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16화 : 범 아가리 속으로 (3)
범 아가리 속으로 (3)
“모든 게 내 부덕의 소치다, 널 가 르칠 때 좀 더 엄격하게 대했어야 했는데………….”
차릉.
비연검이 날씬한 자태를 뽐냈다. 얼마나 긴 세월 날을 세워 왔는지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리던 나뭇잎이 검날 위로 날아와 그대로 반으로 갈 라졌다.
“자, 장로, 지, 지금 뭐 하려는 거 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정이건이 설우진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용성하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전각 쪽으로 무심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자, 장로를 막아 줘.”
정이건이 설우진의 등 뒤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말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한심한 놈이군. 하지만 학관으로 들 어가기 위해선 싫어도 녀석이 지키 는 대로 해야겠지.’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있는 한 아 무도 문주님의 몸에 해를 끼치지 못 할 겁니다.”
설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 아 래로 가볍게 몸을 날렸고 자연스럽 게 두 사람이 대치하는 형국이 됐 다.
“이건 나와 문주가 풀 문제다. 다 치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뒤로 빠져 있도록 해라.”
용성하가 어린아이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하겠는데. 문주하고 약속을 했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기로.”
“건방지구나.”
“후훗, 그건 강자가 약자한테 하는 말이지.”
“이놈!”
설우진의 태도에 발끈한 용성하가 기습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내력이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검이 파고드
는 경로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설우진은 그보다 몇 수 위의 강자다.
전력을 다해도 통할까 말까인데 내 력이 실려 있지 않은 그의 검이 통 할 리 만무했다.
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설우진의 주먹 이 검신 한복판을 때렸다. 한 점에 집중된 권격에 긴 세월 용성하의 곁 을 지켰던 비연검은 산산이 부서졌 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용성하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정이건의 얼굴은 반대로 희열에 차올랐다.
“네, 네놈은 정체가 뭐냐?”
용성하가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힘 겹게 입을 뗐다.
이에 설우진이 앞으로 발을 내디디 며 그의 목덜미를 기습적으로 잡아 챘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을 정도로 빠 른 손 속이었다.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잖 아. 하늘같은 문주께 검을 들이대 놓고도 무사하길 바라?”
“커억.”
용성하가 설우진의 손목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쳤다.
처음엔 정이건도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한데 용성하의 눈에 서 점점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돌변했다.
‘설마 진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정이건은 덜컥 겁이 났다.
용성하는 그에게 버팀목 같은 존재다.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게 싫고 짜증 이 나기는 했지만 그가 없는 고검문 은 상상할 수 없다.
“머, 멈춰!”
용성하의 목이 거의 꺾이기 직전, 정이건이 다급히 설우진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설우진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손 속이 좀 과해 보이는데 그쯤하 지. 노인네는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느는 게 당연하잖아.”
“이자는 문주님께 검을 겨눴습니 다. 마땅히 하극상의 죄로 다스리는 게………….”
“내가,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이자로 인해 문주 자리가 위태로 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 시겠습니까?”
설우진이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물었다. 정이건은 한참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문주님의 뜻대로 하죠.”
설우진이 손을 풀었다.
이미 기절했는지 용성하는 그대로 제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정이건 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 다. 다행히 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정이건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설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본 문의 장로인데 이리 혐 하게 손을 써서 되겠어?”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뭐, 됐어,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 니까.”
‘니미럴, 네놈이 도와 달라 청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어휴,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설우진은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네는 정이건에게 순간적으로 살의 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남궁벽의 얼굴을 떠올 리며 입가에 억지 미소를 그렸다. 그로부터 사흘 뒤, 설우진은 정이 건과 함께 마천이 도사리고 있는 황 룡학관으로 향했다.
“그 아이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한 것이오?”
황유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 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적사호가 앉아 있 었다. 그 또한 표정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였다.
“악운이 강한 만큼이나 명줄도 질 긴 녀석이오. 분명 아무 일도 없었 다는 듯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 걱정 마시오.”
두 사람은 설가장과 철사자회에 닥 친 변고를 뒤늦게 보고받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걱정한 건 설우 진의 안위였다.
다행히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고만 있을 뿐 시체가 발견됐다는 식의 비 보는 없었다.
설우진에 대한 짤막한 얘기가 오간 후, 두 사람은 본격적인 회의에 들 어갔다.
“녀석이 활약해 준 덕분에 마천과 역천회는 적잖은 피해를 입었소. 아마 당분간은 그 손실된 전력을 만회 하려 애를 쓸 것이오.”
“그럼 지금이 적기겠구려?”
“그렇소. 지금이야말로 쌍룡맹을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요. 전위대의 손실로 마천의 움직임은 기민하지 못할 것이고 역천회 또한 쌍룡맹의 뒤를 노리지 못할 터. 이 기회만 잘 활용한다면 마천을 섬서 밖으로 밀 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 오.”
적사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결코 과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실제 마천의 전위대와 역천회의 수신무위가 부딪친 뒤로 두 세력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설우진은 절반의 성공이라며 스스 로의 성과를 폄하했지만 두 세력이 입은 피해는 꽤 컸다.
일단 마천 쪽에선 흑랑대와 백랑대 가 학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질책성인지, 치료를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황룡 학관 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천회의 경우 내부에서 심 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주작문 의 수신무위인 염궁대가 전멸에 가 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주작문주가 두 세력의 진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턴 맹주의 역할이 중요하 오. 어떤 식으로든 세가의 가주들을 설득해 쌍룡맹 쪽에서 먼저 공격을 취하도록 만들어야 하오.”
적사호가 황유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알았소. 내 적 문주의 기대에 어 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 소.”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바야흐로 진짜 전쟁의 시기가 다가 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라.”
퉁명스러운 말투로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황룡 학관의 창고였다.
창고 앞 공터에는 여러 개의 천막 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막 안 쪽에선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송 사범, 설마 저기로 가라는 건 아니겠지?”
정이건이 송문기, 아니 설우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부푼 기대를 안고 황룡 학관 을 찾았다. 아무리 마천이라도 돕겠 다고 찾아온 자신을 홀대하지는 않 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완전 찬 밥 신세였다.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는 말은커녕 선심 쓰듯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한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천막행이라니.
“문주님, 일단 시키는 대로 따르시 지요. 괜히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다 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쫓 겨날 수 있습니다.”
설우진은 정이건을 살살 달래며 뒤 쪽에 도사리고 있는 마천의 무사들 을 곁눈질로 가리켰다.
정이건은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는 지 바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천막에는 고검문보다 앞서 들어온 다섯 개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의 문파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건이 아니 냐!”
빈 천막으로 향하려 할 때 금빛이 가까운 황색 무복을 걸친 중년인이 정이건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한데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닌지 정 이건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검문주님.”
정이건이 억지 인사를 건넸다.
“녀석아, 숙부 조카 사이에 뭘 그 리 격식을 차리느냐! 어서 이쪽으로 오너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미검문주 황진설은 거침없이 정이 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정 이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왜 저렇게 겁에 질려 있는 거지? 보통의 숙부 조카 사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는데.’
설우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사 람을 바라봤다.
한데 그런 와중에 정이건이 설우진 을 가리키며 술자리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진설은 웃는 낯으로 설우진을 바 라보더니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
“네 아버지가 그리 가고 난 뒤로 이 숙부는 하루도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단다.”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계 신 것입니까?”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느냐. 내가 그때 비무만 청하지 않았어도………네 아비가 그리 허망하게 떠나진 않 았을 것이다.”
황진설이 연신 술을 들이켜며 괴로 운 마음을 토로했다. 한데 그 모습 을 바라보는 정이건의 표정은 딱딱 하게 굳어 있었다.
‘후안무치한 인간. 아버지를 그리 만든 게 단순한 우연이고 사고였다 고? 난 분명히 그때 기루에서 들었 어,당신이 일부러 아버질 함정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걸.’
정이건은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 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술이 떡이 돼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중간에 목이 말랐는지 잠에서 깼다.
하지만 주전자는 텅 비어 있고 술 도 남은 게 없었다. 해서 옆에서 자 고 있던 기녀를 깨워 물을 가져오라 시켰다. 한데 그 와중에 옆방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이름이 들려왔다. 바로 황진설이었다.
“젊은 나이에 가문을 이끌기 버겁 지 않느냐?”
“아니, 괜찮습니다. 문도들도 제 말 을 잘 따르고 용 장로님도 문 내의 제일 어른으로서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흐음, 이상하구나. 내 듣기로는 너 와 용 장로의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고 하던데?”
“헛소문입니다.”
정이건은 황진설의 속셈이 뭔지 뻔 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검문을 욕심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고검문이 자 리한 금싸라기 땅을 탐내고 있었다. 고검문은 소위 명당에 자리하고 있 었다.
그 터는 처음 문파를 만들 때 화 산의 명망 높은 도사로부터 점지를 받은 것이었다.
“헛소문이라니 다행이구나. 언제든 이 숙부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 라, 내 열일 제쳐 놓고 달려갈 터 이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이 돌았다.
설우진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사자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사자관까지 가려면 두 개 의 문을 지나야 하는데. 경비가 어 떨지 모르겠군.’
설우진은 사자관으로 향하는 길을 머릿속에 상세하게 그렸다. 가장 먼 저 거쳐야 하는 곳은 상원문이었다. 상원문은 외원과 내원을 이어 주는 문으로 학관일 당시에는 별도의 경 비 인원이 없었다. 굳이 학생들이 오가는 문을 지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현재 내원에는 마천의 천주가 거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적들이 쳐들어 올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그 경계가 허술할 리 만무했다.
‘일단은 몸으로 부딪쳐 보자.’
설우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상념에서 깨기 무섭게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문제의 발단은 역시나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