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5화 : 흉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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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9권 – 5화 : 흉사 (2)


흉사 (2)

오늘과 같은 극한의 상황을 한 번 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나온 치 명적인 판단 오류였다.

사일한은 등을 보인 채 내달렸다. 설우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아까 챙겨왔던 오낙성의 검병을 마치 비 수처럼 감싸 쥐었다.

“그렇게 내뺄 거였으면 애당초 내 뒤를 쫓지 말았어야지. 잘 가라.” 

설우진은 검을 힘껏 내던졌다. 강한 악력에 뇌기까지 더해지자 검은 한 줄기 폭풍이 되어 사일한의 뒤로 날아갔다.

퍽.

검병이 사일한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사일한은 그 충격에 몸을 휘청거리 다 이내 옆쪽의 천길 낭떠러지 아 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설우진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적들 앞에선 태연한 척했지만 그의 몸 상태는 지금 엉망이었고 거듭된 내상으로 장기의 기능이 크게 약화 된 데다가 무리하게 뇌기까지 끌어 쓰면서 중요 혈맥에 상처가 났다. 이를 방증하듯 설우진은 연신 토혈을 했다.

피는 검붉게 죽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힘겹게 속을 달래고 있을 때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건호가 설우진에게 달려왔다.

운기조식을 통해 어느 정도 기력을 찾았는지 아까보다 한결 혈색이 나 아 보였다.

“크큭, 얼굴이 좋아졌네. 이젠 네가 날 책임져…”

유건호의 얼굴을 확인한 설우진은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은 것이다.

유건호는 남은 한 팔로 힘겹게 설 우진을 업고는 이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저물어 가는 태양의 붉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길 부수고 이놈만 데려오면 된다는 거지?”

승룡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강인한 인상의 철마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위요신이 비릿 한 미소를 머금고 초상화 속의 한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냉막한 인상의 남궁벽이었다.

“닭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 가 있겠습니까? 사형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제가 애들을 끌고 가서 깔끔하게 정리해 놓겠습니다!”

서열 이 위의 철마, 갈무진이 넘치 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위요신과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민 머리에는 네 개의 계 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 계인은 혈불 의 제자라는 의미였다.

“흠,하긴 내가 직접 움직이기엔 격이 안 맞기는 하지. 알았다. 난 이곳에서 기다릴 테니 남궁벽이란 애송이만 살려서 내 앞에 데려와 라.”

위요신은 갈무진의 청을 흔쾌히 수 락했다.

잠시 후 갈무진이 철마들을 이끌고 철사자회의 정문으로 향했다.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져 날아갔다.

한데 철사자회의 식구들은 철마들 을 보고도 그리 긴장하는 모습을 보 이지 않았다. 나태하게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사람을 보는 눈마저 흐 려져 버린 것이다.

“하아, 이 애새끼들이 우릴 보고 웃네. 애들아, 저 입에서 곡소리 나 게 좀 밟아 줘라.”

갈무진은 사납게 눈살을 찌푸리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마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눈에 띄는 철사자회의 회원들을 말 그대로 짓밟았다. 

“커억, 커억.”

여기저기서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철마들의 공격은 강하고 매서웠다. 가볍게 내지르는 발길질에도 철사 자회 회원들이 그대로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싸움.

반전이 일어난 것은 후원에서 수련 중이던 남궁벽과 조인창이 개입하면 서부터였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부류의 검을 뿌렸다.

묵직하게 힘이 실린 중검과 바람을 머금은 쾌검이었다.

철마들은 두 사람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강철보다 단단해진 자신의 몸뚱이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일한 생각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남궁벽의 중검은 두꺼운 벽 너머에 큰 충격을 안겨 줬고 조인창의 검은 강하고 질긴 살갗을 그대로 갈랐다. 

“웬 놈들이냐?”

한 명의 철마를 쓰러뜨린 뒤 남궁벽이 사나운 일갈을 내질렀다. 

“호오, 드디어 나타나셨군.”

갈무진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남궁 벽과 눈을 맞췄다.

철마 둘이 당하긴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다. 

‘우려가 현실이 됐군, 하필이면 우 진이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마천 놈들이 쳐들어오다니. 게다가 하나같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남궁벽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에 비친 철마들은 강했다. 벽을 한차례 뛰어넘었기에 그 강함 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벽아, 우리만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조인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궁 벽을 쳐다봤다. 남궁벽은 입술을 잘 근 씹으며 말을 뱉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건 무리야. 하니 넌 이대로 설 가장으로 달려가.”

“거긴 왜?”

“마천 놈들이 이곳을 노린 걸 보면 우진이 녀석의 가족들도 그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높아. 하니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그 사실을 전하고 안 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혼자서 괜찮겠어?”

“어차피 네가 있어도 이기기 힘든 싸움이야. 그리고 정 불리하면 혼자 라도 도망칠 테니 걱정 말고 어서 가.”

남궁벽이 조인창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꼭 돌아올게. 그때까지………… 어떻 게든 버텨 내!”

조인창이 금방이라도 울 듯 한 얼 굴로 담벼락을 향해 내달렸다.

갈무진은 철마 하나를 지목해 그 뒤를 쫓게 했다.

하지만 그 철마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남궁벽이 무리를 해 가며 그 길목 에 검기를 날려 보낸 것이다.

“쯧쯧, 쓸데없는 짓이야. 아마 그 애송이가 도착했을 때쯤이면 이미 설가장은 요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거야.”

“요마……?”

“우리와 같은 용도로 길러진 사냥개들이지. 어찌나 피에 환장을 하는 지놈들이 다녀갔다 하면 남아나는 게 없다니까. 솔직히 한편이지만 우 리도 그놈들을 보면 가끔씩 소름이 돋아.”

일부러 겁을 주고자 부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 요마들은 잔혹한 성품을 지니 고 있었다.

풀지 못하는 성적 욕망에 뒤틀린 심성이 피에 대한 갈구로 이어진 것 이다.

“자, 자, 요마 얘긴 그쯤하고 이제 제대로 붙어 보자고. 네 검에 쓰러 진 저 얼간이하고 내 주먹은 느낌이 많이 다를 거야.”

갈무진이 가볍게 주먹을 매만지며 앞으로 신형을 튕겼다.

살짝 땅을 밟았을 뿐인데도 어찌나 각력이 센 지 돌판이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갔다.


한편, 설가장에는 갈무진의 얘기대 로 요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데 의외로 요마들은 고전하고 있 었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건 낭왕 궁악 비와 설우진의 스승 팽천호였다. 두 사람은 우연히 저잣거리에서 만 났다.

젊은 시절 함께 의뢰를 수행했던 인연이 있었던지라 두 사람은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에서 둘은 호 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소문난 주당들이 만났으니 어찌 보 면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설가장의 후원에 서 술상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 고 있었다.

그런데 술상을 가지러 간 시종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달려왔다. 횡설수설하며 뭐라고 얘기하는 걸 본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설가장에 변고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 즉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문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직 싸움은 벌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불청객들이 내뿜는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다.

가만히 대치만 하고 있는데도 몸에 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숨을 옥죄는 듯했다.

궁악비가 팽천호의 얼굴을 흘깃 쳐 다보며 물었다.

“아우, 감당할 수 있겠나?”

“후훗, 현역에서 물러난 지 좀 되 기는 했지만 아직은 거뜬합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곳은 하나뿐인 제자 녀 석의 집입니다.”

팽천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설우진에게 천뢰도를 준 뒤 그는 오랜 지기인 주천기에게 지금의 보 도를 강탈하다시피 했다.

주천기는 술만큼이나 신병이기를 좋아하는지라 지금 들고 있는 칼도 기존에 사용하던 천뢰도와 비교해 그 값어치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제자를 위하는 마음이 끔찍하군. 그럼 나도 거기에 한 팔 보태 볼 까.”

팽천호에 이어 궁악비도 병기를 빼들었다.

이윽고 싸움이 벌어졌다.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간 건 팽천호였다.

그의 움직임은 은퇴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민했다.

하지만 요마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투박하게 힘을 앞세우던 철마들과 달리 그들은 지능적으로 진을 구축 해 팽천호의 공격에 맞섰다.

타타닥.

비탈길을 치달려 가는 수레바퀴처 럼 요마들이 거칠게 땅을 구르며 원 을 형성했다.

다수의 인원으로 소수의 적을 제압 할 때 자주 쓰이는 파륜진이었다.

쉬쉬쉭.

정면에서 쉴 새 없이 요마들의 검이 밀려 들어왔다.

‘이거, 장난이 아니군. 어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겠는 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위기감이었다. 하지만 천호는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신이 살아 있다 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놈들아, 화끈하게 놀아 보자.”

팽천호가 잔뜩 내력을 끌어올리며 파륜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카카캉캉캉.

수십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칼이 맞물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기세만 놓고 보면 당장에라도 파륜 진이 팽천호의 몸을 찢어발길 것 같은데 팽천호는 신기하게 잘 버텨냈 다.

‘누가 그 제자에 그 스승 아니랄까 봐 몸이 알아서 살기에 반응하는군. 어찌 저런 각도에서 파고드는 검을 피하고 튕겨 낼 수가 있지?’

뒤쪽에서 뛰어들 기회만 엿보고 있 던 궁악비는 파륜진의 매서운 검날 에 대응하는 팽천호의 귀신같은 움 직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밀리는 형국이다, 조금만 삐 끗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은 초조하 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 오든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빌어먹을, 이런 고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공격이 좀체 풀리지 않자 뒤쪽에 빠져 있던 요마들의 수장 나철휘가 고운 아미를 사납게 찡그렸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하우연으로 부터 설가장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 를 받았다.

한데 특이한 점은 없었다.

경비병력은 일반적인 무가 수준이 었고 그들 개개인의 실력도 이류를 갓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런데 막상 설가장에 도착하고 보 니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둘이나 버 티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리다간 우리보다 철마 놈들이 먼저 임무를 완수하게 될 거야. 절대 그리되게 놔 둘 수는 없지.’

나철휘가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요마와 철마 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이 못 됐다. 특히 위요신과의 사이는 견원지간이 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저놈은 내가 맡는다. 너희들은 파 진해서 설가장주 설무백을 잡아 와 라. 나머지는 죽여도 좋다.”

나철휘가 작정하고 명령을 내렸다. 요마들은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 을 멈춰 세우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팽천호와 궁악비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두 사람은 강하지만 설가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할 수는 없었 다.

그들의 몸은 열이 아니라 하나이기 에.

“형님, 놈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내 서는 안 됩니다.”

팽천호는 다급한 목소리로 궁악비 를 불렀다. 그런데 마음이 통했는지 궁악비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내원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부인, 애들을 데리고 은밀히 장원 을 빠져나가시오. 궁 어르신의 말대 로라면 무사히 무한 땅을 빠져나갔을 수 있을 것이오.”

요마들이 내원으로 향하고 있을 때 설무백은 하얗게 질려 있는 여소교 를 진정시키며 다급히 말을 전했다. “당신은 어쩌려고요?”

여소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기회를 봐서 따라가겠소.”

“그럴 거면 그냥 함께 가는 게…..”

“난 이 장원의 주인이오. 어찌 날 믿고 따르는 이들을 버려두고 무책 임하게 떠날 수 있겠소!”

설무백의 뜻은 강경했다.

남편의 성정을 아는지라 여소교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여소교가 떠난 뒤, 설무백은 서랍장을 열어 소도를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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