아 전개했다.

풍신유희.

바람을 머금은 주먹이 설우진의 전 면에 들이쳤다.

설우진이 재빨리 방벽을 쳤지만 제 대로 발휘되기 시작한 태극권의 힘은 그 방벽을 가볍게 밀어냈다.

드디어 설우진의 가슴이 열렸다.

‘이 한 방으로 끝낸다.’

유건호가 한 점에 바람을 끌어모았 다.

풍혈. 풍류권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일점에 모은 그 힘은 고수의 상징 인 호신강기까지 꿰뚫어버릴 수 있 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주먹으로 모여 들었다.

대부분 그 주먹이 설우진의 가슴에 꽂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설우진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외로 설우진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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